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의 은혜란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 이 은혜는 아브라함에게서 구체화되는데, 하나님이 인류의 원죄를 고뇌하신 끝에 결단을 내리신 시간이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단에서 출발한다. 아브라함은 100살에 낳은 이삭을 제물로 선택키로 하여 이삭을 바친 그 제단에서 ‘속죄양’시대를 연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때부터 속죄제사를 준비했다. 야곱이 이스라엘 되기까지, 그가 또 속죄와 용서를 깨닫기까지 이스라엘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야곱이 이스라엘 되기까지 얍복강의 밤 절박한 기도가 있었고, 그는 드디어 이스라엘로 변신한다. 이스라엘은 절기마다 죄 있는 사람을 대신하여 속죄양을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에 대한 예를 다 하더니 드디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4) 하여 인간 구원의 구체적인 말씀으로 나타났다.

임마누엘 되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말씀의 시간 메시아는 우리 인간 곁에 와 계셨다. 그분이 메시아이신 나사렛 예수시다. 예수의 시간 속에서 예수의 골고다에 동행한 모든 인류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갖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다. 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을 갖는다. 하나님이 사람 되어 사람과 함께, 사람의 모습으로 사시는 삶의 시작이 여기서 부터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다. 여기에 인간의 한량 없는 겸손이 있는 것이다. 이 겸손은 이웃이나 타인들을 어여삐 보며 함께 하고, 나누고, 돕는 일로 자기 발전을 이루어 간다.

어떤 경우에도 다투거나 싸우지 않는다. 탐내지도 않는다. 물론 속이지도 않는다. 함께 있어서 든든하고 힘이 되는 이웃으로 날마다 아름다운 인간의 꿈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평화요 축복이라고도 한다. 이 아름다운 모습들은 그리움을 동반한다. 그래서 더 말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 때문에 이사야는 이 글로 하나님의 속깊은 마음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위의 말씀은 언제 읽어도 인간의 삶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구나, 이사야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이렇게 그렸구나. 그의 조형미 넘치는 언어예술을 여기에서 본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이데올로기에 묶으려 한다. 또 하나의 종교로 위치하게 하려 한다. 특히 자유나 인본적 신학, 다른 말로하면 헬레니즘의 한계에 묶인 사람들이 예수의 십자가 대속이나 바울 선생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대속의 말씀을 싫어하면서 독설을 내뱉는다. ‘바울이 기독교를 망쳤다!’고 하면서 말이다.

바울은 인간이 바라볼 수 있는 최선의 가치로 대속신앙을 제시했다. 그리고, 대속(代贖) 그 너머에 창조(創造)의 본체 세계가 있음을 우리에게 증거했다.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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