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당나라 景敎 _ 30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으나 도마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어요.
‘내가’를 ‘예수가’로 묶어버렸을 때 기독교는 예수를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었으며
기독교는 피할 수 없이 우상종교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단절의 벽. 2013년 7월.

 

불교도 입에서 대승불교의 핵심이 요한복음에서라니…. 누가 들어도 자칫 해괴한 논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것은 궤변이다.
안토니가 입을 열었다.
“주교님, 저는 동의할 수 없군요. 어떻게 감히 그렇게도 멀리 뛰십니까? 불교와 기독교의 거리가 있다고 저는 봅니다만….”
“그래요. 나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나 인간의 언어가 그러했듯이 삶과 죽음의 이치가 본디 한 분 하나님께서 나왔다고 믿으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거요.”
“그거야, 우리들 기독교의 생각이죠. 타종교가 우리의 논리로 고분고분 따라준답니까?”

“이보시게. 왜 타종교로 생각하는가. 먼저 자기 자신의 자세에 진실해야지. 생각해 보시오. 내게는 오직 나 뿐, 또 다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시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진실은 하나라는 뜻이야. 그리고 나도 하나, 진리도 하나일 뿐이야.”
“그 말씀은 알죠. 그럼 요한복음과 대승불교의 관계를 말씀해 주시죠.”

“마의 선사가 페르시아에서 만났다는 그 승려가 누구인지, 또 어떤 표현으로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요한복음에서 나왔다 했는지, 그 표현의 내용을 몰라서 답변이 쉽지는 않으나 내 생각은 말할 수 있어. 내게 있어서 요한복음 저자가 말하는 예수는 믿고 따르는 자 모두를 예수와 성정이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보고 계신다네. 그럼 되지 않았을까? 마의에게 대승의 가르침이 요한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또는 하나님 아들을 표현하는 논리와 일치한다고 했을 게야. 아마 모르기는 해도….”

“네, 맞습니다. 제가 만난 그 사람 이름은 마시오사라는 분이었는데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말씀하신 이 대목을 제게 말해주더군요. 도마 제자와 예수님의 대화편이었죠. 도마가 주님 가신 길을 모르는데 어찌 내가 그 길을 가겠느냐고 물으니까 예수는 내가 길이고 진리요 생명이다, 하셨다면서 여기서 예수께서 ‘내가 길이요’라고 하실 때 ‘내가’는 ‘예수’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길이요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예수가 아니라니 그건 이해가 안 됩니다.”

“앞뒤 문맥을 살펴보게. 이어 예수는 자아(自我)를 떠나서 또 하나의 객체(客?) 또는 자기를 객관화 시키고 진리의 냉혹한 자리에서 말씀하신 것이야. ‘내가’라는 말은 모든 깨달음 있는 자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야. 바로 이 뜻을 기독교 사람들은 모르고 페르시아의 승려인 마시오사는 알고 있는 것의 차이지. 그리고 도마와의 대화 말고도 요한복음 논법은 거의 전편에 흐르는 사변(思辨)적인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지. 그래서 나는 늘 아직도 요한복음은 미공개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다네. 정말이지 알 수가 없어.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도 기독교인들에게 요한복음은 1천 년 이상은 비밀의 복음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네.”
“무슨 말씀이세요. 주교님이 계시잖아요.”
마의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여는 건가요.”
“그럼 누가 엽니까?”
“그거야 여는 자들이 열겠지.”
누가 여느냐고 물었던 안토니는 주교의 차디찬 한마디에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조금은 더 설명해 줄 수 없을까.
“열리는 시간, 또 여는 자의 자격은 그들 자신이 알게 됩니까?”
마의가 물었다.
“그래요, 요한복음은 반드시 죽음을 통과한 사람이 찾아가는 그 다음 죽음의 길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요?”

