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희생·봉사의 삶 살아온 임은주 장로

가난한 시절 산파, 시체 염하며 교회 세우는 데 힘써

신앙도 쉽게 하려는 세태 “세상에 본이 되지 못한다”

 

   
▲ 일평생 헌신의 삶을 살아온 임은주 장로가 자신의 손을 펼쳐보이고 있다.

“한여름 밤에 죽은 시체와 단둘이 한 방에 있다가 시원찮은 전깃불이 훌떡 나가버리면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고, 등골이 오싹해 땀인지 눈물인지 모르게 범벅이 돼요. 그래도 끝까지 할 일을 마쳐야 했어요. 그게 나에게 주신 십자가니까요.”

임은주 장로(85, 만나교회)는 죽은 시체 42구를 닦아주고, 산파가 되어 78명의 새로운 생명을 받아냈으며, 야학을 열어 문맹을 깨치는 등 일평생 섬김의 삶을 살아오면서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자신의 손에게 여든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교회에서 진행하는 실버학교 시간에 자신의 손을 그려보는 기회가 있었다. 주변의 “대단하다”는 칭송에도 “어렵던 시대에 그 정도 안 하며 산 사람 어디 있겠냐”며 넘겨왔는데, 이제는 류머티즘으로 구불구불하게 굳어버린 손을 가만히 만져보며 임 장로는 “보기에는 미운 손이지만 험한 일, 좋은 일 다 할 수 있게 해준 내 손”이라며 지나온 날들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 못생긴 나의 손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곱기만 한, 자그마한 체구의 조용한 성품인 임 장로를 보면서 과거 험난한 일들을 해냈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용인으로 이사 오기 8년 전까지도 임 장로는 동네에서 염장이와 산파 역할을 했다고 했다. 왜 그는 그토록 험난한 일들을 감당해야 했을까. 그가 살아온 이야기는 일제 시대를 거쳐 8·15 해방, 6·25 전쟁, 1·4 후퇴 등 우리네 고난의 근현대사를 그대로 증언하는 것이었다.

“목사 가정의 8남매 중 맏딸로 자라면서 나라를 사랑하고, 미신을 타파하며, 사람들을 교육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배웠어요. 너도나도 다 가난하고 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 짓는 것이지요.”

임 장로는 7대를 이어 신앙을 지켜온 목회자 가정의 맏딸이었다. 할아버지는 독립선언서를 옷 속에 누벼서 가지고 다니며 충청남도 일대에서 3·1운동의 봉화를 올린 인물이었다. 목회자였던 아버지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맞서다 주재소에 끌려가 옥고를 치렀다. 총탄에 죽기 직전에 해방을 맞아 죽음을 면하고 다시 목회를 이어갈 수 있었다. 임 장로의 애민, 애족 정신은 가정에서부터 단단히 심겨진 것이었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후, 일본 순사들이 아버지를 남기고 가족 모두를 다른 지역으로 분리시킬 때 임 장로는 몰래 아버지 곁에 남아 되어가는 일들을 지켜봤었다. 아버지는 신사참배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주재소에 끌려갔고, 임 장로는 혼자 머물 곳이 없어 주재소와 가까이 위치한 병원에서 일하는 친구를 따라갔다가 의술을 배우게 됐다.

“주사 한번 맞아본 일 없는데 군인들의 찢기고 터져 피로 얼룩진 곳곳을 매만지고 치료하는 일이 징그럽고 겁났지만 흰 가운을 입으니 어린 나에게 군인들이 인사하는 것이 신기하고 힘이 솟더라고요.”

인체 그림으로 오장육부의 돌아가는 원리를 배우고, 주사 놓는 것부터 전쟁터에서 심하게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는 일도 해야 했다. 아기를 받는 것도 병원에서 배웠다.

해방 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경기도 평택 진의면으로 시집을 갔다. 어디에 있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고 죽는다는 일념으로 다져진 신앙인지라 가난한 살림에 고된 시집살이 속에서도 임 장로는 자신이 할 일을 부지런히 찾았다.

