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박형국] 셸리 케이건의〈죽음이란 무엇인가〉


21세기 들어 죽음에 대한 부쩍 커진 관심은 인간이 철들고 사회가 성숙해질 수 있다는 표징(sign)일까.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서 죽음을 주제어로 키보드를 두드려보면 죽음에 관한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뜬다.
아마 지난 8년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나라들 가운데 우리나라가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는 슬픈 현실도 이러한 정신의 흐름에 크게 한 몫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죽음을 다룬 그 많은 책들 가운데 단연 특별한 관심을 끈 책은 미국 예일대에서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선정되었다는 케이건 교수(사진)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웅진씽크빅 펴냄)일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밝히려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음은 삶의 상식에 닿아 있다. “삶과 죽음에 관한 사실들을 바라보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인가?”(406쪽)

저자가 지나치리만큼 복잡한 설명과 논증을 곁들여 추구하는 바는 의외로 매우 단순하다. “우리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이 물음이 계속해서 우리의 뇌리에 맴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곧 죽음을 마주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보통 죽음을 어떻게 대할까? 저자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세 가지로 구별한다. 곧 죽음을 ‘부정’하는 태도, ‘무시’하는 태도, 그리고 ‘인정’하는 태도이다.

저자에 의하면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 속의 주인공처럼 죽음이 두려워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살아가는 태도나 죽음을 부정하는 태도는 심정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삶에 대한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적절하지도, 합리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자세이다(403쪽). 당연히 죽음을 대하는 이성적이고 바람직한 태도는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왜 죽음을 인정하는 입장이 타당하다는 것일까? 저자의 대답은 매우 상식적이다. 우리가 죽을 운명이라는 진실에 직면할 때 비로소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의 본질을 ‘인정’하면서 그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죽음이 삶의 끝이고, 또 삶의 끝으로서의 죽음이 소중함을 역설한다.

카프카(Franz Kafka)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표현이 인용된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삶의 끝으로서의 죽음이 있기에 삶이 소중하다는 뜻이다.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내 삶에 끝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인생에 관한 심오하고 근원적인 진리일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406쪽).

저자는 가장 바람직한 삶을 위해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로서의 죽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삶과 죽음의 아름다운 어울림은 삶이 죽음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데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보여주는 자살을 숙고해야 하는 이유도 삶이 죽음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지 못한 채 폭력적인 방식으로 마무리되는데 있는 것이다.

케이건의 주장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극히 상식에 가깝기에, 독자들은 별 어려움 없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저자가 죽음의 본질에 대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철학적 설명과 논증을 제시할 때 독자들의 인내는 테스트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죽음에 대한 현대 물리주의(physicalism) 입장을 철저하게 견지한다.
물리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단지 물질적 존재 혹은 ‘기계’일 따름이기에 물질인 육체의 죽음이 끝이고 육체의 죽음 너머에 어떤 영혼의 삶의 실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주의의 관점에서 영혼의 존재, 죽음 이후의 삶, 부활과 영생과 같은 관점이 잘못이고 오류임을 애써 증명하려고 하는 저자의 입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영혼이나 정신적인 실재의 고유성은 물리주의로 설명하고 논증할 수 없다.

왜 그럴까? 물리주의 반제 역시 우리의 경험의 지평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리주의 입장에서 설명되고 논증되는 영혼의 존재, 죽음 이후의 삶, 부활과 영생 등은 지나치게 환원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리주의는 우리가 생각하고 체험하고 만나는 실재의 다채로운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죽음에 관한 사실 인식을 거부할 때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논증하려는 저자의 시도도 너무 단순한 논리의 비약인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영혼의 존재, 죽음 이후의 삶, 부활과 영생을 인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죽음에 관한 사실 인식을 거부한다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리주의의 관점에서 끝이 없는 삶, 가령 영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는 주장도 영생에 대한 기독교의 독특한 설명과 묘사를 축소하고 환원하는 설명이요 논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신앙과 신뢰의 대상인 영생이 올바로 이해될 때 그것은 죽음을 애써 부인하기 위한 인간의 불멸에 대한 탐욕의 형이상학적 장치이기만 할까? 칸트가 주장하듯이 도덕적 삶을 위한 실천이성의 요청의 대상일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물리주의에 입각해서 죽음에 불확실성이 없기에 두려움은 적절한 감정이 아님을 애써 논증하려는 저자의 접근은 죽음의 실재를 일차원적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죽음을 피안으로의 도피로 여기는 형이상학적 미몽을 계몽하는 일은 소중하다. 그러나 오직 이성과 논리로 풀어낸 죽음에 대한 건조하고 지루한 물리주의적인 설명과 논증은 독자들의 감성에 호소력을 가지기는 힘들 듯하다. 저자의 설명과 논증이 솔직히 가슴에는 잘 와 닿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한 삶을 위해 죽음을 마주해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마땅히 더 많은 독자들의 공명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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