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47)

박정희 독재에 대한 투쟁 시절 장준하(왼쪽)와 함께.

1955년 사상계와 1956년의 함석헌

1956년 1월 함석헌의 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발표한 이후 1960년대 사상계의 눈부신 확장과 함석헌의 글은 실로 묘한 랑데뷰(rendez-vous)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함석헌이 사상계에 등장한 것이 이미 알려진대로 1956년 1월인데, 그 전해 1955년은 사상계가 장준하의 1인 편집체제를 벗고, 단연 주간(主幹) 주재의 ‘편집위원회’ 체제를 선택한다.
소설가 김성한(金聲翰)을 초대 주간으로 하여 편집위원은 장준하 자신을 포함 엄요섭(嚴堯燮), 홍이섭(洪以燮),  정병욱, 정태섭(鄭泰燮), 신상초(申相楚), 강봉식(姜鳳植), 안병욱(安秉煜) 등 실로 당당한 학자들이었다.
게다가 적중한 것이 ‘대학생에게 보내는 특집’이었다. 이때까지 3천 부의 발행을 넘지 못하고 있던 사상계였다. 그 사상계가 6월호를 발행하면서 그야말로 대박을 맞게 된다. 제판 3천 부를 발행하고도 사상계를 찾는 독자들의 빗발치는 강청을 피할 수 없어 2천 부를 더 찍어 시중에 내놓아야 했으니….
1955년 12월 송년호는 무려 1만3천 권의 잡지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956년 첫 달, 1월호에 함석헌의 그 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발표되었다.
그 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는 이렇게 확장된 사상계를 타고 나타난 것이다. 사상계는 누가 뭐라 해도 함석헌을 실어낼 동력(動力)이었다. 함석헌의 그 때, 사상계가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는 물론 주권을 유린당한 채 한숨의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의 무명민초(無名民草)들에게 더할 수 없는 위로요, 축복(?)이었다.
1955년 사상계의 새 체제와 그 새 체제를 잡아탄 1956년 신년호의 그 글이 그랬고, 1957년 바로 이어지는 함석헌과 윤형중(카톨릭출판부장)의 ‘할 말이 있다’, ‘할 말이 없다’ 하면서 연중 내내 이어진 논쟁 또한 그랬다. 사상계는 함석헌을, 함석헌은 사상계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아주 절묘하게 키워갔다.
사상계는 함석헌을 통해 ‘매일의 축제’를 벌여갔고, 함석헌은 사상계를 통해 새 역사를 갈망하는 민중의 대변자로, 지도자(?)로 부동(不動)의 자리매김을 해갔다. 1958년에 접어들면서 사상계는 400~500 페이지 분량의 월간지로 이미 4만부의 발행을 돌파하고 있었다.
박경수(朴京洙)는 이때(1957년 윤회중 신부와의 논쟁기, 필자 주)를 일러, “이 글은 한마디로 사상계를 지금의 시각에서 한 단계 높이 보이게 만들었다 할 수 있고, 함석헌이라는 인물을 세상에서 모두 놀라운 눈으로 보게 만든 것이기도 하였다”라고 증언한다(재야의 빛 장준하, 1995, 해돋이).
함석헌과 사상계의 정말 희안했다 하리만큼의 랑데뷰는 함석헌을 사상계의 그 한다하는 필진 중에서도 그를 독보적인 자리로 끌어올린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발표하게 되는 1958년 8월,  4개월 전부터였다.
당시 어느 일간신문까지도 10만 부에 미치지 못하는 때, 월간 사상계는 물경 4만 부를 육박하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언론기구로서 다시 한번 도약을 시도해야 했다. 논의에 논의를 거듭했다. 사상계의 또 하나의 자랑이 ‘논의(論議)’ 자체였다. 사장 장준하의 의사라 해도 사상계사의 업(社業)이 되기까지는 혹은 연(軟)하게, 혹은 열(熱)하게 이어진 진지한 토론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1958년 전반의 사상계와 1958년 후반의 함석헌

