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제2기의 과제 ⑤]

작은 교회 운동이 유럽 기독교의 종교개혁 초기인 1525년 부활절 무렵부터 살인과 살육, 피비린내 나는 비극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재세례파 초기 제자들의 희생
 
1. 콘라드 그레벨 (Conrad Grebel, 1498~1526)
그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어느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참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였으나 초기에 희생되었다.

2. 조지 블라우럭(Georg Blaurock, 1491~1529)
그는 성격이 불같았다. 쯔빙글리와 의견이 달라서 자주 충돌했다. 그는 큰 키에 파란 눈을 가진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는 쯔빙글리와 함께 행동하기 전에는 쯔빙글리와 같은 가톨릭의 사제였다. 훗날 쯔빙글리는 블라우럭 같이 미치지 않고서는 어떤 사람도 주를 믿지 못할 것이라면서 블라우럭을 비아냥 거렸다.

3. 발타자르 흐브마이어(Balthasar Hubmaier, 1480~1528)
쯔빙글리 제자 그룹에서 가장 총명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역시 로마교회 사제였다. 그는 쯔빙글리와 만나기 전에 마르틴 루터와 같은 고민을 일찍부터 했던 인물이었다.
쯔빙글리의 친구 자격으로 함께 공부하는 인물들 간의 의견을 조정하고 논리적 갈등 부분을 그의 신학적 견해로 풀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는 콘라드 그레벨이나 조지 블라우럭, 또 한 사람 펠릭스 만쯔(Felix Manz)와 달리 여유 있는 자세를 가졌으나 활동 초기에 친구들과 함께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외견 상 쯔빙글리 그룹 안에는 두 가지 사상이 흘렀다. 하나는 교회에 대한 새로운 계획이고 또 하나는 국가에 대한 이해였다.

1524년 가을 그레벨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레벨이 아들의 세례를 거부했다. 어린아이는 믿음을 고백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믿음이란 세례 전에 고백해야 하는 선행조건이었다. 그 무렵 다른 친구들도 아들을 낳았다. 그들 그레벨의 친구들도 유아세례를 거부했다.

그 당시 유아세례는 교회의 예식일 뿐 아니라 국민의 의무였다. 세례가 국민의(시민의) 의무사항이니 당장 시의회가 그들에게 자녀의 세례를 요구했다. 시의회와 쯔빙글리 제자들 간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다.

시의회는 유아세례에 대한 공개토론회를 준비했다. 1525년 1월 17일 취리히 시의회는 유아세례에 대한 공청회를 열었다. 그 결과 아이들의 세례를 일주일 안에 받지 않거나 세례를 거부하는 경우 취리히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그레벨과 만쯔 등 강경파는 침묵을 지켰고, 그들 일곱 친구 중 빌헬름 로이블린(Wilhelm Reublin), 루드빅 하그저(Ludwig Hatzer), 안드레이스 카셀 베르그(Andreas Castelberg)는 추방을 자원했다.

하지만 재세례운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사도행전 5장 29절 말씀을 따라서 1525년 1월 21일 밤 펠릭스 만쯔의 집에서 비밀 모임을 가졌다. 콘라드 그레벨 등 그의 친구들은 그들이 어렸을 때 받았던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그날 밤 비밀 모임에서 다시 세례를 받고 새로운 인생을 다짐했다.

다시 세례를 받은 친구들은 취리히에서 쫄리콘 근방의 마을로 일단 물러났다. 그리고 곧 이어서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1525년 1월 말일, 이 마을에서 재세례의 신자들이 태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사도들이 가르친 방식대로 주의 만찬을 나누었다. 농부들은 오두막에서 주의 만찬에 대한 말씀을 읽었고 빵과 포도주를 나누었다. 이렇게 조용히 시작된 재세례파 운동은 곧바로 폭풍이 되어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다.

초기 재세례파의 순수함

콘라드 그레벨이 토마스 뮌쩌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의 내용이다. 재세례 파동 직전인 1524년 가을이다.

‘쯔빙글리는 우리에게 자기의 신학적 요구를 강요한다. 우리는 그의 요구에 따라서 성경을 공부하는 중에 쯔빙글리의 요구와 다른 가르침이 성경에 있음을 발견했다. 바로 어린아이의 세례 문제다. 태어나는 아이들마다 무조건 세례를 줌으로 신자와 일반인들의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마태복음 7장 14절 말씀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소수의 무리가 되기를 원한다.’

그레벨의 편지 내용 속에는 순수한 신앙의 모습이 있다. 쯔빙글리의 국가교회와 그레벨과 그의 친구들이 추구했던 작은 교회 운동이 유럽 기독교의 종교개혁 초기인 1525년 부활절 무렵부터 살인과 살육, 피비린내 나는 비극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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