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21세기 이렇게 대비한다 / 37-21

나사렛 이단의 세례를 받고 태어난 기독교는 ‘이단’이라는 용어에 매우 익숙하다. 서둘러 이단이라 정죄하고 스스로가 불편해서 또 안타까워한다.

요즘은 기독교가 작심하고 큰 이단을 하나 발견했다. 그동안 함께 대한의 토양에서 살면서 ‘이단 호칭’ 단계까지는 삼가면서 살아오던 로마 가톨릭과 기독교(신교) 간에 드디어 감정의 단계에 다다르고 있다.

시비를 비껴갈 수 없는 교리적 차별성을 갖고 있는 신·구 기독교 간에 드디어 시비와 논쟁의 단계에 이른 것 같다.

차라리 잘 되었다. 기독교 역사 과정을 1517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차별성 때문에 시비가 되는 두 종파 간에 교리나 성례 또는 제 관습에 이르기까지 신학과 교리적인 시비를 해 보라. 서로가 위치한 자기 지점에서 어느 누가 더 예수께 가까운가를 셈해 보라.

신교가 구교인 가톨릭의 잘못을 지적하라. 그리고 또 구교인 가톨릭이 신교의 과오를 지적해 보라. 선의의 신학과 교리적인 논쟁(논전)을 통해서 서로의 모습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관계에서 역사적으로 섣부른 분열이 잘 된 일이었나? 사실상 분열까지는 가지 않으려 했으나 분열현상을 서로가 인정하는 사후 결과를 낳았다.

이 현상을 서로 인정하고 분열 500년이 가까운 시점에서 서로가 반성하면서 두 교단 중 어느 교단이 ‘역사적인 기독교’를 더 많이 보존하고 있는가를 살피고 헤아려보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두 교파가 16세기 식 싸움이나 하려 하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신학, 교리, 역사적 자기 검증을 해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 우리는 16세기에 서로 나뉘었던가? 그 길만이 최선이었던가? 그때 그 감정은 모두 신적인 은혜로 보답 받을 자신감이 있었던가에 대해서도 양심적인 고백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때 신·구교는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이 주신 시련을 감당하려 했으나 힘의 한계에 부딪쳤었다고 함이 어떨지….

16세기 그때 가톨릭은 많은 부분 개혁자들의 요구에 자기들 생각을 맞춰보려 했었다. 다만 수도원이나 수녀원, 그리고 주교좌로 형성된 교권의 틀은 유지하되 성례나 제례에 대한 충분한 토론을 통해서 양보할 것은 쉽게 양보해 볼 계획을 세웠었다.

침례 또는 세례의 문제도 불문율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협상 가능성이 있었다. 사실, 신구교의 양심은 양측 모두 16세기 초 바로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순수했으니까.

그래서 21세기인 지금 가톨릭과 신교는 정직한 마음 자세로 상호개혁시대를 위하여 자기반성을 해 봄직 할 것 같다.

다시 말한다. 이단 정죄로 상호관계를 끝내지 말고 우리는 서로가 얼마나 다른가, 또 얼마쯤은 같은가를 밝히고 좋은 쪽으로 기준을 삼아서 서로가 지켜주는 순수와 경건으로 사단의 세력들로부터 함께 교회를 지켜낼 수는 없을까?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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