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송구영신 대담 / 김기석 목사(청파교회)

 

 영하 10도 안팎을 넘나드는 혹한의 날씨에 찾은 청파교회, 두터운 파카에 목도리까지 올려 두른 김 목사는 모처럼 손님이 왔다며 그제야 히터를 켠다. 대담이 끝날 때쯤 벽에 걸린 온도계 숫자는 13.6도. 히터가 추위를 가시게 하지는 못했지만 비탈길로 휩쓸려 가는 한국교회와 사회 현실에서 주체적으로 “다른 삶”을 시작하는 사람이 일어나야 하고, 그들이 교회와 기독교인이길 바라는 간절함을 나눈 대화는 충분히 훈훈했다.
김 목사는 대형화를 추구하는 속에서 예수가 설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면서 “예수가 보이신 낮춤, 섬김, 비움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편집자 주〉
   
대형교회 유지하려면 예수정신은 약화시킬 수밖에 없어…예수의 길로 나아가야
사탄이 주는 두려움욕망의 길 저항하라…하나님 중심의 인간다운 삶 성찰해야
타인의 고통 느끼라, 시혜 아닌 진실한 사랑하라, 성찰하라, 예수정신 구현하라

△한 해를 시작하면서 책을 통해 한국교회와 사회에 신선한 화두를 제시해 오신 목사님께 교회와 사회 전반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지난해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참 어려웠습니다. 사회적으로도 현 정부 출범 1년 만에 대통령 사퇴를 촉구할 만큼 소란스럽습니다.

-저는 사회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역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정치문화라고 하는 것이 여야 모두 책임정치를 구현하기에는 훈련이 너무 안 되어 있습니다. 사실 공공성에 대한 인식 등 시민의식은 성장하고 깊어지는 것에 비해 정치의식은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모습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상황입니다. 성경으로 이야기하자면 거라사의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서 나온 귀신이 돼지 떼 속에 들어가 비탈길을 달려 물속에 빠진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뭔가에 사로잡힌 듯 한 모습입니다.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편입되면서 돈이 유일신처럼 숭배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점점 세상은 각박해지고 있어요. 이럴 때, ‘우리 잠시 멈춰 서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보고, 어디로 향해 가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하고 제동을 걸면 좋겠는데 그러지 않고 그냥 비탈길로 계속 몰아가는 형국입니다.

문제를 제기하면 불편해하고 불온의 딱지를 붙입니다. 불통이지요. 사실 그런 현실에 대해 종교가 나서서 이건 아니다 하고 얘기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미 기득권화 된 종교들은 그런 체제를 통해 자기를 키워왔기 때문에 스톱 사인을 내리지 못하는 겁니다.

대형교회들의 문제가 지적되고 있지만 결국은 교리의 부재입니다. 대형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수 정신을 약화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 정신으로 가자고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가 없어요. 예수가 가자는 길은 낮춤, 섬김, 비움입니다. 혼자는 어렵지만 함께는 가능하다는 것이 하나님나라 삶의 방법입니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어찌 보면 기독교 밖에서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을 들어서 이스라엘 정화에 쓰신 것처럼 그들이 그런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소수지만 외부의 충격에 의해 비로소 교회에서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고 자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놀라운 섭리입니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며 새로운 목회, 새로운 형태의 교회들이 시도되는 것이 한국교회의 소망이라고 봅니다.

△예수 중심으로 그 길을 따라가겠다는 사람들이 목사고 신자인데 왜 모여서 딴 생각들을 하는 걸까요.

-사탄이 인간을 다루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사탄은 ‘너 그렇게 살면 루저(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어.

경쟁에서 지면 망하는 거야’ 하면서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이런 불안감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을 한 순간도 충만하게 살아내지 못하게 합니다.

자꾸만 다른 것에 의존하게 만들지요. 둘째는, ‘욕망’을 부추기는 겁니다.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께 돌을 떡으로 만들라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돌로 만든 떡을 먹어보라고 자꾸 유혹합니다.

