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당나라 景敎 _ 29

▲ 아제르바이잔 정교회 유아 세례 장면.

“만약 내 번역에 오류가 있다면 나의 혀가 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나의 혀는 타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말을 했다는 구마라습은 정말 대단한 오만을 가졌군요.”
안토니 역시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도 그는 알로펜 주교의 학문을 향한 깊이를 다 알 수 없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마의가 주교 앞에서 덜덜덜 떨고 있는 그 심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안토니가 마의 곁으로 가서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사문이시여,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나는 우리 주교님께 배운지가 수십 년이지만 저분의 실력을 다 모릅니다. 자기 공부는 모두 자기 혼자서 하는 것이죠. 우리도 열심히 공부합시다.
“안토니 사제님. 공부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더군요.”
“그야 우리 모두가 다 아는 거잖아요.”
“아닙니다. 저는 전혀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영진 주지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는 자기 말에 자기 자신도 민망했는지 뒷머리까지 긁고 있었다.

“자, 자! 너무들 자책하지 마시고 오늘 이렇게 모였으니 달마산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어 볼까요?”
알로펜이 중국 선불교의 교종이라 할 달마 이야기를 꺼냈다. 달마는 알로펜의 나라 페르시아 출신이라기도 하고 인도인이라기도 한다. 그는 알로펜보다 겨우 몇십 년 전에 중국으로 건너와 제자들을 많이 길렀다.
“여러분, 달마 선사가 혜가를 만나게 된 이야기를 아시오? “
알로펜의 질물에 어느 누구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아는 바가 없나요?”
“네, 잘 모릅니다.”
“들은 바 없습니다.”

“달마가 깨달음의 시간까지를 위하여 침묵의 기도시간을 계속하는데 제자 되겠다는 이가 며칠 째 찾아와서 졸라 댑니다.
달마는 그를 친절하게 대하지는 못하고 나도 아직 모르는데 내가 누구를 제자로 삼겠느냐고 오히려 사정을 해서 돌려보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달마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반복되는 시간이 길어지자 달마는 화가 났대요.

며칠 뜸하던 어느 날 제자의 길을 인도해 달라고 어거지를 쓰는 혜가라는 사람이 또 찾아왔어요. 그날따라 우중충한 하늘에서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어요. 화가 치민 달마가 이놈아! 내가 너를 제자 삼는 길이 있다면 저 하늘에서 붉은 눈이 쏟아진다면 혹 모를 일이다, 라고 하면서 방문을 닫아걸고 들어갔답니다. 방안에 들어갔으나 달마는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제자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에게 너무 심한 언행을 행사했다는 자책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한동안 조용하던 문밖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렸어요. 불길한 예감이 밀어닥친 순간, 달마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한순간, 달마는 기겁을 했대요. 마당에 하얗게 쌓여 있어야 할 눈이 빨갰어요. 마당에 뒹굴면서 자기 팔들을 붙잡고 있는 혜가의 몸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서 하얀 눈밭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혜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스승님 붉은 눈이 왔어요. 이제 저는 스승님의 제자입니다’ 하더랍니다.”
알로펜의 말을 들은 방안의 사람들은 또 할 말을 잃었다.

“주교님, 참으로 무섭습니다. 저 같은 돌중놈이 진리를 운운한다는 것이 우습기만 합니다.”
영진사 주지가 내린 자기 반성이었다. 침묵 속에서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과 몇십 년 전 여기 중국 땅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고, 그 후 달마 불교는 혜가를 지도자로 삼고 더욱 발전하고 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인간사의 기초기반이 되어 주는 것이 아닐까요. 구마라습의 정확한 불경 번역, 달마의 철저한 제자 훈련이 중국 불교의 값비싼 기반이죠. 저 알로펜도 아주 값비싼 기독교를 중국에 선물하여 빛나는 중국 기독교 시대를 천년 또 천년 이어가도록 하려고 합니다.”

분위기가 너무 무겁다면서 알로펜은 산 언덕에 오르자고 제안했다.
산보를 마친 후 저녁 때 영진사 승려 8명은 수도원 객실에 남고 알로펜과 안토니, 그리고 마의와 청수는 본부 사무실로 내려왔다. 영부가 싱글거리면서 차를 내왔다. 이윽고 드보라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마의와 청수를 바라보면서 인사 올렸다.
“저는 주교님의 주방 머슴 겸 제자인 드보라입니다. 귀한 도반들께서 찾아주시니 영광입니다. 한분은 쿠처의 구마라습 제자 되신다면서요.”

