-1955년 장준하의 사상계와 1956년 함석헌의 등장-


    
1955~56년 초창기 사상계를 이끌었던 장준하 사단. 왼쪽부터 김준엽,
장준하, 안병욱(앞), 김성한(뒤), 양응모, 김호전 제씨들.



이승만 대통령의 ‘한글간소화안’에 대해 장준하, “정치가 문화 지배 말라”
이승만 정권과의 싸움 통해 “사상계는 장준하의 것이 아니다” 깨달아



사상(死傷)을 이겨내는 사상계


이미 언급한대로 思想에 界자 하나를 덧붙여 김성식 교수의 ‘병든민주주의’, 포푸, 스로킨, 김기석, 권상로, 임한영, 지동식, 배성룡, 김재준, 김계숙 등이 참여하는 〈특집 : 인간문제>,  김광주의 소설 〈불효지서(不孝之書)> 등으로 이루어진 思想界 창간호가 마치 아슬한 국운의 현상을 책임이라도 지겠다는 듯 흑암과 혼동, 무질서와 부조(不條) 속의 피난수도 부산에서 그 기동(起動)을 시작한 것이다.

1953년 4월이었다. 잡지 사상계는 그 출발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피난살이의 땅, 미래는 물론 현실마저도 그지없이 절망적인 한지(恨地)에서, 자포자기 상태에 허우적이는 민생들에게 생기를 나눌 수 있는 ‘지성’(知性)들을 불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큰형뻘 같은 나이에 게다가 대단히 저명한 인사들이 원고료, 수고료 마저 개의치 않고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백낙준, 김재준, 신상호, 엄요섭 같은 중력있는 인물들이 마치 고정 필자처럼 장준하의 사상계의 내용들을 채워갔다.

게다가 시중 서점에 배포된 사상계의 판매부수가 장준하를 기쁘게 했다. 예상 외의 판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선금을 내며 선주문하는 서점도 적지 않았다. 3천부를 찍었던 창간호가 제2호를 찍을 때는 5,000부로 늘어난 것이다.

이곳이 바로 피난지 부산이었음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다. 예기치 못했던 난관들이 없지 않았지만 사상계의 장준하, 장준하의 사상계는 지치지 않고 민(民)의 소리, 야(野)의 소리, 역사의 소리를 대변해 갔다.

1953년 11월호까지 8호를 발행한 사상계는 같은 해 11월 20일 정부의 환도가 이루어지면서 서울에 올라오게 되고, 이 해의 마지막 달 12월호를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은 장준하의 사상계가 한국의 민주사에 한 획을 긋는 해였다.


이승만의 ‘나의 명령’, ‘나의 뜻을 따라’

대통령 이승만의 소위 ‘나의 이 뜻을 따라’, ‘명령’ 운운하는 한글 간소화에 대한 담화문을 계기로 빚어진 정면충돌로 인해서였다. 장준하를 비롯한 모든 사상계의 구성원들에게는 마치 대명거사(大命擧事)의 전야와 같은 시간들이었지만 저들은 그 거룩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1954년 7월 문교부의 ‘한글간소화안’ 발표와 함께 이승만의 담화문이 발표되었다. 담화문의 핵심은, “본래 우리 국문은 배우고 익히기 쉬운 글인데 학자들이 공연히 어렵게 만들어 놓았으니 통탄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 글을 신·구약과 국문서에 쓰던 방식에 따라서만 쓰게 할 것이며, 이를 공포한 후 석달 안에 철주자판(鐵鑄字版)을 만들어 옛글로 쓰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그 담화를 ‘명령’이라 했고, ‘나의 이 뜻을 따라’라 했다. 반역이었다. 그의 담화속에 담긴 그의 반문화(反文化)적 성격, 입장도 사상계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나의 명령’, ‘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은 민주주의를 운명으로 받고온 장준하로서는 견딜 수 없는 수모요,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장준하에게는 나랏일과 자신의 일이 전혀 따로 있지 않았다. 아직 사상계사의 일원으로 진퇴를 함께 할 수 있는 언론투쟁의 동지들이 결속되지 못한 때, 장준하는 약간의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러나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 예와 아니요를 취사선택(取捨選擇) 하는데 있어선 생명을 홍모(鴻毛)처럼 여기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국가의 대통령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뭔가? 국민의 공복(公僕) 아닌가? 복(僕)이라? 심부름꾼이란 말 아닌가? 그런데 공복이어야 할 그가 ‘나의 명령’이라, ‘나의 뜻’이라 운운하며 국부요, 국권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장준하는 다음 달 8월 사상계에 이승만의 담화를 공격하는 글을 쓴다. 권두언을 통해서이다.