단독목회가 어려워 주일에만 설교 목사들이 방문하는 상황에서 임 장로는 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성의 신분이지만 목회 전반의 일을 돌봤다. 아이를 업고 다니며 전도하다 시장기가 돌면 우물가에서 물 한 사발에 보리주먹밥으로 배를 채웠고, 풀섶에 숨어서 젖을 먹였다. 그러고 보니 그가 해온 일들은 모두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본을 보이기 위한 목회의 일환이었다.

“한번은 교인 중에 상을 당해 찾아가 예배드리고 나오는데 ‘예수쟁이들은 사람이 죽었는데 꽥꽥 노래만 부르고 가냐’며 욕하는 거예요. 이래서는 본이 안 되겠다 싶어 팔을 걷어붙였지요. 주여, 나에게 주신 십자가 잘 지고 이기게 해 주세요, 간절히 기도하고 담대하게 죽은 시체를 염해주었어요.”

요청이 오면 재봉틀로 수의를 만들어 가서 염을 정성스레 해주었다. 아기를 받아준 집에서는 삼일 밤낮을 새어가며 산모와 아기 수발을 들었고, 아기가 돌에 입을 수 있도록 옷을 지어 선물했다. 의료도구를 제대로 갖추기 어렵던 때라 집집마다 다니며 버리는 홑이불을 모아 성한 부분을 골라 뜯어내어 잿물에 소독하고 숯다리미로 다려 배꼽싸개나 붕대 등 거즈를 만들어 썼다. 지역에서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으레 임 장로 가정을 찾았다.

“애기 낳은 엄마들에게 ‘힘들었지요?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바친 예수님은 이것보다 더 힘들었어요. 예수님 믿으세요’ 하면 고마워서라도 교회 나오곤 했지요.”

첫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데 한글을 모르니 작대기 숫자로 후보를 표기했고, 찬송가와 성경을 거꾸로 들고 예배드리기가 일쑤인 것을 보고 집에서 야학을 열어 한글부터 가르쳤다. 호롱불에 의지해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가르치고 배우는데 지원자는 점점 늘어갔다.

규모가 커져 1953년에 진위고등공민학교를 설립했고, 이후 1964년 학교법인 광염의숙을 세워 현재도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가곡리의 진위중·고등학교(교장 권혁우)를 통해 ‘옥토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되라’는 교훈으로 교육의 사명을 이어가고 있다. 학교는 남편에 이어 임 장로가 2004년부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 신앙은 나를 희생해야

임 장로는 지역에서 의사, 산파, 선생님, 전도사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다고 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 많은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싶은데, 임 장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며 “나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했다.

얼마 전 학교 졸업식에 이사장으로서 참석했는데 과거 가난한 세월을 함께 했던 이들이 자리를 마련해 임 장로를 초청했다. 그 자리에서는 22년 전 출산이 늦어져 죽어가던 것을 살려낸 아이가 든든한 청년이 된 것을 볼 수 있었고, 부녀자들은 ‘형님’ ‘사모님’ ‘장로님’ 덕에 내가 살았다며 감사 인사를 하며 임 장로의 구불구불한 손을 놓지 못했다. 임 장로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살게 하신 것”이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고 독려해 주었다.

임 장로는 과거에 비해 요즘 세태가 쉽고 편리한 것을 선호하다보니 신앙도 쉽게 하려는 경향을 우려했다. 그는 “쉽게 하려는 신앙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세상에 본이 되지 못한다”면서 과거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던 때를 상기시키며 “신앙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며 믿음과 삶이 일치되는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축복만을 바라는 맹목적인 신앙에 대해서도 “미신 앞에 밤낮 복 달라고 비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미신 타파를 위해 피땀흘린 신앙 선조들의 노고를 무위로 돌리는 것이라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 맡기고 나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교회의 노인대학 선교단에 참여하며 군부대나 양로원 등에서 하모니카, 오카리나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양산춤, 부채춤 등을 추기도 하는 임은주 장로, 그는 “이 생명 다하도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다”며 마지막까지 봉사의 삶을 염원했다.

정찬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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