“아 네, 접니다. 제가 마의이고 이분은 청수 스님으로 내 친구입니다. 구마라습은 하늘의 별이시죠. 또 저만이 아니고 청수 스님도 구마라습을 흠모합니다.”
“그러시군요, 저희도 하늘보다 더 높으신 주교님을 사부님으로 모시고 공부 중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말씀 나누세요.”
드보라는 과일 바구니를 놓고 나가 버렸다.
영부가 과도를 들자 안토니가 그것을 빼앗았다.
“너는 나가서 놀거라. 어른들 틈에 낄 자리가 없느니라.”
“사제님. 이놈은 주교님의 후계자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를 철부지로 보시지 마세요.”
영부가 마의와 청수를 향해서는 밝게 웃으면서 안토니 사제에게 쏘아 붙인다.
“녀석아, 너는 아직 어려요. 나가서 놀거라. 알았지.”
안토니가 정색을 하자 영부는 주춤거렸다. 잠시 분위기를 살피더니 마의와 청수에게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주교님, 현장 법사가 전하는 말을 들으니 천축국 불교는 대단히 선진적이더군요. 그들은 소승불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나 대승불교도들이 같은 사찰 안에서 동거를 하더랍니다.”
“그래요, 그거 참 멋있군요. 아마 그럴 수 있는 것은 대승불교가 천축국에서는 분명히 소수자일 터이지만 그때문만이 아니라 아마 잘 모르기는 해도 대승불교의 대승(大乘)적 태도가 빚어낸 아량일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불교가 태어난 후 힌두교의 저항으로 한동안 위축되었으나 아쇼카 대왕 시대에 불교의 위치가 다시 견고해졌지요. 그리고 그 기반은 분명 소승불교였지요. 그러나 1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불교의 대승화(大乘化) 운동은 차츰 세력이 강화되어 중국의 불교는 모두 대승불교가 되었지요. 구마라습이 서역의 쿠처에서부터 동진에 이르기까지 이끌어온 불교 또한 대승불교였고, 현장 법사도 대승불교를 중국 땅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하겠죠.”

“그렇군요.”
“저 역시 기독교의 대승화를 위하여 태어난 사람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불교식 논리로 말하면 하나님 세계의 대승화를 위해서 오셨답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구약 시대가 불교식으로 하면 소승적 신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로마의 기독교 제국에서는 소승적 종교 창설자로 만들고 말았어요. 저는 집을 떠나 지난 50여년 간 중앙아시아와 서역은 물론 지금 중국에서도 날마다 기도하고 생각하는 일이 기독교의 대승화, 곧 생활 종교화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 제가 깊이 듣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이 문득 떠오르는 것은 천축국의 불교 사람들이 소승집 절간에 대승교도들과 함께 사는 것은 서로의 문화 양식이 같고 서로가 필요해서라는 생각을 합니다.”

“맞습니다. 맞아요. 그래서 저는 여기에 파사사(경교사)라는 교회당을 지어 로마식 교회운영을 시도하고, 또 장안 곳곳에 가정집마다에서 생활교회당 공간을 만들고 있답니다.”
“생활 교회당이 무엇인가요?”
마의가 진지하게 물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일에 대해서 저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예수님은 종교집단을 만들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교회당이 필요하다면 이 세상에 단 하나의 교회가 필요하지요.”
“ 좀 더 설명이 필요하군요.”

“그래요, 마의 선사님. 아마 선사님께서도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만 새 종교는 신과 인간의 두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그래서 임마누엘 법칙을 따르셨어요. 임마누엘은 하니님이 사람으로 오셨고, 사람으로 오셨다 함은 사람더러 하나님같은 자부심으로 인생을 살아달라는 것이죠. 또 그 요구의 정점은 하나님과 인간의 격이 일치 된 한 지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종교는 하나님과 사람들이 어우러져서 이 세상을 하나의 큰 예배당 삼는다는 뜻입니다. 불교가 대승논리 쪽으로 발전해 가는 것 또한 역사의 흐름을 따르는 일입니다. 소승교단에서 대승파 승려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 자체가 발전적인 태도입니다.”

“주교님, 제가 페르시아에 있을 때 어떤 승려를 만났더니 대승불교의 큰 스승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그분이라고 하더이다. 주교님은 어찌 생각하시나요.”
“그 분이 누구실까? 나 역시도 그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가슴에 담고 있는데, 아마 그분은 천재가 아닐까요?”

작가 조효근 : 1976년 『월간 문학』 신인상 소설 등단.
대학에서 세계교회사 및 종교사 38년째 강의.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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