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기 추모

 전덕기 목사 추모식 및 학술대회가 상동교회 주최로 3월 13일 충무아트홀에서 있었다.

민중목회자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기를 맞아 3월 13일 오후 1시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추모예식과 함께 학술대회가 열렸다. 전덕기 목사는 구국의 생기를 불어넣은 선각자로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돼 국가적으로도 그를 기리는 행사였다.

상동교회(서철 목사)와 추모사업회 주최로 열린 이날 추모식은 광복회, 상동교회, 삼일학원, 협성대학교가 공동주관하고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민족선양정기사업회, 우당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등 관련 단체가 연합하여 ‘3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기념패와 축하패를 봉정하고 안중현 서울보훈청장이 추모사를 하는 등 전덕기 목사를 기리는 행사를 가졌다.

박유철 광복회장은 “선생님이야말로 누구보다도 한 시대를 의롭게 사셨던 분이시며, 일본의 우경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오늘날 선생님의 구국정신을 이어갈 인재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추모사업회장 서철 목사는 초청사에서 “오늘 한국교회에도 전덕기 목사님처럼 사회를 보듬어 안고 눈물 흘리며 아파할 수 있는 분이 필요하며, 그의 위대한 신앙심과 애국심이 우리에게 절실하다”며, 그의 삶이 오늘에 이어지기를 기도한다고 열망했다.

추모학술대회에서 이덕주 교수(감신대)는 “전덕기는 목사이면서 민족운동가였다”며 그에게서 목회와 민족운동의 만남과 조화가 이루어졌다고 평가하고 “상동교회를 중심한 그의 ‘민중목회’가 ‘청년목회’와 ‘교육목회’를 거치면서 ‘상동파’라는 민족운동 세력 형성으로 이어져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민족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전덕기는 ‘민중’에서 출발하여 ‘민족’으로 매듭되는 한말 기독교 민족 신앙인의 전형적인 삶을 살았다”고  분석했다.

윤경로 명예교수(한성대)는 “전덕기가 목회자의 올곧은 신심과 애국정신으로 와해되어 가는 국내 구국운동을 추스르며 신민회 조직 재건운동과 구국교육 사업 등을 생을 마치는 그 순간까지 다한 구국운동의 선구자였다”고 평가했다.

또 한규무 교수(광주대)는 “1900~1910년대 상동청년학원이 단순한 교육기관에 그치지 않고 민족정신 고양과 민족운동 추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고 “1900년대 민족운동사에서 전덕기의 위상은 김구, 안창호, 이승만, 이승훈 등에 견줘 결코 낮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상동교회는 23일 오후 2시 전덕기 목사가 목회 활동하며 서거했고 장례예배를 드렸던 장소인 상동교회에서 유가족들과 교인, 각계 내빈을 모시고 서거 100주기 추모예식도 거행할 예정이다.
 

전덕기 목사는 누구인가?

 
고아 출신에 장사꾼이던 전덕기(1875~1914. 3. 23)는 1892년 윌리엄 벤튼 스크랜턴 선교사와 만난 뒤 상동교회의 창립을 돕고 민중과 민족을 생각하는 목회자로 성장한다. 전덕기 목사는 이후 상동청년학원을 조직해 애국청년들을 양성했고, 1905년에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 파기운동에 앞장서는 등 국권회복운동에 힘썼다.

민족운동 전면에 나선 적은 없으나 그는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한 민족주의자들의 조직과 활동을 가능케 한 결정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시영, 김구, 주시경 등 그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을 후대에 상동파라고 부를 정도로 강력한 인맥을 형성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전국감리교청년회연합회를 소집해 이들을 중심으로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전개했다. 1907년에는 이준과 더불어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거사계획을 성사시켰다.

독립협회와 신민회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던 전덕기 목사는 1911년 데라우찌 총독 암살 사건으로 알려진 105인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고, 그 휴우증으로 39세(1914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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