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소재지에 기틀 든든히 다진 전북 순창 동계교회(이봉학 목사)

교회, 사택, 복지관 잇따라 지을 정도로 놀라운 부흥 이뤄
건축 헌금 위해 집에 있던 금가락지도 아낌없이 바치는 순수
젊은층 없는 농촌교회, 적절한 후임자 통해 새 힘 일어나길 기도


60년의 역사 속에서 지역주민들의 신앙과 삶의 필요를 채워주며, 지역에서 제 몫을 다하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 역사의 절반인 30년을 동계교회는 이봉학 목사(69)가 이끌어 가고 있다.

예배당 짓다보니 30년이 훌쩍

   
 

이봉학 목사가 동계교회에 1984년에 부임했을 때는 몇 십 명의 신자들과 낡은 기와지붕으로 지은 54평의 예배당 건물, 오래된 사택 10여 평, 재래식 화장실이 전부였다. 워낙 낡아서 교회 지붕에서는 비가 새고 우물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아 샘을 새로 파서 물을 조달했다. 사택이 있었지만 부엌도 없고 천장에서 쥐가 기어다니다 방바닥으로 떨어져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 목사는 두고 볼 수 없어서 교회 지붕과 사택을 수리하여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다. 그러면서 전도하고 양육하는 일에 꾸준히 노력했다.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다. 신자들과 힘을 합해 교회 옆 보건소 건물을 매입하는가 하면 교회 뒷집과 밭을 매입하여 교회 대지 800여 평을 조성했다.

그렇게 땅이 준비되자 동계교회에 부임하기 전에 두 교회를 지어 본 경험이 있던 이봉학 목사는 예배당을 지어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250평으로 2층짜리 예배당을 건축한 데 이어 사택(52평)을 건축하고, 그 옆으로 150평 규모로 복지관을 지었다.

“3개 건물을 짓다보니 30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마다 목회자부터 성도들까지 힘을 하나로 합해 열심과 기도로 임했다. 성도들은 고이 간직했던 금들도 모두 가지고 나와 예배당 짓는 데 힘을 보탰다. 박순덕 사모의 손가락에 끼어있던 금가락지도 그때 바쳐졌다. 건물이 지어질 때마다 인부들의 식사는 모두 사모와 신자들이 친히 담당했다. 인부들이 한 끼도 밖에 나가서 식사하지 않을 정도로 정성을 다해 준비했다.

 

건축단계에서 일꾼들이 속 썩이고, 돈을 주지 못해 마음이 조마조마하게 되는 어려움을 이봉학 목사라고 피해갈 수 없었다. 이 목사는 만성신부전증과 통풍으로 고생하면서도 일을 감독하고 지휘해야 하는 책임자의 몫을 톡톡히 감내했다.

“성도들이 한마음이 되어 건축하는 일에 마음과 힘을 다해 준 것이 너무나 감사하지요. 그런 덕분에 건축으로 인한 빚 하나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됐습니다.”

이 목사가 부임할 당시에는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생활비를 드리기도 버거운 여건이었으나 부임 이후에는 장년부 200명, 주일학생도 100명을 웃돌 정도인가 하면 학생회나 청년회도 수십 명씩 모일 정도로 부흥했다.

그런데도 이봉학 목사는 해놓은 일이 별로 없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가버린 채 은퇴를 앞두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성경적인 교회로 자리잡다