“정치가 문화를 지배하려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정치가 문화를 위해 있어야 한다. 만약 국가가 개인의 인격을 지배하고 문화의 진로를 결정하려 하거나, 방해한다면 개인은 국가의 종이 되며, 문화는 그 자율성, 독자성을 잃고 급기야는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다음호(1954. 9)에는 ‘독립투쟁사상에서 본 한글운동의 위치’라는 특집을 꾸렸다. 이 특집이 226면의 9월호의 130면을 점한다. 장준하의 문화·민주신장 운동의 결기(結氣)가 어떤 것이었나를 극명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교부장관 김법린, 편수국장 최현배가 이미 이승만의 정책에 항의해 사표를 던졌고, 각 문화단체, 언론계, 교육계, 학술단체들의 반대의견 성명이 비등했고, 심지어는 문교부에 날라드는 항의 서한들이 그칠줄을 몰랐다. 게다가 사상계는 기발한 편집으로 이승만의 오만한 군림(君臨)행태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심기를 쏟았다.

이승만의 한글정책에 대한 찬반의 논객들을 찾아 장장 6개월여의 논쟁을 이어가게 한 것이다. 정경해, 이숭녕, 허웅 같은 한글학자들이었다. 이렇듯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민중의 항거에 결정적인 계기를 이룬 것은 여야 국회의원들까지도 반대의 전열에 참여함으로써였다.

이승만의 정당인 자유당까지도 의원들의 행동에 결정권을 행사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다음해 1955년 9월 이승만은 한글간소화안의 취소담화를 발표하게 된다.


‘사상계는 장준하의 것이 아니다’


장준하는 한글 옛맞춤법을 한 종교의 교리처럼, 신조처럼 내세우며 ‘나의 명령’, ‘나의 뜻’ 운운하는 독재와의 결전을 수행하면서 어떤 국가 권력에도 맞설 수 있는 한 진영(陳營)을 생각하게 된다. 붓(筆)으로 칼을 꺾을 수 있는 ‘사상인의 진’(思想人의 陳)이었다.

일단 생각이 잡히면 곧 실행에 임하는 것은 장준하의 주위의 장준하를 아는 모든 이들의 부러움이었다. 장준하는 이승만 정권과의 싸움을 싸우면서 실로 값진 깨달음을 얻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사상계를 필봉으로 들고 싸워온 싸움이 장준하 개인으로 싸워온 싸움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장준하의 개인플레이였단 말이다. 그랬다. 사상계는 장준하의 개인 잡지였다. 역사의 진화는 개인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1954년 내내 장준하는 이승만 정권과의 그 큰 싸움에서 이후의 역사는 영웅이, 성웅이 이룰 수 없다는, 깬 가슴의 연대 없이는 민주, 민중, 자유의 역사는 없다는 생각으로 하루해를 시작하고 하루해를 닫았다.

그러면서 장준하는 한 큰 결론에 이른다.

“사상계는 장준하의 것이 아니다!”

이제 사상계는 장준하의 것이 아니다. 사상계가 장준하 개인만의 것이기에는 그 탄력이 위험스러우리만큼 부풀고 있었고, 사(社)의 운영 또한 전문적인 손들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제 사상계는 사상계인(人)의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장준하는 ‘장준하 1인 편집체제’를 1954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끝내기로 결심하고, 그간 사상계의 편집, 필자 발굴에 음양으로 협력해준 지기(知己)들과 1955년부터 편집위원회를 조직, 편집위원회가 주도하는 체제를 결의했다.

