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예수가 내 안에 현재 완료형으로 사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비되고, 사단의 속임수에 동원되던가.

한국교회는 물론 세계교회의 현 수준은 미래를 감당해낼 힘이 없다. 16세기 루터나 칼빈의 개혁정신과 그 과제를 이어 받았다고 하지만 교회들 주변에서 개혁의지를 보았는가? 최소한 역사의 흐름을 바꾸려면 아브라함이나 모세 만큼한 인물이 등장해야 하고, 이사야나 바울과 같은 인물, 어거스틴이나 마르틴 루터 또는 칼빈 정도 수준의 인물이 등장해야 개혁적 분위기가 조성된다.

루터가 보룸스 제국의회, 신성로마제국 황제 앞에서 ‘하나님이여! 여기에 제가 예전 그 모습대로 있습니다’라고 했다. 벌벌 떨 사람은 루터인데 루터의 이 말을 듣고 그를 겁박하던 황제가 벌벌 떨지 않던가? 또 루터는 당시 그를 괴롭히는 교황 레오 10세를 향해 ‘지옥을 가장 많이 닮은 늙은 신부’라고 일갈했었다. 감히 교황을 향해서 지옥을 가장 많이 닮은 늙은 신부, 로마제국 황제들의 무덤 위에서 그들을 흉내 내는 자라고 몰아붙인 바 있다.

최소한 이 만큼의 담력과 소명감이 있어야 개혁자라고 할 수 있다. 요즘 한국교회는 가관이다. 교회 돈을 착복한 목사가 형사법정에서 실형을 2년 가까이 살고 나와서 자기가 무죄라고 했다. 그럼 그 사람에게는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유죄인가?  어디 그 뿐인가? 결코 비껴가지는 못할 죄인들이다. 돈과 권력으로 여론을 오도하고 있다. 잔나비 같은 자들이 대한민국의 교회를 회생불가의 지경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교회 하나, 신자 한 사람, 그 사람을 주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내기 위하여 목자는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던가? 신자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사탄의 탈을 쓴 거짓 목자들이 우리들 주변에 너무 많다.

그러나 개혁이란 감정적인 발언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할 때 ‘믿음’이라는 단어가 일상어나 세속적 언어가 아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믿음’은 계시어이다. 계시어이기에 뜻 풀이는 이렇다. 오직 의인인 지금 예수가 내 안에, 나와 함께, 나를 완전히 통제하시는 지도력으로 이미 내 안에 오셔서 산다, 오직 믿음 안에서 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믿음’이라는 일상어, 국어사전적 말뜻은 내가 너를 의지한다, 믿는다, 따른다 등의 뜻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가 내 안에 있을 때의 믿음은 예수가 내 안에 현재 완료형으로 사시는 것을 말한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로마서 1장 17절의 어설픈 이해로 말미암아 신앙의 핵심을 놓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믿음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비되고, 사단의 속임수에 동원되던가. 루터가 바울의 로마서 1장 17절의 재발견으로 개혁자가 되었는데, 루터는 그의 신앙의 용맹이 불 같은 사람, 맹수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루터가 그 시대에 태어나지 못하고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사산(死産)되었다면 16세기 대격변기의 종교혁명은 없었을 것이며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의 건국도 없었을 것이라고 개혁기 학자들은 말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루터 같은 인물을 대망한다. 한 시대를 깨우치고 가르칠 하나님의 사람을 원한다. 16세기로부터 500년쯤 지났는데, 주여! 인물을 우리에게 보내소서.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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