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한국기독교는 ‘한국기독교의 세기적, 세계적 성장’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 대형화(大形化)를 교회성장의 바로미터로 철저히 오해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해 함석헌은 예언적 격탄(激彈)을 마다하지 않는다.
“내부에 생명이 이어 솟는 때에, 종교는 성전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신라 말에 절이 성하여 불교가 망했고, 이조시대 서원을 골짜기마다, 향교를 고을마다 지었는데 유교와 나라가 또 같이 망했다. 우리나라만인가? 애굽도 바빌론도 로마도 그랬다. 그럼 성전이 늘어가면 망할 것이 누군가? 석조교회당이 일어나는 것은 진정한 종교부흥이 아니다. 그 종교는 일부 소수인의 종교지 민중의 종교가 아니다. 지배하자는 종교지 섬기자는 종교가 아니다. 도취하자는 종교지 수도·정진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안락을 구하는 종교지 세계정복을 뜻하는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지나가려는 시대의 보수주의자들이 뻔히 알면서도 아니 그럴수 없어 일시적이나마 안전을 찾아보려는 자기가 기만적인 현상이다. 광야에 나가면 벌판에서, 바닷가에 가면 배 위에서, 밭에 가면 밭고랑에서, 길을 가다가는 우물가에서 예배하는 종교, 목자 없는 양 같이 헤매는 무지한 민중을 찾아 가르치다가 저물면 그대로 보낼 수 없어 많거나 적거나간에 같이 나눠먹고, 밤이면 홀로 산에 올라 별을 바라보며 기도·예배하는 종교, 그러한 예수의 종교, 성당 없는 종교, 종교 아닌 종교는 지금 이 나라에 있나, 없나?”
함석헌의 이 글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두고 장준하의 전기작가 박경수는 그의 장준하 평전에 “1956년은 장준하가 또 하나의 ‘귀인’ 함석헌(咸錫憲)을 만난 해이다”라고 쓰고 있는데, 그것은 한국정신사에 있어서나 민중사, 종교사에 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직접적으로는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첫 글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한국의 지식계층 뿐만 아니라 서민계층, 바닥계층을 가리지 않고 통째로 뒤흔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함석헌의 말(글)은 참으로 기이했다. 글이란 독자의 계층을 갖기 마련이다. 모든 독자들은 자신이 읽을 거리를 찾는다. 그 읽을거리가 식자층(識者層)에 따라 달라지고, 그래서 독자층이 형성되는 것인데, 함석헌의 글은 예외였다. 학자들, 노동자들, 늙은이들, 젊은이들, 유무식의 계층을 넘어, 세대를 넘어 사상계를 찾았다. 함석헌의 글을 찾은 것이다.
1956년 1월호의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도화선이 되어 1957년 7월까지 계속된 가톨릭의 저명한 논객 윤형중 신부와의 대논쟁의 전문보도는 1956년 1월 15,000부의 사상계를 물경 40,000부를 발행하는 세계적인 월간잡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이후부터 사상계와 함석헌과 장준하, 장준하와 함석헌은 정말 한몸인 듯 했다.
후에 사상계의 편집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작가 이호철(李浩哲)은 함석헌을 일러, “그 분 한분을 내기 위해 사상계는 있었다”고 설파했다(現代史의 證言 5 평화주의자 咸錫憲 p.122).
‘할 말이 있다’
함석헌과 윤형중의 논쟁은 이랬다. 함석헌이 쓴 그 글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격문이 나왔다. 또 다른 월간 신세계(新世界)를 통해서였다(1956. 9). 그러나 함석헌에 대한 윤형중 신부의 반격문은 글자 그대로 반격문으로 그치고 말았다.
잡지 자체도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필자 또한 가톨릭 내에서와는 달리 시민세계에서는 무명의 인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함석헌에 대한 윤형중 신부의 반박문은 함석헌의 격렬한 사회비판에 대한 것으로, “함 선생은 일부 기독교의 비행이나 경거망동을 기독교 전체에 뒤집어 씌우면서, ‘지금 우리나라에서 정당한 사업은 될 수 없다. 이 사회의 정치, 경제의 조직이 힘 없는 자의 소득을 부정하게 빼앗아서 상급계급에 주도록 되어 있고, 사회를 자세히 관찰한다면 거의 죄악적인 제도가 합법적이라는 가장(假裝)구조를 가지고 되어 가며, 미국의 원조도 미국의 자본주의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 박탈자와의 사이에 서있어 그 울타리, 혹은 충돌을 피하는 스프링 노릇을 하는 것이다.
