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기독교는 600여 년 세월 동안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단일 입장을 세우지 못했다. 알로펜은 15살 나이에 부모에게 쫓겨나서 40여 년 가까이 세상을 떠돌면서 예수를 바르게 배우겠다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 이제는 생각을 정리하고, 또 한 번의 결단을 내려야 할 때로구나.

알로펜은 다마스커스 외할아버지인 야고보 장로님 집에서 만났던 낙타몰이꾼 무함마드를 떠올려 보았다. 예수님에 대한 아라비아인다운 열정을 보여주었던 그였다. 그 사막의 아들답게 돌발적인 열정 같은 것이라고 할까.

알로펜의 동갑내기인 무함마드는 그때 예수가 누굴까? 신인가 인간인가? 신이라면 삼위일체 신이라는 말이 그럴듯하지만 만약 그가 인간일 뿐이라면 삼위일체가 아니라 신이 셋인 ‘삼위일체’라며 혼자서 중얼거리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 그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주교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

쿰바홀과 함께 제자들이 모인 큰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교님, 환영합니다. 가르침을 잘 받겠습니다.”

“허허, 이 사람들이 나를 처음 보나….”

알로펜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강당 가득 모인 청년들을 바라보았다. 마음 든든했다. 그래, 내가 너희를 가르치리라. 열심히 가르치리라.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쉽지 않은 말을 하게 되었소. 삼위일체인데 하나님의 인간 구원 역사 과정을 표현하는 비밀 같은 이야기라, 아마 여러분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으나 그 내용 설명은 쉽지 않으리라 봅니다. 먼저 삼위일체를 말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과정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을 때는 쉽게 해석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으나 그분은 곧 하나님이신 이가 누구신지 알죠?”

“네.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처럼 살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잘 훈련된 제자들이었다. 저들 20여 명이 외치는 말이 마치 한 사람의 표현처럼 투명하게 드러났다.

“그래요. 여러분의 그 고백은 천금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 말은 그렇게 쉽게 수십명이 합창하여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도 중차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바울 선생을 아시죠?”

“네, 기독교 제일의 사도시죠.”

“그래요. 제일의 사도라는 단정적 표현은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가 어디 제일이 있고, 제이, 제삼이 있겠습니까. 제일이라는 말은 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말이죠.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를 만나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길을 명령받았으나 선교사로 나서지 못하고 무려 10여 년간 그의 고향 다소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

“궁금하죠?”

“네, 주교님!”

“그래요. 그는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으나 선교자의 길을 쉽게 나설 수 없었어요.”

“왜, 그랬습니까?”

쿰바홀이 물었다.

“네, 그때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인지, 사람인지, 하나님이며 사람인지에 대한 자기 신학 정리를 못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자기는 정리를 못했지만 주 예수의 명령이 있었으니 이미 그가 일단 떠나면 예수가 누구신지에 대한 답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안토니의 질문이다.

“안토니여! 그 말도 맞아요. 주님이 명하셨으니 그 명령(사명)을 받은 자가 지금 이 순간은 모르지만 그가 전도자의 길에 나서면 예수의 신적인 권능이 나타나서 그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해주실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경우 죽느냐 사느냐의 상황에서일 듯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는 먼저 확인이 필요하죠.

왜냐하면 바울의 경우,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공생애 기간 예루살렘에 거주했고, 또 그의 신분이 유대 바리새파 율법사의 신분이었어요. 그때 그는 예수의 존재를 철저하게 나사렛 촌놈, 자기의 신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유대인 열심파 촌뜨기, 곧 자칭 선지자라고 떠벌리는 과대망상증 환자정도로 알았겠지. 그런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단 한번도 그런 사실을 믿고자 하지 않았던 바울 앞에 나타난 부활 예수의 명령을 받았으니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바울은 그가 살던 시대 30살이면 중년기의 나이인데, 그는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 10여 년 동안이나 더 준비해야 하는 예비 선교사의 기간을 가져야 했지요.”

“주교님, 말씀을 들으니 달마의 면벽 수도(기도) 9년이라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이해가 되네요. 어설픈 실력으로 서두르지 말고, 자기 완성이 필요함이 틀림없습니다.”
유승의 말에 알로펜은 고개를 크게 끄덕임으로 동의해주었다.

“주교님, 저같은 놈은 아직 멀었군요.”

쿰바홀이 기가 죽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니지, 하나님의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시는데는 모두 일정한 기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당사자들이 어떤 마음 자세를 갖고 임하느냐에 따라 각각 다르죠. 그래요, 각각이예요. 모두 각각 자기의 내면 변화를 주의 깊이 살펴야 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희는 모두 모르겠어요.”

쿰바홀의 친구들이 머리통을 싸쥐고 고통을 호소하였다.

“옳다! 바로 그거다. 바울 선생이 로마서 7장 후반에 가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아우성을 칩니다. 지금 여러분이 바로 그런 증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민 없이 예수 만날 수 없죠. 예수와 나, 두 목숨을 함께 가질 수 없죠. 둘 중에 하나는 버려야 해요.”

“…….”

군중은 말이 없다.

“갈라디아서 2장을 펴보세요. 거기 바울의 깨달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했어요.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고 깊이 묵상하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그가 뛰어들어 동반죽음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 말을 듣는 여러분은 예수께서 앞서 죽으셨는데 뒤늦게 예수의 죽음에 동반할 수 있느냐고 따지지 말고,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의 심중을 헤아려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은 예수와 바울, 둘이서 우리에게 답변해 주실 수 있지요. 단, 여러분이 예수가 바울을 증언하고 바울이 예수와의 생명연대 했음을 고백하는 내용을 오해 없이 들을 수 있으려면 여러분이 먼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알로펜의 말에 회중은 깊이 몰입해 가고 있음이 분명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더 분위기를 살피던 알로펜이 입을 열었다.
“갈라디아서 2장의 바울은 먼저 자기 목숨을 내놓았지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진리와의 만남이 어렵지요. 요한복음 기록자도 바울과 마찬가지의 방법론 제시를 하죠.”

“그게 뭔데요?”

쿰바홀이었다. 쿰바홀은 금번 기회에 예수를 똑바로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알로펜에게 인도한 고창의 청년 20명의 장래 또한 올바른 진리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미 그는 두 아들과 아내, 또 자기 자신은 물론 전 재산을 알로펜의 아시아선교 운동에 다 바치지 않았던가.

“요한복음 3장을 읽으면 밤늦게 예루살렘의 지도자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와서 예수의 활동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평가할 때, 예수는 하늘로서 난 자가 아니고는 그런 일을 모르는 법이라고 그의 말을 뚝 잘라버리지 않던가요. 이는 곧 ‘니고데모여, 당신이 하늘로서 태어난 사람이든지 아니면 당신은 지금 거짓말 하는 것이야’라고 예수께서 니고데모를 몰아붙이신 것이죠. 예수는 인생이 모름지기 하나님의 세계를 알려면 하나님께로서 다시 태어나야 함을 강조하셨죠.”

“그러니까 요한복음을 쓴 사람은 출생 자체를 말하는군요. 바울은 죽었다가 살고, 요한은 출생부터가 하늘이었군요.”

안토니의 해석이었다.

“그래요. 내가 오늘 삼위일체를 말하고자 했으나 아직 우리는 실마리를 열지 못했습니다.”

그때, 무함마드의 제자들이 들어왔다.

“주교님, 우리에게도 가르침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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