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21세기 이렇게 대비한다]

300여 년 동안 맹렬하게 타오르던 만인제사론에 기초한 기독교 개혁시대는 오늘도 지구상의 어느 기독교 계층을 크게 유혹하고 있다.

 마르틴 루터는 교황권의 빗나감을 연구하다가 ‘오직 성경’만이 모든 비행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자기 신앙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고민했다. 그는 어거스틴 수도원 첨탑을 오르며, 오르다가 힘이 들면 탑 중간에 엎디어 성경공부에 몰두했다.

어느 날 그는 바울이 쓴 로마서 1장 17절 부분을 읽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마 살리라’에 붙잡혔다. 루터의 발견이었다.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은 이어서 천하만인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선다, 라는 논리에 접근하여 만인제사론(萬人祭司論)을 말하게 된다.

이로써 루터의 종교개혁 논리가 완성되었다. 루터는 이글을 ‘크리스천의 자유’ 라는 이름으로 독일 귀족들에게 보냈다. 이 글의 반향은 귀족들보다 먼저 하층민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전체 인구의 절대수를 차지한 독일의 농노계급과 하층민들은 환호했다. 드디어 우리 같은 천박한 계층의 인간들에게도 자유가 주어졌다. 귀족들의 속박에서 풀려나 인격인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날이 드디어 오고야 말았구나.

독일 상층부에 위치한 교회보다, 교회의 주인노릇을 해온 교황권보다 훨씬 빨리 루터의 자유선언은 하층민들을 감동시켰다.

자칫 세상이 무정부 상황으로 빠져버릴듯한 위기가 찾아왔다. 독일의 귀족들은 큰일이었다. 농민들의 태업, 그들이 저항군 또는 반란군 형식으로 그들의 기득권을 탈취해갈 위기에 이르렀다.

독일 귀족뿐 아니라 하층민, 더 나아가서 천하민인들이 하나님 앞에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나아갈 수 있다는 복음에 감동하고 나서자 교회의 사회적 파장까지를 생각 못했던 루터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는 농민군 앞에 섰다. 너희들의 요구를 안다, 그리고 동의한다. 단 하나 너희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의 유혹을 뿌리쳐 달라.

루터의 간곡한 요구는 이미 타오르는 저항의 불길을 막을 길이 없었다.폭력화 되어버린 농민군, 그들의 전위에 선 친구 토마스 뮌처마저도 폭력의 불더미 속에서 건져내지 못했다.

루터의 1525년 7월, 그의 만인제사론이 거꾸로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아까운 사람들을 많이 죽였고, 루터의 개혁 의지마저도 위협받게 되었다.

만인제사론이 중세의 또 다른 화약고였다.

루터는 망연자실. 더 이상 싸울 의사가 없는 듯이 조용히 지내는데, 스위스 취리히에서 또 하나의 불길한 소식이 들려온다.

루터의 개혁파 동지인 쯔빙글리의 7제자들이 유아세례를 위선이라고 거절하고 다시 세례를 받았으며 이미 추리히에서는 그들에게 핍박이 시작되었고, 순교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고 전해왔다.

재세례파(Anabaptist)들에게 유아세례 거부는 표면상의 이유이고 정부명령 비협조, 징집거부, 비폭력, 예루살렘 공동체 복원이라는 예수 운동 구체화의 요구였다.

16세기 중간에 일어나서 300여 년 동안 맹렬하게 타오르던 만인제사론에 기초한 기독교 개혁시대는 오늘도 지구상의 어느 기독교 계층을 크게 유혹하고 있다.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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