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생각하는 사람 계창호(桂昌鎬)

1958년 8월, 사상계는 함석헌의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발표했다.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명격문(名激文)이 사상계를 통해 발표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서 계창호(桂昌鎬)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함석헌의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그 제목을 붙인 이가 바로 계창호였기 때문이다. 계창호는 사상계의 번영에 가히 공신의역을 해냈다 할만한 이었다. 해방 이듬 해, 열살 안팎의 계창호는 북한의 지주숙청에 앞서 네 명의 어린 형제들과 함께 부모의 손에 이끌려 월남하여 덕수국민학교, 서울중고등학교, 서울문리대를 졸업한 수재였다.

계창호가 장준하의 사상계에 몸을 담게 된 것은 1961년 11월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 장군이 그의 대통령 선거에서의 공약대로 한국 전선을 직접 시찰키 위해 방한하게 되는데, 12월 10일 임시수도 부산의 충무로 광장에서 대규모 시민환영대회를 열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서울고등학교 학도호국단장이던 계창호는 전국 고등학교 학생대표로 환영사를 낭독하게 되어 있어, 이 환영사를 계기로 장준하를 만나게 된다. 이 환영사는 낭독하는 당사자가 작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고교생인 계창호로서는 큰 걱정이 없을 수 없었다. 이때 장준하의 동생 장창하가 같은 반의 친구로 계창호 곁에 있었다. 창하는 그의 친구 창호를 형 장준하게 소개했고, 장준하는 계창호의 환영사를 잘 손질해주었다. 이렇게해서 장준하와 호형호제 하게된 계창호는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사상계사의 잔무를 거들게 되었고, 2학년이 되면서는 아예 장준하의 집으로 이사하여 한집 식구가 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었을 때 모습의 함석헌(1958년 8월).

그가 장준하 밑에서 대학을 마치게 되는 것이 1958년이었다. 이 해, 사상계 8월호에 함석헌의 그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발표되는데, 이 원고를 함석헌 손에서 받아온 이가 바로 계창호였다. 원고마감일이 3일이나 지났는데도 함석헌의 원고가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다. 계창호는 본사의 찦차를 몰아 함석헌을 찾아갔다.

“선생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이번호 잡지가 선생님 글을 중심으로 편집되고 있는데, 선생님 글만 아직 못받고 있습니다.”

정말 계창호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함석헌은 빙긋이 웃으며 한뭉치 원고를 계창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원고는 아직 주제가 없다고 했다.

“그저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라고만 했는데 가서 읽어보고 좋은 제목이 생각나거든 내 쓰도록 하지’ 했다.

계창호는 정말 큰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감사합니다’를 수도없이 연발했다. 계창호는 돌아오는 동안 찦차 안에서 함석헌의 원고를 읽었다. 가장 많이 쓰인 말이 ‘생각하는’이라는 말이었다. 계창호는 차 안에서 만년필을 뽑아 함석헌의 글머리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고 썼다.

이렇게해서 1958년 8월호 사상계가 시중 서점에 반포되었다. 경천동지(驚天動地)라 했던가? 1958년 8월호 사상계가 시중에 팔려나가면서 이승만을 중심한 집권부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세상에 이럴수가!”, “세상에 어떻게 이런 놈이!”….

함석헌은 무사할 수 없었다. ‘거저둬서는 안되는 놈’이었다. 함석헌을 끓고 간 것은 서울시경 사찰과 형사들이었지만 실제로 함석헌의 수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은 저 악명 높은 반공검사 오제도(吳制度)와 그를 호위하고 있는 20여 명의 소위 사찰특수검사들이었다. 사상계가 시중 서점에 배포되고 일주일쯤 후 8월 6일 서울시경 사찰과 소속의 거구의 형사 3명이 함석헌을 연행, 시경 유치장에 수감했다. 소위 국가보안법위반이었다.

“대한민국을 북한 괴뢰집단과 동칭으로 꼭두각시라 하여 국체(國體)를 부인 사회의 사상질서를 문란케 했다”는 것이 그 혐의내용이었다.

처음 사상계 편집진은 전후 자유당 치하의 민권의 횡포, 탄압에 의한 민권의 유린이 극심해지는 것을 보면서 ‘인권·민권의 신장’을 주제로 하는 내용의 글을 요청했던 것인데, 함석헌은 편집진의 요청과는 전혀 다른 근대 세계사에서 ‘한국전쟁’이라 일컬어지는 6·25를 주제로 ‘그 의미와 역사적 교훈’을 내놓았던 것이다.