이렇게해서 1955년 1월, 편집위원 중심의 사상계가 그 역사적인 새 장을 열었다. 초대주간에는 소설가 김성한(金聲翰)이 취임하고, 편집위원으로는 장준하 자신을 포함, 엄요섭(嚴堯燮), 홍이섭(洪以燮), 정병욱(鄭炳昱), 정태섭(鄭泰燮), 신상초(申相楚), 강봉식(姜鳳植), 안병욱(安秉煜) 등 8인이 위촉되었다.

실로 당당한 필진영(筆陳營)이 구축된 것이다. 기라성(綺羅星)이라 했던가! 정말로 놀라운 필진들이었다. 이 편집진이 출범하면서 또 다른 생각지 않던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 누구 누구하면 다 알만한 지명도 있는 학자들, 언론인들이 사상계의 편집진에의 참여를 자청하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참으로 난처했다.

“이미 8인 조직이 끝났으니 지금은 방법이 없다. 이후 편집위원의 궐석이 발생하면 주간과 의논해 보겠다”며 어렵게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1955년 5월호까지 3,000부를 출판하던 사상계가 6월호는 8,000부를 찍어내는 비약을 한다. 대학제학 중이었던 사원 계창호(桂昌鎬·후에 사상계 편집부장, (주)현 한국특송회장)의 제안으로 〈학생들에게 보내는 특집>이 그 계기가 되었다.

평소의 발행부수 3,000부를 배가해 6,000부를 찍으면서 약간의 부담감을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1주일 사이에 6,000부가 절품되면서 전국 서점들의 열화 같은 증판 요구로 2,000부를 더 찍어 간신히 시장의 요구를 잠재워야 했다. 그리고 바로 이달에 자청함에 의해서가 아닌, 장준하가 삼고초려로 그의 광복군 시절의 생명전우로 이미 고려대의 교수가 되어 있는 김준엽과 그의 친구 한교석(韓喬石)이 편집위원에 합류했다.

이미 알려져 있는 김준엽은 장준하와 ‘하늘이 시샘할 만큼’의 아름다운 교분을 지니고 있었다. 김준엽은 박정희 정권 말엽, 그리고 김대중 정권에서까지 두 차례에 걸쳐 국무총리 취임의 강청(强請)을 받았다.

김준엽은 ‘못한다’ 했다. 김준엽은 자신이 도대체 장관이요, 총리요, 할 수 없는 이유로 두 가지를 단언했다.

첫째는, “나는 광복군 투쟁을 시작하면서부터 내 평생에 관리(官理)는 안하기로 하늘에 약속을 했다”는 것, 둘째는, “그래도 내가 장준하 친군데, 사상계 편집위원을 한 사람인데 내가 관리 노릇을 한다면 역사 앞에서 어떻게 내 친구 장준하를 만날수 있겠는가? 죽어도 관리는 못한다. 안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1955년 이후 사상계는 한국의 현대사에 소위 역사의 부름을 들을 줄 아는 대단한 인물, 인재들을 찾아내는 놀라운 역할을 감당해 낸다. 대한민국의 인재들을 다 훑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사상계의 편집위원 중 네 사람의 국무총리(김상협, 현승종, 강영훈, 유창순)가 나오고, 한 사람은 ‘돼 달라’, ‘돼 달라’ 해도 ‘못한다’, ‘안 한다’로 퇴자놓는 정도였고, 총리경력과 겹치기도 하지만 대학총장이 5인에 장관들은 부지기수였으니….

8월호에는 〈사상계 헌장>이 발표되고, 12월 송년호는 드디어 1만부를 찍고도 책이 모자라 3,000부를 재판했다. 사상계 시대 만부를 드디어 돌파한 장준하 사장, 편집위원들 모든 사원들이 12월 30일, 생전에 없던 양주파티를 열었다. 지금의 KAL빌딩, 옛날의 국제호텔 그 지하의 ‘정글바’였다. 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김준엽, 안병욱, 김성한을 상임편집위원을 세운 것이다.

“이젠 된 것 같다. 이쯤 됐으면 부족할 것은 없는데…”.

장준하는 혼자서 다짐했다.

“이제 내게 주어진 일을 잘 처리해 나간다면 사상계가 우리 사회에서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공기(公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56년 함석헌의 사상계 등장이 이루어진다. 1956년 1월호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통해서였다. 제3의 사상계사(思想界史)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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