사실 이 목사가 동계교회에 부임했을 당시 어려움이 있었다. 30년 된 교회에 16명의 목회자가 다녀갔을 정도였으니 평탄하지 않았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상을 보니 장로 한 사람이 목회자를 좌지우지하는 풍토였다. 이봉학 목사는 성경적으로 잘 성장하려면 이런 질서로는 안 된다 싶어서 강경하게 나갔다. 예상대로 그 장로는 이것저것 가지고 트집을 잡는가 하면 지방회에 나가서도 험담하며 모함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오죽하면 이봉학 목사가 ‘변명하기 싫고, 부끄러워’ 지방회에 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싸우기 싫어서 이 목사도 떠나고 싶었다. 너무 속이 상해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지방회에 가서 그 장로의 말이 사실이 아닌 것을 대신 설명하러 다니며 이 목사를 붙잡았다. 목사님이 계셔야 한다고. 이 목사는 이 교회로서는 어차피 한번은 넘어야 할 산임을 알고 신자들과 함께 이겨나갔다. 그러자 그 장로가 버티지 못하고 20여 명의 신자들을 데리고 나가서 인근에 개척을 했다(그 이후 그 가정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고, 나갔던 신자들도 다시 되돌아왔다).

   
▲ 동계교회 전경. 우측이 복지관 건물, 그 옆으로 사택 건물이 있다.

이 목사는 교회는 말씀 중심으로 바로 서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성경대로 가르치고 예배하는 일에 몰두했다. 돈이 좀 있다고 신자 한두 사람이 교회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바르게 가르치는 목회자를 중심으로 교회가 반석 위에 세워져 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목회 과정에서 서너 교회에서 청빙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성도들이 간곡히 붙들었고, 건축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청빙을 고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봉학 목사는 농촌교회인 동계교회에서 떠나지 않고 30년을 한결같이 목회에 임했다.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농촌교회를 떠나지 않고 목회해 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부흥기를 지나고 현실을 보니

동계 면 소재지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동계교회는 사회 현상에 따라 10여 년 전부터는 젊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자 인원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그래도 동계교회는 순창군 80여 개의 교회 중에 시골교회로서는 가장 큰 부흥을 이룬 교회로 손꼽힌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교회들 모두가 그렇듯이 동계교회도 침체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보인다.

건축을 거의 다 마치고 사역에 본격적으로 매진하려는 단계에서 젊은 신자들의 봉사가 메워지지 않자 노인대학이나 복지관 운영 등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목사님이 앞장서서 이끌어나가시면 옆에서 함께 힘을 보태줄 수 있는 젊은 신자들이 있어야 하는데, 일꾼들이 너무 부족하다보니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박순덕 사모도 아쉬운지 이 목사의 얘기를 거들었다.

“하다못해 노인대학을 하면 프로그램이야 어떻게든 강사를 섭외하여 할 수 있겠지만 식사를 제공해야 하는데, 저도 나이가 들어서 혼자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봉학 목사는 양적인 부흥이 더 이상 이뤄지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보였다.

그렇지만 지금도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하려고 노력한다. 매월 10만원씩 5개 교회에 선교비를 보내는가 하면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 15명에게 한 주에 한 번씩 밑반찬을 만들어 식사하시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데 부흥은 안 되고, 함께 동역했던 어르신들 중에 요양병원으로, 하늘나라로 가시는 분들이 증가해 사실 마음 한켠이 힘들다고 한다.

“올해 상반기에만 해도 그런 분이 7명이나 됩니다. 인원이 감소하는 것도 힘들지만 헤어져야 하는 마음이 더 힘듭니다.”

내년 은퇴를 앞두고 있는 이봉학 목사는 요즘 후임자 문제를 놓고 기도 중이다. 농촌에도 젊은 사역자가 투입이 되어 특수작물을 활용해 함께 농사하는 목회자면 좋겠고, 은사를 통해 시골 노인들의 신앙을 다잡아줄 수 있는 역할 등 동계교회를 부흥으로 이끌 수 있는 적합한 인물을 고대하는 것이다.

교회 앞마당에서 기념촬영을 하자고 했더니 마치 10대 소녀 소년처럼 두 분이 수줍게 웃는다. 그 뒤로 보이는 동계교회 예배당, 사택, 복지관 건물 3동은 보이는 건물만이 아닌, 동계교회 성도들과 이봉학 목사 부부의 하나님께 바치는 희노애락의 노래였음이 인터뷰를 마치고 난 후에 귓가에 은은히 들려왔다.

   
▲ 박순자 사모와 이봉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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