함석헌의 그 글

함석헌은 ‘모든 일에는 뜻이 있다’고 말하면서, “사람의 삶이란 어떤 일의 치룸(經驗)인데, 일을 치루고 나면 그 뜻을 알게 된다…. 그 뜻 깨달으면 얼(靈), 못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루고도 그 뜻 모르면 개요, 돼지다. 영원히 멍에를 메고 멧돌질 하는 당나귀다” 했다.

현실이 맨손이어도 그 뜻 찾아지니면 존재(存在)이고, 뜻 지니지 못하면 없는 것(無)이라 했다. 함석헌은 격앙의 목소리로 부르짖는다. 뜻을 찾으라! 6·25의 역사적 교훈을 들으라! 함석헌은 6·25 전쟁을 두 가지 측면에서 고발한다. 역사적 측면과 종교·정신적 측면에서다.

그 역사적 측면에서 “6·25 싸움의 직접 원인은 38선을 그어놓은데 있다. 둘째번 세계 대전을 마치려하면서 ‘로키산의 독수리’(미국 : 필자주)와 ‘북방양의 곰’(쏘련 : 필자주) 이 그 미끼를 나누려 할 때 서로 물고 당기다가 할 수 없이 찢어진 금이 이 파괴한 염소 같은 우리나라의 허리동강이인 38선이다. 피가 하나요, 조상이 하나요, 말이 하나요, 풍속·도덕이 하나요, 이 날껏 역사가 하나요, 이 해 운명이 하나인 우리로서는 갈라질 아무런 터무니도 없다. 이 싸움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않다.”

그러면서 함석헌은 소위 해방(?)과 더불어 미쏘 양 거대 세력에 의해 빚어진 한반도의 분단에 울분을 토한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됐다하나 해방은 무슨 해방,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이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해 진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 셋이다. 일본시대는 종살이라도 부모형제가 한 집에 살 수 있었고, 동포가 서로 교통할 수는 있지 않았나? 지금은 그것도 못해 부모처자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미쏘가 절대주역으로 치뤄낸 대전과 그들의 승전(?)으로 인해 이뤄진 한반도의 소위 그 해방에 대한 함석헌의 여기까지의 평론만으로도 그의 투옥은 불문가지의 사실이었다. 헌데 그의 글은 더욱 결사적인 절규가 되어간다.

“남한은 북한을 쏘련, 중국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 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 놀음이었다.”

이제 함석헌의 글소리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제까지 미쏘가 주축이 되어 벌려온 전쟁, 한반도의 해방, 6·25의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설파해온 함석헌은 이제 반전, 평화주의자의 그의 실면모를 드러낸다.

이편도, 저편도, 내편도, 네편도 어떤 경우도 ‘전쟁은 범죄행위’라는 증언에서 그랬다. 그 함석헌의 전쟁에 대한 증언은 한국의 경우만을 논한 것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가 알았거나 몰랐거나 일종의 메시아니즘을 보이고 있다. 전쟁을, 전쟁 자체를 정죄(定罪)한 것이다.

“전쟁이 지나간 후 서로 이겼노라 했다. 형제싸움에 서로 이겼노라니 정말은 진 것 아닌가?” 어찌 승전축하를 할 수 있을까? 슬피 울어도 부족할 일인데, 어느 군인도, 어느 장교도 주는 훈장 자랑으로 달고 다녔지 형제를 죽이고 훈장이 무슨 훈장이냐? 하고 떼어던진 것을 보지 못했다. …한번 내리밀리고, 한 번 올려 밀고, 그리고 38선에 엉거주춤 전쟁도 아니요 평화도 아니요, 그 뜻은 무엇인가? 힘은 비슷비슷한 힘, 힘으로는 될 문제 아니란 말 아닌가? 이 군대 소용없단 말 아닌가?

남쪽 동포도 북쪽 동포도 동포라고는 하면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고, 형이 동생에게 총을 내미는 이 싸움인줄은 천만인 다 알면서도 쳐들어온다니 정말 대적으로 알고 같이 총칼을 들었지 어느 한 사람도 팔을 벌리고 ‘들어오너라. 너를 대항해 죽이기 보다는 나는 차라리 네 칼에 죽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땅이 소원이면 가져라… 정권이 쥐고싶어 그런다면 그대로 하려므나. 내가 그것을 너하고야 바꾸겠느냐? 참과야 바꾸겠느냐? 한 사람은 없었다.”