장준하는 그의 전역(前歷)과는 달리 타고난 민주주의 신봉자였다. 1958년 새해에 접어들면서 심사숙고를 거듭해온 장준하와 편집위원회는 우선 편집위원회를 보강하고 내년 1959년에는 편집기자들을 대폭 공채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렇듯 민중을 일깨우는 공기(公基)로서 사상계는 5월 ‘편집위원회’를 대거 확충하고 3개월 후 계창호가 함석헌으로부터 어렵게 받아온 원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8월호에 발표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을 ‘사상계의 맨’으로, 사상계를 함석헌의 발언대(發言臺)로 만들어버렸다. 함석헌이 스무날 동안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하던 날, 출소하는 함석헌을 맞은 장준하는 더없이 기뻐하며, “선생님, 이제는 사상계를 아주 선생님의 잡지로 아시고 무슨 말씀이던지 기탄없이 써주십시오” 하게까지 되었으니 말이다.
그 말을 받은 함석헌의 “아예 감옥에서 살라는 말이구먼” 하는 대답이 모든 마중인들을 웃게 했다. 함석헌은 이 글로 인해 한 주일쯤 후 서울시경 사찰과로 연행되었고(사실은 남대문 곁 통일사(統一社), 시경사찰과의 비밀아지트, (필자 주) 이틀 동안 조사를 받게 된다. 이틀 동안 20여 시간의 심문을 받은 함석헌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18일 동안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이 기간 사상계사는 경천동지라 할만한 대역사(大役事)가 일고 있었다.
우선 사장 장준하가 세 차례에 걸쳐 서울시경에 불려나간 것이다. 두 차례는 피의자로 불려나갔고, 마지막 세 번째는 장준하가 담당 조사관에게 자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처음 사찰과에 불려갔을 때 조사관은 함석헌을 처음 연행하여 조사할 때처럼 무례하기가 그지없었다. 그 수사관은 양(梁) 모라는 자로 함석헌을 조사하는 도중 함석헌의 수염을 잡아당기면서 “영감, 뭐 대통령이라도 할 것 같애”라며 치욕을 주었던 자였다.
장준하에 대한 태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장준하의 호칭에 ‘사장’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기는 했지만 어투는 아주 고약한 잡범 취급하듯 했다. 그 양 조사관의 책상에는 몇 권의 사상계가 펼쳐진 채 놓여있었는데, 하나같이 장준하의 이름으로 발표된 권두언(卷頭言)들이었다.
특히 이번에 반포된 8월호의 권두언과 또다른 함석헌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붉은색과, 파랑색깔의 밑줄이 거의 전면에 그어져 있었다.
‘거국적 각성을 촉구한다’라는 제하의 장준하의 글 중 몇 군데를 구체적으로 들이대며 “당신의 권두언은 함석헌과 공모해서 쓴 것이 분명하다. 함석헌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었다면 공모한 당신도 감옥에 가야 한다”며 윽박을 지르는 것이었다.
그 수사관이 장준하의 권두언과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공모에 의해 쓰여진 것이 명백하다면서 장준하게 들이대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두 사람이 똑같이 8·15는 참 해방이 아니었다고 주장한 것, 다른 하나는 장준하의 권두언 끝머리에 쓰인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함석헌의 글 제목이 특히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쓰였는데 공모 없이 그렇게 쓸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권두언의 결언(結言)으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우리 겨레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깊이 반성할 때는 왔다고 본다. 의(義)의 씨를 뿌려야 의의 열매는 거두어진다” 한 글 속의 그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바로 공모임을 증거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아주 싱겁게 끝나버렸다. 그 글의 제목은 사실 함석헌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글을 우리 사상계사의 편집국 기자 중의 한 사람이 함석헌 선생님에게서 받아올 때 제목이 없이 받은 것을 함 선생님의 양해하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오. 그걸 제가 읽어보고 그 말이 좋아서 인용했을 뿐이오. 정 내 말을 못믿겠다면 본인을 불러다 확인해 보시오”.
그 기자가 바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계창호였다. 두 번째 불려갔을 때는 수사관의 태도가 한참 누그러져 있었다. 함석헌이나 장준하나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을 너무 분명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장준하가 세 번째로 이번에 자청해서 만난 것은 옥중에 있는 함석헌의 현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양 조사관은 장준하에게 미리 귀뜸해 주었다. “내가 바로 말하기는 나도 조심스럽소만 너무 걱정마시오. 며칠내로 석방될 것이요”.
함석헌의 투옥과 사상계의 환호성

