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콥 후터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라비아를 떠나기로 하였으나 대부분 모라비아에 머물렀다. 후터의 동료이자 선교사였던 피터 보이트는 1534년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되어 에겐부르크에 있는 어둡고 침침한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의 발목과 손목은 쇠고랑으로 단단히 채워졌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고통을 당했다. 그는 자기의 발톱을 갉아먹는 쥐떼들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훗날 그는 석방되어 후터라이트 형제단에 합류했으나 쥐가 뜯어 먹은 후유증으로 두 발을 잘라야만 했다. 그는 공동체 활동을 하다가 1570년 숨을 거두었다.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라비아 공동체를 지켰다. 어떤 이들은 숲과 들판에 자기들의 몸을 숨겼고, 어떤 이들은 왕명을 어기고 제후들의 집에 몸을 은신하기도 했다.

후터를 잡아들이기 위한 현상금이 붙었다. 금액은 약 40길더(guilder, 약 대학교수의 1년치 봉급 정도). 1535년 11월 29일 후터와 그의 아내가 오스트리아에서 잡혔다. 그들은 즉결심판을 받기 위해서 인스부르크로 이송되었다. 형틀에 매여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으나 후터는 함께 활동했던 이들의 이름이나 그의 선교 방법 등에 대해서는 발설치 않았다.

페르디난트 왕은 후터를 본보기로 만인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공개처형을 결심했다. 특별한 고문방법이 준비되었다. 후터는 묶인 채로 얼음물에 담가졌다가 뜨겁게 달궈진 방에 집어넣어졌다. 그리고 상처 난 몸 부위에 브랜디를 붓고 불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공개 화형식은 1536년 2월 25일에 이루어졌다. 그의 아내도 2년 뒤에 사형에 처해졌다.

현세와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제이콥 후터만큼 신실했던 사람이 드물었다. 1533년부터 1535년까지 약 3년 동안 그가 모라비아 후터라이트의 리더였을 때 주변의 14개 지역의 리더까지 도맡았었다.

그는 시샘과 분파문제로 고민하는 이들, 협박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두려움 없이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법의 모범을 보였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고 그는 외쳤다.
제이콥 후터의 삶의 모범에서 그들의 단체는 자연스럽게 후터라이트로 불려졌다. 후터가 떠난 뒤에도 후터는 지도자의 위엄을 지켜냈다.

후터의 뒤를 이어 한스 아몬이 리더로 나섰다. 쉼 없이 이어지는 박해는 세월 속에서 가속되었다. 한스 퓌흐너는 잡혀서 벌거벗겨진 채 끈으로 공중에 매달렸다. 그는 몸을 바로 세우거나 자기 손으로 음식을 먹을 수도 없이 굶주림에 시달려 죽게 되었어도 자기의 조직을 실토하지 않았다.


조효근 /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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