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넘어 인간다운 삶 돕는 희망선교회 대표 윤형영 목사

즐겁게 야구놀이 하는 맹아들 보며 ‘장애=불행’ 편견 깨져
복음만이 장애 딛고 삶의 변화 가능, 영혼에 관심 가져야


 

   
 

“장애는 키가 크고 작고, 얼굴이 잘 생기고 못 생기고 등 각자가 지닌 특성의 차이일 뿐인데 사회적으로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비정상’으로 분류하고 무능력자라고 낙인찍어 내모는 편견 때문에 장애인들의 불행은 가중되고 있습니다. 다 같은 인간으로 보지 못하는 편견과 무지가 진짜 장애지요. 이는 공생의 순리를 역행하는 것입니다.”

맹아(盲兒)들의 웃음소리 가득한 놀이현장을 보면서 장애인을 도와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던 자신이야말로 진실을 보지 못하는 ‘눈 뜬 장애인’이란 것을 알게 된 날, 윤형영 목사(55)는 30년이 넘도록 장애인들에게 ‘코 꿰인’ 삶을 살게 될 걸 알았을까? 장애인들의 아픔과 고통을 대변하는 일에 나서온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비산1동의 장애인 복지 전문기관 희망선교회(이사장 서종로 장로, www.elpis21.org) 대표 윤형영 목사의 사역 핵심은 “장애인들의 인간다운 삶”이다. 비장애인으로서 장애인의 편에 서서 살아온 그는 지금도 사회와 장애인 스스로의 장애에 대한 ‘편견 깨기’를 시도하고 있다.

# 장애인 울리는 진짜 장애

“배트(bat)는 손에 들었는데 날아다니는 공이 없어요. 가만히 보고 있자니 큰 공을 바닥에 놓고 굴리는데 그 안에 방울이 들어있어 소리를 듣고 치는 겁니다. 깔깔거리면서 즐겁게 야구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깜짝 놀랐죠.”

맹인이 야구를 한다? 더군다나 그토록 즐거워하면서? 봉사를 위해 서울맹아학교를 찾은 첫날, 맹아들의 야구놀이를 보면서 윤 목사는 장애인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어려운 불행한 존재라고 여겼던 편견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어두컴컴한 기숙사에서는 아무 불편 없이 살아가는 그들과 달리 이리저리 부딪히며 거동조차 어려운 자신이 오히려 장애인 같았다.

1980년에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광주사태가 발발해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고 거리에서도 젊은이들에 대한 통제가 심했다. 많은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에 가담했지만 그것도 마뜩찮아 찾은 곳이 맹아학교였다. 젊은이로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야겠다는 의협심에서였지만 첫날부터 윤 목사는 여지없이 깨졌다. 그리고 오히려 그곳에서 배우는 새로운 세상은 ‘이건 뭐지?’ 하는 의구심으로 자꾸만 젊은 지성을 자극했다.

아이들의 학습보조와 빨래, 청소 등 생활보조가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는데 가장 난감했던 것은 자연 수업 시간에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에게 색깔을 설명하는 일이었다. 도무지 가르칠 방법을 찾을 수 없어 반대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파랗다’는 의미를 아는 사람?” 돌아온 아이들의 대답. “여름에 더울 때 시원한 바람 같은 색이요!” 두 눈으로 보는 자신보다 더 정확하고 다채롭게 느끼는 아이들을 통해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또 우리 사회 속에서 장애를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으로 나누는 기준이 얼마나 편협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체감했다. 그 후로 사회 속에서 편견이 빚어내는 ‘진짜 장애’를 거둬내야겠다는 일념으로 달려왔다.

# 장애의 장벽을 넘다

군 제대 후 성결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장애인 단체에서 일하면서 실무를 익혔다. 1990년 11월, ‘누구나 똑같은 인격체로 살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희망선교회와 이듬해 희망장애인교회(현재 희망인교회)를 창립했다. 장애인을 똑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장애인들의 ‘참 친구’가 되어준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우선 집에서 머무는 재가(在家) 장애인들을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 처음부터 시도한 것이 3박4일간 진행하는 캠프였다. 올해도 6월 30일부터 7월 3일까지 제주도에서 갖는다. 장애인들과의 장거리 여행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장애인 스스로나 가족들부터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취지로 강행해왔다. 그동안 중국, 일본, 태국, 캄보디아 등 휠체어를 이끌고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 희망선교회 장애인 캠프. 중국 북경 이화원


특히 중국은 장애인 편의시설이 미비해 애를 먹었다. 여행은 장애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줄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는 모처럼 쉼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비용의 60%는 장애인이 부담하고 나머지는 희망선교회가 충당해왔다.