반대로 사상계사 안에는 일대 환호성이 일고 있었다. 사상계사(社)에 사상계를 판매하는 경향 각지의 서점들에 책을 찾는 시민들의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한 것이다. 함석헌의 구속이 일간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더욱 그랬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직접 사상계사를 찾아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사상계 8월호는 더 이상 증간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판매망이 공권력의 탄압 아래 봉쇄되었고, 서점에서의 판매도 불가능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서점들은 책을 모조리 판매대에서 거둬들여야 했고, 특별한 고객들과의 사이에서도 극도의 조심을 해야 했다.
그러나 열심 있는 독자들은 2권, 3권 값을 얹어주면서까지 사상계 8월호가 아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구해갔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발표되고, 함석헌이 구속되고 하면서 상황이 이랬으니 사상계의 실상은 어떠했을까? 걱정이 전혀 없지 않았겠지만 사상계를 뒤흔드는 사상계사 사원들의 계속되는 환호성으로 크고 작은 잡다한 생각들은 다 묻혀버렸다.
사상계와 함석헌이 이렇듯 구석구석까지의 나라 온 땅을 뒤흔들어 놓게 된 것은 당시의 이승만 독재 정권의 만행과 유무의식리에 ‘못살겠다’는 저변의 아우성을 지혜롭게 모아낸 신문기자들의 보도에 사상계 못지않는 연대운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같은 연대운동의 배후에 사상계 편집위원들의 줄기찬 활동이 있었다 해도 말이다.
도하(都下)의 신문들이 마치 경쟁이나 하듯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의 필자 함석헌의 구속, 곧 그 필화사건을 앞다투어 1면의 톱기사로 보도했다. 북진통일이 국시처럼 관권에 의해 강제주입되고, 경제는 독점재벌 위주로 굳어져가고, 대낮에 야당출신 부통령이 괴한에 피습을 당하는가 하면(1956년 9월), 야당의 대중집회는 곳곳에서 조직폭력배들의 폭력행사장이 되고, 드디어는 진보당의 조봉암 대표를 비롯한 박기출, 김달호 등 간부 10여 명을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검거, 투옥하는 등(조봉암이 이듬해 1959년 7월 31일 간첩죄로 처형됨. 필자 주) 온갖 불법이 자행되고 있어 뜻이 있는 언론인들로서는 그 저항의 분화구를 찾고 있는 때, 함석헌의 필화사건은 더할 수 없는 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의 언론계가 함석헌 사건을 무기로 이승만 정권을 향한 반독제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함석헌이 일제치하에서 시종일관 조국(?)을 위한 저항의 삶을 살았고, 이승만 정권이 오로지 그 정권만의 유지를 위

문 대 골
생명교회 원로 목사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해 사용해 오는 것이 반공(反共)이었는데, 이 필화의 주인공 함석헌은 북한에 진주한 러시아군과 김일성의 공산권에 의해 투옥, 탄압, 고문은 물론 그의 제거 직전에 월남해온 인물이라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그는 투철한 애국자였다는 것이다.
검찰은 그를 관제공산주의를 만들려 갖은 획책을 다 썼지만 함석헌은 이미 역사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국가권력도 어쩔 수 없는 만고(萬古)의 민중, 민중의 혼, 마하트마(인도어, ‘위대한 혼’이라는 뜻, 필자 주)로 영원한 바닥(하늘)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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