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제2기의 과제 ③

반동적인 성격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을 1517년으로 볼때, 종교개혁 제2기를 겨우 8년 후인 1525년으로 계산한다는 점을 의아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근본이 무엇인가, 그 핵심의 가치는 무엇으로 볼것인가? 이에 대하여 필자는 만인제사설에 비중을 둔다. 그도 그럴 것이 종교개혁의 과제 중 오직 성경, 이신득의, 만인제사는 셋이면서 하나이며 특히 만인제사는 루터의 3대 교리 중 완결론에 해당한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그의 스승인 어거스틴과 마찬가지로 종합적인 신학의 완결에 허점을 보였다. 그의 3대 교리 중 오직 성경과 이신득의는 내면의 조건이지만 만인제사는 사회성을 필요로 한다.

만인제사의 원리는 기존의 중세사회 붕괴를 전제한다는 사실마저 그는 계산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독일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 ‘크리스천의 자유’ 안에 포함시킨 만인제사설을 읽고는 독일의 하층민들(농노)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루터여! 당신은 하나님의 사자요, 우리의 해방자요!’라면서 곳곳에서 봉기했다.

초기에는 루터의 지지를 받던 독일의 농민군은 차츰 루터가 그들과 거리를 둔다고 판단했다. 농민군 지도자인 토마스 뮌처는 초기와 달리 루터와 생각을 달리했다. 농민군은 점차 폭력화 되었다. 비폭력을 요구하는 루터의 뜻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농민군은 섬멸의 위기에 직면했다. 귀족이 루터에게 강력하게 선택을 요구했다. 이어지는 루터의 침묵이다. 당시 농민들은 루터를 구세주만큼 생각하고 있었으나 마르틴 루터는 더 이상 농민군의 지원자가 되지 못했다.

그 무렵 취리히 쯔빙글리 개력그룹 에서는 파열음이 시작되었다. 1523년 경부터 젊은 개혁자들이 스승인 쯔빙글리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개혁자 쯔빙글리는 점차적인 성장과정을 거친다. 그는 마르틴 루터와 같은 개혁자의 본분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루터처럼 극적인 체험과정이 약했다. 루터의 수도원 첨탑에서의 이신득의 경험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수준으로 본다면 종교개혁은 에라스무스가 알을 낳았고, 쯔빙글리가 그 알을 깠다고 할 수 있다(교회사학자 페트릭 콜린슨).

쯔빙글리는 글라루스 교구 사제였다. 그는 1506년 어느 날 저녁 늦은 시간까지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연구했다. 그는 차츰 명성을 얻으며 1516년에는 새로운 형식의 설교자로 등장했다. 여세를 몰아 1518년 취리히 대성당 소속 교구 사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1520년 새해 맞이 무렵 혹독한 전염병에 걸려서 죽음의 위기에 봉착한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병에 걸렸다. 그때 그는 종교적인 체험을 했다. “주여, 나는 당신의 그릇이니 쓰든지 깨든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를 수만번 거듭했다. 그의 생애는 이 순간 변했다.

얼마 후 그는 결혼했다. 이 사실을 주교에게 보고했다. 이제 그는 면죄부 고해성사, 순례, 성인숭배, 수도원생활 등 로마교회의 전통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드디어 1525년 4월에 이르러서 로마교회의 전통 미사예배를 철폐하였다.

쯔빙글리의 성격 중 인문주의자로서의 여유와 개혁자로서의 결단은 종종 자기 충돌을 일으켰으나, 그의 인문적 자질과 학구적인 성격은 그의 휘하에 양질의 두뇌들이 모여들게 했다. 양질의 두뇌가 아니라 개혁시대의 잔별들이 모여들었다.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은 1525년 1월 21일 밤 재세례(재침례) 후 1년 8개월이 채 못되어 세상을 떴다. 기록상으로는 첫 번째 제세례파 지도자는 에벌리 볼트(Eberli Bolt)다. 그는 스위스 슈비트(Schwyz)에서 1525년 5월 29일에 로마 가톨릭 당국자에 의해 화형을 당했다.

볼트의 죽음을 시작으로 재세례파의 순교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가까이는 3세기, 그보다 긴 세월 동안 순교의 연속이었다. 그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종교개혁의 과정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스위스 쯔빙글리 문화생들 가운데서 일어난 매우 경건하고 탐구적인 분위기가 유럽의 종교개혁기를 어둠의 시대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쯔빙글리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화를 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는 에라스무스가 되든지 루터가 되든지 하지를 못하고 두 사람의 명예를 함께 가지려다가 유능한 제자들을 죽음의 수렁으로 몰아 넣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쯔빙글리를 깨뜨려 시대의 다음 단계를 불러내야 한다고 그의 제자들인 스위스 형제단은 절규했다.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버리지 못하고 있던 유아세례에 대한 비판이요, 재 세례의 근거를 말해주는 휘브 마이어는 세례에 대하여 이렇게 제시했다.

“어떤 이가 먼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죄 있음을 진술하며 자신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되었다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와 성령께서 그에게 주신 은혜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통치에 따르는 삶으로 돌이킬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서례(침례)를 주는 것이다.

(후략)                                                                 (조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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