깨어있는 종교라면 그 두 가지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근거 없는 불안과 공포,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생각에서 돈이 좀 적어도 행복하게 사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지요. 주체적인 삶의 자세를 만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다른 삶을 사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풀꽃 한 송이를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명품백이 필요 없어요. 행복을 구성하는 다른 삶을 찾기 시작하면 자본주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종교가 할 일이 그거예요. 그런데 오늘의 종교들은 욕망에 저항할 용기가 없어요. 그 길이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의 욕망에 맞춰주고, 그 속에 예수는 점점 없어지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이 재림한 예수에게 한 말이 오늘의 현실을 대변해 줍니다. 우리끼리 잘 하고 있는데 당신 왜 왔냐는 거예요. 두려움과 풍요의 환상을 심어줘서 사람들을 확고하게 사로잡는 사탄의 전략을 교회가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인데요, 목회자와 신자들이 그것을 알면서도 지속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한국교회 안에 성찰적 지성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삶, 성서를 통해 배운 정신으로 세상을 향해 해야 할 말이 뭔지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복 받고 잘 살 수 있다’가 아니라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지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런 얘기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가뜩이나 사는 것도 힘든데 교회까지 와서 이런 소리 들어야 해?”하고 불편해하지요. 그럼 목사들은 위축됩니다.

△청파교회 신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니까.

-‘영성’이란 말이 유행처럼 돌 때 신자 가운데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이 뭡니까?” 하고 물었어요. “이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타인의 고통이 예민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답해주었습니다.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잇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민해지기 시작하면 세상에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암호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꽃 한 송이를 봐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덜 가져도 내 마음에 채워지는 삶의 보람, 행복이 있습니다.

대체로 교회들이 우리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시혜의 대상으로 봅니다. 돈 보내주는 것으로 우리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하고 사람과는 만나지 않습니다. 그와 연루될까봐 무서운 겁니다. 그가 나를 변화시킬까봐 무서운 거예요.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보고 일단 그 앞에 멈춰 섭니다. 그리고 눈과 눈을 마주보며 그에게 ‘형제여!’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형제, 즉 사람으로 보았고 그를 변화시켰지요. 큰 교회들은 그냥 돈 보내고 잠깐 가서 봉사하고 은혜 받았다며 자기만족으로 끝납니다. 결국 그들도, 나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찰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는데요. 목사님이 어떻게 성찰해나가시는지 궁금합니다.

-방법은 따로 없어요. 공부해야지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경만 보면 된다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시, 소설, 인문학, 과학도서 등 다방면의 책을 많이 봐야 합니다. 인문학자나 과학자들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가장 깊이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눈을 빌어야 비로소 우리 세계가 보입니다. 문학도 그렇지요. 숨겨지고 가려져 있는 삶의 구조를 예민하게 포착해 우리에게 들려주고 우리로 하여금 더 깊게 보게 합니다. 시도 일상의 언어로 비일상적인 삶의 순간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책을 열심히 읽어야 비로소 성경이 제대로 보입니다.

△공부가 참 중요한데 그러기에는 목회자들이 너무 바쁜 것 같습니다.

-바빠서 공부가 가능하지 않다면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목사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주체로서 당당히 ‘다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갖추는 것입니다.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서 걷는 길을 삶으로 보이는 것이 더 큰 역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깊이 침잠하고, 고독하고, 더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목사들이 빠져 있는 착각 가운데 하나가 자기가 ‘힐러(치유자)’, 치유하고 돌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진짜 ‘힐링’은 그 사람의 내면이 튼튼해져서 스스로가 어려움과 직면하고 그것을 딛고 서는 것입니다. 상처 난 자국을 도려내는 것이 힐링이 아니라 내게 상처와 고통이 됐던 것을 빛나는 삶으로 바꾸는 것이 진정한 힐링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에 보면 이런 대목 나옵니다. 신을 향한 나의 기도는 어린 아이의 칭얼거림이 아니라 마치 사령관 앞에 선 병사처럼 오늘은 작전 계획에 따라 이렇게 살았고, 이 부분에서 성공했고, 여기서는 실패했다고 보고한 후 ‘뭐 시키실 일 없습니까?’ 하고 명령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린 진정한 기도를 드리지 못하는 거죠.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아프고 힘들다고 칭얼거립니다. 전 게으른 탓도 있지만, 신자들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찾아다니며 위로하지 않습니다. 자꾸 맞춰주면 성도들은 독립 된 주체가 되기 어렵습니다.

