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제2기의 과제 ⑥

재세례 파는 기독교 혁명군

‘재세례 파’라고 이름 붙여진 ‘취리히 형제단’은 기독교 역사 위에 본격 기독교를 처음으로 시도한 창조적 하늘군대였다. 저들의 이름 앞에 ‘재세례파’라는 딱지를 붙이거나 저들을 16세기 종교개혁기의 ‘과격파’로 분류하여 역사의 무대 위에서 추방하려 했던 16세기 종교개혁사는 다시 배워야 할 기독교의 핵심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16세기 종교개혁의 출발점으로 하여 먼저 깃발을 내 건 마르틴 루터, 동시대 취리히의 쯔빙글리, 뒤따라 등장한 제네바의 죤 칼빈 등의  중간지점인 1525년 1월 21일 밤의 결사행위로 중세기 하늘 위에 본격 기독교 개혁을 시도한 ‘취리히의 7형제’로 표현해도 될 재세례파가 등장한다.

1. 만인제사의 실현

취리히의 재세례파 형제들은 마르틴 루터의 만인제사론을 일찍이 주목했다. 루터의 크리스천의 자유론의 핵심인 만인제사는 기독교의 중심이고, 기독교의 완성을 위한 유일한 방법론이다.
취리히의 재세례파는 그들의 리더요 선생이었던 쯔빙글리가 정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어물거리는 모습에서 개혁신앙의 현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쯔빙글리에게 물었다.
“우리가 로마 가톨릭을 버리고 나온 핵심의 조건이 권력으로부터의 자유인데 당신은 어찌하여 매사 주정부의 눈치만 보고, 또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인가? 우리가 이 같이 살아갈 바에는 가톨릭에서 그대로 살지 뭐하러 뛰쳐 나왔다는 말인가?
바로 이 질문, 이 갈등에서 재세례파는 출발한다. 저들의 이 같은 요구에 쯔빙글리는 답변을 못 했다. 정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만 들먹이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으로 저들 젊은 개혁자들을 몰아넣었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다시 한번 거론해야 할 항목은 유아세례, 또는 영아세례이다. 당시 중세 기독교는 교회가 시민사회의 행정권을 대신했던 기독교 국가의 전통에 따라서 자식이 태어나면 무조건 세례를 받았다. 개개인의 신앙고백과는 상관이 없이 태어났으니 세례였다. 그러므로 세례는 호적 신고를 겸하고 또 이를 대신하는 행정 절차였다.
그래서 재세례파 청년 개혁 그룹은 본인의 선택이 무시된 세례는 신앙행위가 아니라고 판단, 신앙고백과 함께 다시 세례를 받으면서 정부에 종속된 신자의 자존심을 바로 세우려 했다.
 

2. 만인제사와 국가 관계

인간 고유의 신앙이 정부에 종속된다면 기독교의 길, 곧 만인제사의 길은 그 효력을 잃는다고 보았다. ‘만인제사’는 모든 은총을 입은 자들이 홀로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행위이다. 여기에 그 누구의 도움이나 간섭이 필요 없다.
골고다의 십자가를 제단 삼아서 나를 제물로 드리는 제사, 그때 어느 누가 나를 도울 수도 간섭할 수도 없다. 설사 돕고자 하는 자가 제사장(사제·목사)이라 해도 불필요하고 불가하다. 또 권력이나 국가라 할지라도 나의 제단에 간섭할 수 없다. 바로 이 가르침이 만인제사의 현재이다.
당시 재세례파는 이처럼 탁월한 논리, 유일한 신앙의 길을 제시했다. 본인들도 피를 부를 수 있는 혁명이기에 조심스럽게 출발했으나, 루터가 토마스 뮌처 등이 동의하고 일어난 농민반란을 폭력으로 제압해 버린 뒤 재세례파 운동에도 철퇴가 내려지기 시작했다.
앞서 잠깐 언급한 대로 1525년 1월 21일 밤 펠릭스 만츠의 집에서 저들 동지들이 돌아가면서 세례를 집례하면서, 저들은 자기들의 앞날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 예속을 거부하는 행위로 유아세례를 거부했고, 저들 중 일부는 가톨릭의 사제 출신이지만 이미 사표를 냈기에 평민(평신도)이다. 저들이 성직자의 도움과 지시를 받아야 할 성례 행위를  무시하고 평민들인 그들이 서로에게 세례를 받았으니 기존 체제의 전면 부정이 된다. 정부와 교회의 고유 권력(권한)을 둘다 내던져 버렸으니 저들 재세례파들 앞에는 넘치는 죽음 또는 순교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3. 폭력 앞에서 비폭력으로

자기 고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와 교회, 이 두 권력을 거부하고 단독자의 길을 선택했으나 뒤따르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재세례파는 스스로 감내해야 했다.
폭력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힘이 신자의 품위요 윤리적 기본 행위이다. 신앙의 자유 중 최고봉인 만인제사에 도전한 당시 재세례파 신자들은 빠르면 1525년 가을, 본격적으로는 1527년 부터는 유럽 각 지역에서 죄목 확인도, 재판도 필요 없이 한 마리 버러지들처럼 특히 함께 로마 가톨릭을 떠난 종교개혁파들 동료들로부터 개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들은 죽어갈 때 저항하지 않았다. 변명하지 않았다. 도망가지도 않았다. 저들 재세례파들의 장렬한 순교행위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재세례파들은 기존의 세력인 로마 가톨릭이나 종교개혁 세력들과는 분명한 차별성과 독자적인 종교개혁 더 분명하게는 “종교혁명”을 시도했던 16세기 그룹이다.
필자는 저들 재세례파 운동을 제2의 종교개혁으로 분류, 제1기 개혁인 루터나 칼빈 그룹을 뛰어넘는 종교개혁의 가치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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