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21세기 이렇게 대비한다]

만인제사의 첫번째 현장이 골고다, 두번째 현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단에 제물로 바친 나(我) 그리고 당신의 제사가 된다.

조심스러워서 이렇게 말한다. 만인제사로 표현했던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크리스천의 자유와 만인제사의 관계성 때문에 늘 조심스러웠다. 특히 1525년 7월 토마스 뮌처의 농민반란이 미친 영향 때문에 ‘만인제사론’을 내세웠던 이들은  소리를 낮추게 되었고, 곧이어서 제네바 개혁의 강자인 칼빈의 등장으로 교회는 분위기를 바꾸어 간다.

종교개혁기 초의 무질서를 동반한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초기 개혁자들, 특히 재세례파 신앙의 자유와 시 정부(의회)의 통제를 거부했던 것과는 달리 칼빈은 ‘정부의 통제가 없이 산다는 것은 지푸라기더미 속의 쥐들처럼 혼란스럽게(무질서하게) 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칼빈은 교회의 사회성과 교리의 순수를 지켜내는 것 사이의 균형을 말했다고 볼수 있다. 삶의 질서와 신앙의 순수 병행 요구이다.

우리는 ‘만인제사’의 교리적 순수와 그것의 원초적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세속 질서 속에서도 걸림돌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16세기에 재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원형신앙인 만인제사론을 루터나 재세례파 열심파들이 어지럽혀놓은 무질서(?)한 결과에만 책임을 돌려서는 안된다. 그보다 먼저인 성령강림의 제자시대, 제자후 시대, 감독시대로 이어지는 이른바 카타콤시대의 원형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를 만나기까지 300여년 동안 성공적인 시대였었다.

그러나 16세기쯤으로 역사가 이어지면서 사회구조가 복잡하고 다양해진 관계로, 또는 인간이 초대교회 시절보다 사악해진 관계로 신앙의 자유와 정부가 요구하는 규범 사이의 균형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오늘 21세기 기독교 상황에서는 ‘만인제사’의 성숙과 완전 지향을 말해 보고 싶다. 서둘러야 한다. 기독교가 세속성 논리만을 앞세우고 ‘만인제사’의 궁극적 가치인 신앙의 완성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려는 경향을 주목해야 한다.

칼빈이 말한 정부 통제 없는 삶은 지푸라기더미 속의 쥐떼들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은 16세기의 혼란상을 경험한 발언이 아닐까?

왜냐하면 신자의 완전, 곧 너희는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라(마 5:48)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한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까지 인간은 사회적 불완전자인가? 이 세상에 살면서는 제도의 도움 없이 인간의 완전은 불가능한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다시 생각을 정리하자. 만인제사의 첫 번째 현장이 골고다, 거기 하나님의 제단에 예수를 바치는 예배요 제사였다. 그럼 두 번째 현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단에 제물로 바친 나(我) 그리고 당신의 제사가 된다. 이때 제단은 형식 또는 조직, 또 달리 말하면 질서요 규범이고 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 제단(골고다)에 나를 제물로 바치면 제사가 완성된다. 바로 이 절차과정의 성숙도와 완성을 향한 신자의 고뇌와 성실한 자기 절차까지가 만인제사의 완성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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