정당한 보수하에 신부, 목사노릇을 한다하겠지만 그 정당은 누구 정당인가? 하나님의 정당인가? 자본주의의 정당인가? 등 독설을 퍼부었다. 함 선생이 시시비비로 비판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고 침소봉대(針小棒大)로 나가면서 일부의 것을 전부의 것으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함석헌은 다음해 1957년, 사상계 3월호에 ‘할 말이 있다’를 쓸 때까지도 신세계에 발표된 윤형중의 반격문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반격문 자체를 읽어보지 못한 상태였고 또 별관심을 갖지도 않은 터였다. 사상계 3월호의 ‘할 말이 있다’가 신세계에 발표한 윤형중의 반박문에 대한 반박문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할 말이 있다’는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전반의 극심한 타락에 대한 비판으로 그 격렬함은 실로 극에 달했다 할 것이었다. 특히 정치, 종교에 대한 비판이 더했고, 우선 이 망해가는 나라의 현상을 개조해가는데 제1차적인 과제로 민중이 말을 하게 해야, 곧 언론의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도 아니요, …도 아니다
“‘할 말이 있다’ 하는 나보고 ‘네가 누구냐?’ 하는가? 내가 누구임을 말하리라. 나는 세례요한도 아니요, 남강(이승훈·함석헌은 자신의 평생의 스승으로 남강, 다석 유영모, 내촌감삼 3인을 든다-필자주)도 아니지만 나는 또 이 나라의 대통령도 아니다. 천지가 무너지면 무너졌지 내가 대통령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천지가 무너지면 무너졌지 아무리 준다 해도 내가 하지도 않을 것이다. 대통령은 그만두고 부통령만 돼도 백주에 경찰이 죽이려 드는데 그것을 한단 말인가?
나는 대통령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 꿈을 꾼들 될 번 택도 아니다. 나는 무슨 높은 벼슬아치도 아니다. 지금 벼슬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받는 것은 없이 그저 나라 위해 희생한다는데, 나는 그런 덕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그들같이 허공에서 옷·밥·자동차를 불러내어 잘 먹고, 잘 입고, 잘 달리고 노는 요술 할 줄 모르니 할 수 없다. 나더러 하라면, 받는 봉급이 없다면 이슬 먹고 사는 매미가 아닌 이상은 절도, 강도, 살인, 강간이나 사기·횡령·공갈·협박을 하지 않고는 그렇게 사는 재주는 없을 것이다. 그럴 마음 없으니 그것은 못하는 것이다. 또 그런 것들에 굽실거려 국물 얻어 먹으면 나도 마찬가지일 터이니 나는 벼슬아치 압잡이는 못한다.
나는 또 무슨 종교의 거룩한 직원도 아니다. 중도, 목사도, 감독도, 신부도 아니다. 모가지를 열네 번 잘렸으면 잘렸지 신부·목사는 안될 것이다. 되면 무엇보다도 백주에 아무것도 없는 껌껌한 방구석에 불을 켜놓고 거기 절해야 하겠으니 그런 얼빠진 짓이 어디 있으며, 낮도깨비의 발에 입맞추어야 하고, 또 나도 똑같은 인간이면서 하나님이나 되는 척 하고, 선남선녀들 보고 절을 하라 해야 할 터이니 그건 못한다.
속엔 양갈보의 치마보다도 더 얼룩얼룩한 세상을 그리면서 겉으로는 아니 그런체 검은 예복을 입고 서야겠으니 그나마도 제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요, 블란서·미국·영국서 빌려온 물건,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의 피를 빨고 장사라는 이름으로 도둑질하는 손으로 된 것이니 그건 못한다.
철 없는 여인들 손에서 가락지를 뽑을 뿐만 아니라 맘까지 뽑아야지. 있지도 않은 천당·지옥 가보기나 한듯이 있다면서 영혼 건져주마 하는 대신 이 세상에서는 개, 돼지 같은 살림에도 만족하고, 정신적으로 거세를 하여 이리 같은 압박자들이 맘 놓고 해먹도록 해주는 대신 신교의 자유(信敎自由·신앙의 자유는 사실 하나님이 양심 위에 주는 수밖에 없는 것인데) 얻어가지고 실속으로는 제가 세상에서 향락의 보장을 얻어야 하겠으니, 나는 천당·지옥은 아니 믿어도 내 양심에 내리는 하나님의 명령이 무서워 그런 짓은 못한다. 만일 지옥이 있다면 이 담에 차라리 지옥 가는 게 낫지, 나는 이 세상에서 나와 같은 민중을 속이고 업신여기고, 팔아먹을 수는 없다”.