예수 정신은 그렇게 나약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나를 따르라 했지 믿으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따를 수 없으니까 예수를 외부의 존재로 대상화시켜놓고 믿는다 하면서 따름이 주는 공포와 불확실함을 불식시킵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고백이 공허해졌습니다. 진짜 믿음은 따르는 것이지요.

△행함과 믿음 중에 너무 믿음 쪽을 강조하다보니 따름의 신앙에 괴리감이 크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의 불일치는 오래도록 비판받아 왔습니다.

-믿음을 강조하는 데에는 바울 사도의 의인론이 바탕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바울의 의인론이 나온 때는 초대교회 도시 형성 당시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로마가 통일된 때입니다.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시대를 열었지만 로마 사회는 전반적으로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할 때는 노예시장이 활성화되어 로마가 성장했는데 전쟁이 사라지니 노예를 동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노예들이 허드렛일이 아니라 전문적 일을 하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방면노예도 늘어났어요. 노예들이 신분세탁을 하려니 사람 많은 도시공동체로 몰려들었는데, 그게 바울의 선교지였지요. 사람들이 모여드니 치안이 불안하고 지켜줄 무언가가 필요해 이런 사람들이 공동체를 형성해 초대교회 안으로 들어온 겁니다. 그런 속에서 사람들 간에 차별을 없애기 위해 바울이 말한 것이 할례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믿음으로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 속에는 행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강한 행함이 내포된 것이지요. 차별하는 저들이 내 형제라는 겁니다. 행함과 믿음은 결코 구분될 수 없어요.

△목사님이 쓰신 책에서 사람들이 ‘육체교 신자’가 되어 산다고 표현하셨는데, 정말 그런 정도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봅니다. 욕구와 욕망은 구별되는데, 욕구는 몸에서부터 출발한 필요입니다. 목마름, 배고픔, 잠자고 싶은 것 등이 욕구인데 그런 욕구가 충족되는 사회는 좋은 사회입니다. 배우지 못하고, 노인이고, 실직자라도 국가가 기본적인 욕구를 보장해줘야 합니다. 욕망은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필요입니다.

욕망 없이 살 수는 없어요. 하지만 과도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과도한 것이 특색입니다. 절제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지요. 자본주의는 생산, 사용, 폐기의 시간을 짧게 만들며 끊임없이 욕망을 확대 재생산합니다. 행복을 위해 뭔가 계속 소유해야 하고, 그러려면 죽어라 일해야 하고, 하지만 그럴수록 삶은 지치고 황폐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욕망의 노예가 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세계 대부분이 자본주의사회인데, 다른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본주의는 자(資)가 본(本)이 되는 사회, 즉 돈이 본이 되는 사회는 음란하고 성서적이지 못합니다. 세계 체제가 그렇다면 대안적인 삶을 누군가는 시작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과감하게 다른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밖에서 제시하는 가치에 부화뇌동 하지 않고, ‘난 이렇게 살 거야!’ 하고 선언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교는 공공성을 어제쯤 확보하게 될까요. 교회 양극화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저는 젊은 교역자들에게 이승훈 소설가가 말한 ‘서자의 당당함’을 갖자고 강조합니다. 적자(대형교회)의 시혜를 받지 않는 주체적 당당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양극화 문제는 제도적으로 해소될 가능성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자끼리 목회적 정보, 아픔과 기쁨을 공유하며 상보하자는 조직이 생겨나고 있는 것에 희망이 있고, 교회의 희망은 거기에서부터 싹튼다고 봅니다.

100명 넘으면 분가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공교회성을 회복하는 모습이 미약하지만 시작됐다고 봅니다. 그런 교회들이 늘어날 때 젊은 목회자들은 용기를 가질 것입니다. 이런 삶이 가능하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 몸짓이 큰 교회들의 일부 변화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대담 : 양승록 편집국장 / 정리 : 정찬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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