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21세기 이렇게 대비한다 <3-40>]

 마르틴 루터 시대의 기독교 개혁은 초기에는 거의 완벽한 변화의 지점까지 갔었다. 그러나 `‘만인제사설’에 대한 루터의 후속 대안은 쉽지가 않았다. 해빙기를 맞이한 동’’토지대의 민원이 하늘 끝 모르고 치솟는지라 루터는 기진맥진이었다.

특히 농민들의 요청이 날로 더해가면서 루터는 긴장했다. 그 자신이 농민출신으로 농민 농노계층까지도 새로운 시대의 자녀들로 위상을 높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찾아다니면서 호소했지만 차츰 농민들은 폭력 세력화 되어갔다.루터의 좌절이었다. 농민들의 혁명동기가 루터의 ‘만인제사설’에 기초한 자유에의 갈망이었다. 그러나 차츰 루터만 믿고 기다리기에는 그들의 욕망이 너무 컸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혁명의 대열을 이룬 루터의 옛 친구(?)들인 농노들은 루터의 속마음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그즈음에 독일의 귀족 계급 또한 루터에게 묻는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농노들과 세력을 형성하여 우리에게 칼을 겨눌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입장에 동의할 것인가? 루터는 진퇴양난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귀족세력과 손잡음으로 쉽게 끝났다. 그해1525년 봄, 루터의 사랑하는 농노계급은 철저하게 망해버렸고, 그들과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토마스 뮌처는 화형장의 잿더미 속에 묻혀 버렸다.

그 시대로부터 5백여 년 지난 지금도 역사는 더 정확한 해설을 망설이기만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르틴 루터가 농민군의 폭력은 거부했으나 귀족군대의 폭력에는 이무런 대안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루터는 1525년 농민군 제압의 공로로 유럽 귀족들의 찬사는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손에 들려졌던 개혁의 봉화는 빛을 잃었다.

루터 동시대의 개혁이 지속되는 가운데 취리히에서 7인의 재세례 형제들이 일어나서 시들어가던 개혁전선에 횃불이 되었다. 그들은 독일을 긴장시켰다. 그들은 “평민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만민제사론’을 승계시켜 나갔다. 그리고 루터의 폭력 동의에 대한 거부 표시인 양 비폭력을 전면에 내세웠다. 16세기 유럽의 중간기는 재세례파 개혁신도들의 줄기찬 비폭력 저항으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제세례파의 평민적 자유나 루터의 만인제사는 17세기 이후 기존의 역사의 벽에 부딪쳤다. 기독교의 참된 종교개혁의 핵심이 무엇인지가 드러났다. 기독교는 만인제사 또는 평민적 자유로 표현하는 사상의 구체적 진실을 담은 교회를 역사 앞에 제시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미 이루신 그 과제를 기독교가 숨기고 있다. 예루살렘의 공동체를 훼방놓았던 세력이 지금의 기독교 중심에 있고, 재세례파의 만인제사론을 짓밟아버린 세력들이 지금도 기독교 중심에서 우상의 눈을 부릅뜨고 있다.

개혁의 명제인 ‘만인제사’는 교회의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종교”라는 이름의 우상을 추방하기 전에는 실현이 불가능하고, 그 결과 인류는 거짓 종교들에게 끝없이 휘둘리게 되어 있다.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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