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46)

   
산상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한 깊은 명상과 평화를 기원하시는 함석헌 선생.

고난(苦難)의 역사, 고난의 사람

1958년 사상계 8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연행, 구속된 함석헌은 20일 간의 수감끝에 풀려나오게 되는데, 함석헌은 이때 자신의 존재와 한국의 운명을 둘이 아닌 하나로 깊이 인식하게 된다. 이전 북에 있을 때나 자유의 땅이라고 믿었던 남으로 내려온 이후거나 자신과 한국을 언뜻언뜻 하나로 느끼곤 하는 때가 없지 않았으나 금번 필화를 입은 사건 이후엔 더욱 그랬다.

함석헌이 자신의 일생과 한국의 역사를 동일시하게 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고난(苦難)’이라는 주제에 의해서였다. 그는 일찌기 한국사의 기조(基調)를 ‘고난’으로, 그래서 한국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정의했다.

“까닭을 물으면 나도 그 까닭을 모르고 그저 마음의 수평선 위에 그렇게 떠올랐다고 할 것밖에 없다. 말하라 명을 받은 줄 믿으면서 내놓아 이렇게 단언한다. 한국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다. 고난의 역사! 한국 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역사의 가락은 고난이다. 이 땅도, 이 사람도, 큰일도 작은 일도, 정치도, 종교도, 예술도, 사상도, 무엇도 다 고난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는 가운데서 진리를 보여주었다. 나를 건진 것은 믿음이었다. 그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시면류관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역사를 뒤집고 그 뒷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계 역사 전체가, 인류의 가는 길, 그 근본이 본래 고난이라 깨달았을 때 여태껏 학대받은 계집종으로만 알았던 그가 그야말로 가시면류관의 여왕(세계의 그리스도 : 필자주)임을 알았다”(전집1, 고난의 역사, p.71~73 참조).

함석헌은 이렇듯 한국사의 기조를 고난(苦難)으로 본 것이다. 그 자신도 ‘한국 역사의 기조는 고난’이라 선언하면서 ‘전인미답(前人未踏)’이라는 표현을 한 사실이 있었지만 그것은 실로 위대(偉大)한 사관(史觀)이었다. 그가 김교신의 ‘성서조선(聖書朝鮮)’지에 한국역사(本名은 朝鮮史)의 기조를 고난의 역사로 선언한 것이 1935년인데(함석헌은 김교신이 주관하는 ‘성서조선독자동계수련회’에서 1933년 12월 31일에 시작, 1934년 1월 3일 오후 2시에 끝난 성서적 입장에서 본 朝鮮歷史의 강의내용을 다음 달 2월부터 다음해 1935년 5월까지 22회에 연재 발표했다. 필자주) 놀랍게도 그 함석헌의 ‘한국역사’는 지금도 전국 경향각지의 서점가에서 끊임없이 팔려나가는 이제는 한 고전이 되고 있다.

함석헌은 그의 ‘한국역사’에서 하나님이 고난으로 한국역사의 기조를 삼았다면서 그것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세계의 죄를 담당케 하려는 것이었다고 선언한다. 이제까지 인류사 속에서 범해온 세계의 모든 죄를 씻어내기 위해, 고난의 연옥(燃獄) 길을 걷게 하셨다는 것이다.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이 땅에 들어오면 예외없이 반민중(反民衆)의 악폐만 남겼다면서 이같은 세계의 악을 씻어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계의 하수구로 선택하신 것이라면서 우리가 이 고난의 의미를 스스로 깨닫고 하수구의 사명을 죽기로 감당해 낸다면 우리는 위대하기 그지없는 영광의 극에 이르게 될 것이라며 세계를 향하여 이렇게 절규한다.

“그러나 세계인들이여, 이 하수구에 감사하라. 그대들로 하여금 즐거움의 궁전에 놀게 하는 것은 이 하수구 아닌가? 그대들의 자녀를 특별한 운명에나 난 것처럼 자존심 속에 기르게 하는 것이 이 하수구 아닌가? 그대들의 눈에 보기 싫은것은 언제나 달게 받아 치워주는 것이 이 하수구 아닌가? 그리고 그대들의 그 살찐 육체와 그 문명한 머리를 길러주는 곡식과 채소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또한 이 하수구 아닌가? 아, 너 위대한 세계사의 하수구여!”(전집1, p.326, ‘우리의 사명’).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의 자리, 곧 ‘역사의 현장’

그러나 한국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정말 주목할 것은 함석헌이 발견한 ‘한국 역사의 기조로서의 고난사관(苦難史觀)’에 앞서, 함석헌 자신이 자신을 한국의 실체로 체험, 시종일관 일체의 불평 없이, 고난의 사람으로 고난의 삶을 살아냈다는 것이다.