함석헌의 증언은 이제 종교계 쪽으로 옮아간다. 국가거나 사회거나 인간의, 인류의 살림이 참 방향을 잃을 때 그 길을 다잡아주는 것이 종교였기 때문이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 이후 함석헌의 필명(筆名)은 누구에 의해서였는지 ‘종교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아무런 직명(職名)이 없든 그는 ‘함석헌 옹’으로 불려지기 시작하여 그의 별칭이 되었는데, 그의 필명을 ‘종교인’이라 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그가 걸어낸 그의 삶의 역사(其一生)였으리라. ‘새종교’란 그가 그의 인생을 걸고 찾아 싸워온 삶의 명제(命題)였으니 말이다.

“전쟁 중에 가장 보기 싫은 것은 종교단체들이었다. 피난을 가면 제 교도들만 가려하고, 구호물자 나오면 서로 싸우고 썩 잘 쓴다는 것이 그것을 미끼로 교세를 늘릴려고 하고, 그리고는 정부, 군대의 하는 일, 그저 ‘잘한다 잘한다’ 하고 날씨라도 맑아 인민군 폭격이라도 좀 더 잘되기를 바라는 정도였다. 대적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 정치하는 자들을 책망하는 정말 의(義)의 빛을 보여주고, 그래서 핍박당하는 것을 나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함석헌의 해방→분단→6·25전쟁의 분석에 있어 ‘안으로의 이유’가 있다. 일명 ‘통치자라는 것들’의 압박과 착취, 그러므로 자라지 못한 민중, 민주의 시대에 민중의 있어야 하는데 민중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역사의 주인이다’라는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이 없었다는 것이다.

“19세기에 들면서 남들은 다 근대식의 민주국가를 완성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못했다. 왜 못했나? 동해바다 섬 속에 있어 문화로는 우리에게조차 업신여김을 받던 일본도 그것을 하고, 도리어 우리를 압박하는데 툭하면 예의의 나라라 ‘작은 중화’라 자존심을 뽐내던 우리는 왜 못했나? 원인은 여러말 할 것 없이 서민, 곧 이 백성이란 것이, 이 씨알이 힘 있게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백성을 짜먹으려 만드는 지배계급, 따라서 역사의 주체의식을 가진 민중이(있을 수 : 필자주) 없었다는 것, 그것이 비극의 이유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 철학의 핵심이 되는 씨알은 스스로 하는 삶, 스스로 하는 정신의 실체어야 했다.

“우리나라의 백가지 폐가 가난에 있다 하지만 가난중에도 심한 가난은 ‘생각의 가난’이다. 스스로함, 자주함, 역사의 주체로서의 나를 믿는 씨알 없이는 6·25는 한번만 있을 것이 아니라 했다. 그러면서 함석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에서, 분단에서, 전쟁에서, ‘완전히 낙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실패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에게 위대한 과제가 주어졌다”고 말한다.

분단의 재앙 속에서 얻은 위대한 과제

“국민은 완전히 낙제를 했다. 그러나 우리의 낙제에도 불구하고 잊어서는 안되는 커다란 일이 들어난 것이다. 그것은 6·25의 싸움에 온 세계가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역사를 위해 크게 뜻이 있는 일이다. 역사상 일찌기 이런 일이 없었다. 어느 한 나라의 문제로 인해 세계 모든 나라가 단체적으로 간섭을 하여 군대를 파견한 일이 없었다.

우리는 유엔이 장차 온 역사를 위해 아주 완전한 것으로는 보지 않으나 유엔이 미래의 세계를 낳는 산파역을 할 것을 믿는데, 처음 일어서는 이 자신은 6·25에서 얻었다. 6·25의 중심되는 뜻은 하나되는 세계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라는데 있다.”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탈고한 후 자신도 “이상스러우리만큼 전신을 후루루 떨었다”고 했다. 다시 있게될 투옥의 예감이었을까?

글이 발표되고,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함석헌은 다시 끌려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일곱번째 투옥이었다.

문대골 / 생명교회 원로 목사,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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