“대개 기독교 신자들이 십자가 세례를 완전한 죽음으로 보지 않고 통과의례로 봅니다. 십자가의 세례가 통과의례가 되면 기독교는 상대화된 또 하나의 종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는 종교 만들자고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예루살렘 종교를 없애버리자고 오신 분이죠. 그런데 콘스탄티누스의 도마와 야합한 카다콤 기독교가 기독교의 세례를 죽음이 아니라 통과의례(성례)로 치부하고 산 예수의 몸에다가 석고를 발라 화석(化石)을 만들고 말았어요. 그러니 생명의 분별력을 잃은 기독교가 에베소 종교회의(AD 431년)에서 네스토리우스를 정죄 추방하고 아라비아 무함마드가 일어나서 기독교를 핍박하고 학대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죽은 거나 다름없지요. 기독교가 살아나려면 요한복음이 기독교의 길잡이가 되어야 하는데….”
알로펜은 말끝을 흐렸다. 그의 얼굴에는 슬픔이 번지고 있었다. 그는 안토니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는다.
“안토니….”
알로펜은 안토니의 손을 잡을 뿐 아니라 그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무슨 말을 더 할 듯했으나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주교님, 아니 스승님! 제가 더 배우겠습니다.”
안토니가 매우 조심스럽게 말했다.
“청수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불교가 석가모니 부처 이후 천축국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아소카 왕의 불심에 따라서 다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불교는 승려 중심의 소승불교가 주축을 이루었죠. 그러나 다시 불교는 대승불교로 모습을 바꿉니다. 지금 저희는 불교와 기독교의 구도자들이 함께 모여서 소승과 대승, 신 중심에서 인·신 중심으로의 종교까지로 감히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알로펜 주교님의 큰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말씀 중에 ‘세례 후 세례’를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참 좋습니다. 저희 불가(佛家)에서도 ‘죽음의 죽음’ 또는 ‘죽음 후 죽음’이 있는데 같은 가르침 같군요. 세례 후에는 존재의 변화가 와야지 자기 질서 속의 관행으로 치부한다면 그런 행위가 구도행일 수가 없겠죠.”
“아이고, 청수 선사님! 몰라봤습니다. 날카로우시군요.”
안토니가 갑자기 청수의 손을 잡고 기뻐했다.

“왜 그러세요. 내가 뭐 실수했나요?”
청수가 능청을 떨었다.
“실수라니요. 말씀 듣는 모습이 예리하십니다. 주교님은 늘 기독교가 바울의 세례(갈 2:20) 후 그 다음 갈 길을 놓쳐서 실패했다고 하셨어요.”
“그러시죠. 저희 불교도 바로 거기서 길을 잃습니다. 구했느냐, 얻었느냐, 구하고 얻었으면 다음 자리로 건너갈 때 구하고 얻은 것을 제 자리에 두고 가야지 그것이 자기 것인 줄 알고 가지고 가려다가 탐욕의 수렁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바울은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갈 2:20)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마치 자기가 자기의 공덕을 쌓기 위해서 죽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살려놓으니까 죽었던 자리에 자신이 그대로 버티고 있습니다. 자기 죽은 그 자리는 예수의 자리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했던 십자가는 죄값으로 죽은 자리이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도 다시 살아난 이후의 무대(세계)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몫입니다.”
“그러나 잘 안 되는 것은 왜 그럴까요?”
마의가 묻는다.

“뭐가 잘 안되나요?”
“왜 사람들이 자기 자리 발견을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으나 도마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어요. ‘내가’를 ‘예수가’로 묶어버렸을 때 기독교는 예수를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었으며 기독교는 피할 수 없이 우상종교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뭐요? 우상종교!”
안토니가 펄쩍 뛴다. 알로펜은 마의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본다.
“마의!”
알로펜이 조용히 부른다.

“네, 스승님.”
“당신의 깨달음에 복이 있습니다.”
“네, 스승님.”
마의는 알로펜의 칭찬을 들으면서도 안토니의 추가반응을 주시했다. 안토니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우상, 우상, 우상…, 을 거푸 되뇄다.
“마의, 난 아직 다 모르겠소.”
“안토니 사제님, 서두르지 맙시다. 우리는 다 지금 그분 안에, 또 주님 앞에 있습니다. 축복의 날입니다.”
“그럴까요?”
아직도 안토니는 쓴 물 마신 얼굴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상에게 속지요. 우상과 하나님, 우상과 부처님의 간격을 분별할 수 있으면 그 길에 선 자이죠.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는데 길을 모르는 도마는 그 길을 찾을 수가 없지요.”
마리아 교수가 말했다. 그녀는 언제 들어왔는가? 그녀는 능청스러우리만큼 태연한 모습이었다.
“언제 오셨어요. 마리아 교수님! 교수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저 그동안 뭘 배웠죠?”
“뭘, 배우시기는요. 까다로운 선생님 대신 주교님께 고생고생 배우셨으니 곧 때가 올 것입니다.”
“정말요? 교수님!”
“그래요. 조금 더 기다리시면 진리가 사제님을 찾아가실 겁니다.”
“확실합니까?”
“지금 아주 가까운 거리에 계시는군요.”
“날 놀리지 마세요. 교수님!”
알로펜이 웃는다. 마의와 청수도 따라서 웃는다.

 

작가 조효근 : 1976년 『월간 문학』 신인상 소설 등단.
대학에서 세계교회사 및 종교사 38년째 강의.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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