‘역사의 현장’을 시공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처소’로 믿고, 그 하나님의 처소 곧, 역사의 현장으로부터 오는 고난을 말 없이,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감사, 감격으로 살아냈다는 점에서 그는 참 종교가 무엇인가를 제시한 ‘참의 증인’이었다. 그래서 함석헌에겐 북한만이 아닌 남한도, 한반도만이 아닌 하늘밑 땅 통치(국가권력을 비롯한)가 있는 곳은 그 어디도 감옥일 수밖에 없음을 실감한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인한 필화(筆禍)는 더욱 그랬다. 함석헌은 평생을 세계의 죄와 싸워야 하는 자로 확인하면서, 따라서 자신은 현실적으로 실패(?)의 사람임을 절감하게 된다. 현실세계에서의 힘은 언제나 현실의 것이니까….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을 실패하기 위해 온 사람이라 규정한 것이다.

반복되는 세 가지 심문

함석헌은 검찰의 심문관들로부터 크게 세 가지 심문을 받았다. 심문관들이 몇 차례씩 바뀌면서 한결같이 빠짐없이 하는 질문이 “도대체 애국은 그만두고 일반 상식을 가진 국민이라 해도 당신 같은 소리는 않는다. 이미 저명인사로 알려질대로 알려진 당신이 이런 소리를, 이런 글을 쓸 수 있느냐? 일반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리를…”.

심문관이 말하는 ‘이런 소리’, ‘이런 글’이란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라고 한 글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남한은 북한을 소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 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라고 한 그 글 말이다.

함석헌을 심문한 자들은 한결같이 ‘그것은 곧 국체(國體)의 부정이다’라며 입을 모았다. ‘나라 없는 백성’이라 한 것은 곧 국체의 부정이라며 으름장을 놓는 수사관들에게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이보시요. 나는 종교인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요. 누가 내게 ‘네가 종교인이냐?’ 하고 묻는다면 ‘그렇소. 나는 종교인이요’ 하고 대답하기에는 부끄러운 사람이오만 이제라도 누가 내게 소원을 묻는다면 오직 한 가지 ‘참을 찾아가는 것’이라 말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내가 우리나라를 ‘이게 나라냐?’,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한 것은 이같은 참 찾음을 전부로 하는 종교인의 입장에서 한 것입니다.

이같은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게 나라야’ 하는 것이야말로 나라 사랑하는 것이라 나는 믿소. 부모가 못된 자식을 향해 하는 말이 ‘야, 이 망할 놈의 자식아!’ 한대서 어찌 망하기를 바라는 말이겠소. 바로 키우려는 사랑의 소리 아니겠소. 내 맘 역시 그런 맘이외다.

종교인의 자리, 참 참을 찾는 자리에 서면 완전에 이르지 않는 한 됐다 할 수 없소. 완전을 요구하는 정신의 나라에서는 ‘전부냐? 그렇지 않으면 무(無)냐?’ 하는 법칙이 다스리고 있소이다. 내가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한 말은 그런 심정으로 들어야만 합니다”.

함석헌은 상대적인 것으로 둘러싸인 현상의 세계에서 온 몸으로 절대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묵과할 수 없는 부분이라며 즉답을 요구하는 것이 국가를 위해 몸바쳐 싸운 국군들, 싸우며 죽은 전사한 병사들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며 내대는 “불법남침을 한 공사군들에 대하여 ‘돌아오너라, 너를 대항해 죽이기 보다는 나는 차라리 네 칼에 죽는 것이 좋다’ 하고 같이 대항한 것을 비난했는데, 누가봐도 이는 대한민국을 그냥 북한에 넘겨주라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아주 조용한 음성으로 심문관들의 노성(怒聲)에 답했다.