무료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윤 목사는 “크고 작은 차이일 뿐 어려움을 견디고 이기며 사는 것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마찬가지”라며 “자신을 불행한 존재라고 여기고 무조건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은 장애인 스스로도 탈피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어려운 경우 99%를 채워주지만, 1%라도 자신의 역할을 책임지도록 하고 있다.

또 장애인 한 사람으로 인해 가정이 해체될 위기에 놓인 것을 보고 1992년에 장애인 생활공간인 ‘희망복지홈’을 만들어 복지사가 함께 생활하며 장애인들끼리 새롭게 가족의 연을 맺고 살아갈 수 있도록 했고, 장애인들 대부분이 글씨를 깨치지 못한 것을 보고 장애를 딛고 사회인으로 서기 위해서는 교육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1994년에 희망특수어린이집을 개원했다.

“한번은 전화가 걸려왔는데 용건과 이름, 집 주소, 세 마디 물어보는데 15분이 걸렸어요. 다음날 어머니와 통화를 시도해 20대 초반의 남성이고 장애로 인해 태어나서 집밖에 나가본 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TV 자막으로 캠프 소식을 알고 전화 한 것이었어요. 집으로 찾아가보니 몸무게가 120kg인데 다리 무게는 10kg밖에 안 되는 난감한 상황이더라고요.”

불가능하다며 만류하는 가족들을 설득해 그를 캠프에 참가시켰고, 그 후 꾸준히 교회에 출석했다. 교회에 오면 휠체어 탑승 금지, 교회에서만이라도 운동할 수 있도록 했다. 진심으로 대하는 속에서 그의 가슴에 신앙이 깊게 박힌 것은 물론이고 의사소통조차 어렵던 그는 살을 빼고 직업훈련에 참가해 다른 지역으로 취직해 갔다. 1년 뒤 “희망선교회 덕분에 인간답게 살게 되었다”며 감사헌금을 가지고 찾아왔다.

# 장애인 없는 교회

교회 이야기가 나오자 윤 목사의 목소리가 격앙됐다. 장애에 대한 사회의 편견은 그렇다 치더라도 교회마저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심각하게 어긋난 모습이라는 것이다.

“복음은 장애인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입니다. 인간적인 위로는 한계가 있어요. 복음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소망을 갖고 예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장애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에 대해 구제 대상으로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선교 대상으로 보고 인격적으로 대해달라는 것입니다.”

윤 목사는 처음엔 장애인들을 집 근처 교회와 연계해 주었지만 편의시설 문제와 함께 사회와 다르지 않은 편견을 경험하면서 신앙생활을 오래도록 지속하지 못하자 결국 장애인을 위한 교회를 개척했던 것을 설명하면서 그런 현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안타까워했다.

   
▲ 희망장애인복지관 전경


희망인교회에는 다양한 장애를 가진 이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린다. 초기에는 성찬식 한 번 하는 것도 포도주 한 잔 더 먹겠다고 떼를 부리거나 떡 덩이를 움켜쥐고 놓지 않아 곤욕을 치르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사람들은 윤 목사에게 종종 묻는다. “정신지체 장애인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느냐” 라고. 윤 목사는 “인간의 생각과 사고 안에 갇히는 분이라면 하나님일 수 없다”며 희망선교회를 이끄는 동안 무수히 경험했던 계산과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손길을 고백, “1:1 관계에서 만나는 ‘나의 하나님’을 인간의 잣대로 맞다 틀리다 말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윤 목사는 “크고 작음, 강함과 약함이 조화되는 공생관계를 잘 이뤄갈 때 비로소 좋은 사회가 된다”라며 장애·비장애가 함께 어우러짐이 자연스러운 세상을 향해 지치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


정찬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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