나는 그저 사람, 풀, 민초, 민중…
함석헌은 자신은 교육자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요, 학자도 아니라 했다. ‘아무것도 못되는 사람’, 그저 사람일 뿐이라 했다. “그저 사람이다. 민중이다. 민은 민초라니, 풀 같은 것이다. 나는 풀이다. 들에 가도 있는 풀, 산에 가도 있는 풀, 동양에도 있는 풀, 서양에도 있는 풀, 옛날도 그 풀, 지금도 그 풀, 이 담에도 영원히 그 풀일 풀, 어디서나 언제나 다름없는 한 빛갈인 푸른 풀, 나는 사람 중의 풀이지 아람드리나무도, 나는 새도, 달리는 짐승도, 버러지도, 고기도 아니다.
내가 썩어 그 나무가 있고, 내가 먹혀 그 노래, 그 깃, 그 날뜀이 있건만 언제 그렇다는 소리 한마디도 하지 않더라. 그래도 또 먹히고, 또 썩는 나지만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흙을 먹고 살아 남의 밥이 될지언정 누구를 내 밥으로 하지는 않는다. 모든 생명의 밑에 깔렸건만 또 아무리 잘나고 아름답고 날고 긴다 하던 놈도 내 거름으로 돌아오지 않는 놈이 없다. 태평양 저 편 대평원(大平原) 풀나라에는 정말 피플, 풀 사람이 나와서 ‘풀잎’ 노래를 읊었건만 이 땅에서는 언제 풀 노래가 울려 퍼질까?”
풀 사람, 함석헌! 함석헌의 풀 노래, 민중 노래, 씨알 노래는 계속된다.
“밟아도 밟아도 사는 풀, 베어도 베어도 돋아나는 풀, 너는 무한의 노래 아니냐? 다 죽었다가도 봄만 오면 또 나는 풀, 심은 이 없이 나는 풀, 너는 조물주의 명함 아니냐? 푸른 너를 먹고 소는 흰 젖을 내고, 사람은 붉은 피가 뛰고, 소리도 없는 너를 먹고 꾀꼬리는 노래하고, 사자는 부르짖고, 썩어진 물에서나 마른 모래밭에서나 다름없는 향기를 뿜어내는 너, 너는 곳 신비 아니냐? 풀, 네 이름을 누가 다 알 수 있느냐? 네 수(數)를 누가 셀 수 있느냐? 빽빽이 서도 다투는 법이 없고, 드물게 서도 홀로 차지하는 법이 없고, 나무는 조금만 자라도 그 밑에 누가 살 수 없고, 벌레새끼도 나면서부터 서로 떠미는데 너는 그런 법이 없지. 함께 나서 함께 자라 함께 썩어 함께 부활하는 너 풀, 너는 평화의 왕관 하나님 뭇 아들들의 돗자리. 겸손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는 말 너를 두고 한 말 아니냐?
너를 참말 아신 분은 너를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하다했고, 하나님이 너를 기르신다 했건만 그 너를 아는 자가 없구나. 그러나 누런 금, 붉은 구슬, 가지각색의 만물이 다 없어져도 아래서 연푸른 평화의 너와 위에서 검푸른 거룩의 하늘은 저 하늘에 가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풀이다. 풀 사람이다. 민중이다.”
가톨릭의 출판부장 윤형중 신부가 함석헌의 ‘할 말 이 있다’를 반박하게 된 것은 함석헌이 그 글에서 “나는… 모가지를 열네 번 잘리면 잘렸지 신부 목사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라는 논(論)하에 가차없이 질타한 종교적 위선, 특히 가톨릭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는데,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에 이어 윤형중의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 다시 함석헌의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또다시 ‘함석헌 씨의 답변에 답변한다’로 이어진 1년반 어간의 논쟁은 누구의 승패였나를 떠나 ‘생각’을 찾는 민중의 가슴 속에 함석헌이라는 세 글자가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확실하게 각인되게 했다.
이때의 사실을 당시 사상계의 편집 실무자였던 작가 박경수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러던 차… 1957년의 사상계 3월호에는 함석헌의 유명한 글 ‘할 말이 있다’가 발표되었다. 이 글은 한마디로 사상계를 지금의 시각에서 한단계 높이 보이게 만들었다 할 수 있고, 함석헌이라는 인물을 세상에서 모두 놀라운 눈으로 보게 만든 것이기도 했다”(평전 재야의 빛 장준하 p. 292쪽).
/ 생명교회 원로 목사,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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