“나는 물론 성경의 가르침대로 평화주의를 믿는다. 원수를 사랑하기를 힘쓰는 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의 나라에서 군대폐지, 전선에 있어서 패배주의를 주장 선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이다. 평화는 칼이 아니고도 사회의 질서가 유지될 만큼 사람들의 혼의 해방이 되어서만 될 수 있는 일이다. 군대 없앤다고 평화의 시대가 오지는 않는다. 혼의 실력 없이 군대부터 패지하자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희생적 사랑에 비할 수는 없지만 대적이 쳐들어올 때 목숨을 아껴 도망하거나 항복하는 것은 비겁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대항하다 죽는 것이 훨씬 더 도덕적이다. 그러므로 네 혼에 원수를 사랑할만한 실력이 없거든 차라리 나라를 위해 용감히 싸워라. 그러나 그것으로는 참 승리, 참 평화는 얻지 못한다. 참 평화의 세계는 내가 스스로 희생이 되어 죄악의 값을 내 몸에 지는 사랑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

다른 또하나 반복되는 심문이 “훌륭한 전공을 세운 군인더러 ‘훈장을 떼어버리라 했다. 두말할 필요 없는 이적 아닌가?”였다. 어떻게 해서든 국체를 부정한 자, 이적행위자로 규정, 국가보안법의 범법자로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들을 공유한 자들로 확답의 요구는 그야말로 살벌했다. 그러나 함석헌의 대답은 갓길을 몰랐다. 그만의 정답이 있었다.

“적과 하는 전쟁이라 해도 전쟁은 부끄러운 것이요, 하물며 동족과 하는 전쟁이겠소. 옛 성인이 말하기를 전쟁에서 죽인 적군이라도 상례(喪禮)로 대하라 했소. 나는 북한공산당의 손에서 죽을 고비를 넘어온 사람이오. 그렇다고 그 공산당 다 죽여놓고, 또 죽인것을 자랑 삼는다면 그걸 어떻게 한 민족이라, 동족이라 할 수 있겠소? 아무쪼록 큰 이해 있기를 바랍니다”.

감옥에서 나와 함석헌은 그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끝을 맺고 있다.

함석헌의 통곡

“어머니, 대한민국이시여! 당신의 지극히 작은 아들의 하나요, 당신의 노한 채찍 끝에 문들이 떨어지다마는 이 한 덩어리 피는 울음으로 당신 발을 붙들고 구름 속에 숨은 달처럼 사납게 물결치는 감정의 밑에도 오히려 고요히 잠겨있는, 거룩하고 밝고 옳바르고 크신 당신의 어진 마음에 호소합니다.

어머니, 대한민국이시여! 영원의 흰관(白觀) 머리에 쓰시고, 거룩한 향 가슴에 차시며 1만2천 캐럿 금강손에 끼시고, 새나라 주추 큰돌(漢拏) 발에 밟고 서시어, 3천폭 치마 안에 3천만 씨알을 품으시며, 5천년 긴 역사의 밤 펄럭거리는 등잔을 지켜 밝는 날의 임을 맞이하자는 한 밝음(太白)의 여왕이시여! 당신이 어찌하여 그 높으심, 크심을 잊고 작은 말을 다투시며, 의심을 품어 싸우려 하시나이까?

말씀의 큰 길을 막으려 하시나이까? 당신은 환웅님의 얼을 잊으셨나이까? 온달의 어짐을 잊으셨나이까? 검도령의 날쌤을 버리셨나이까? 처용의 착함을 떨어뜨리셨나이까? 어머니 대한민국이시여! 고난의 여왕이시여! 당신이 가난하다 업신여김을 받은듯 보이십니까? 천지의 거울을 들여다 보십시오. 얼룩이 가지 않았나?

바구니를 보십시오. 꽃은 다 없어지고 비지 않았나? 허리를 만져 보십시오. 옷이 다 벗겨지지 않았나? 치마를 보십시오. 얼룩이 가지 않았나? 팔다리를 보십시오. 온통 상처 아닌가? 당신의 촛불이 줄곧 꺼진동안 당신은 도둑을 맞고 짓밟힘을 당한 것입니다. 당신이 이제 임이 오신다는 외침에 어떻게 무엇으로 새날의 임을 맞이할 것입니까? 어머니를 보고 거지 됐다 함이 어찌 좋아서 하는 모욕이겠습니까?

날이 밝아오는데 잠을 아직 못 깨시고 준비는 아니되었으니 안타까워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어머니! 무엇을 못해도 이 불쌍한 씨알들을 한데 안으시고, 한데 어울리게 하여 통곡이라도 하게 하셔! 고려 400년에 울려다 못 운 울음, 이조 500년에 울려다 못 운 울음, 해방이 됐는데 또 울지 못해요? 슬피 울면 아마 하늘에서 불쌍히 여기어 입으실 옷과 타실 수레가 내려올 것이야요, 어머니!

어머니가 발겨벗기고 쫓겨나셨던 이 8월 29일. 이 글을 쓰자니 만가지 생각에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다 못합니다.”

/ 문대골(생명교회 원로 목사,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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