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기독교(景敎) _ 36

   
▲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로 가는 길 언덕에서 선 필자.

늘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면 마지막 결론은 울고 가슴을 치거나 비명을 지르면서 자기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치 이것이 은혜의 가치인가 하면서.
그러나 알로펜은 별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수 십자가 대속죄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반응은 먼저 무한 겸손이다. 그의 품성이 아름다우리만큼 겸손지향으로 바뀐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가 사신다(갈 2:20)는 말씀을 깊이 접근해 본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내 몸, 그리고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산다는 논리를 확보한 바울의 자세에서는 무한 겸손과 절대자아의 부정이 가능하다. 내 안에 예수가 산다고 선언하여 자기를 신적인 존재로 편입시킨다.

또 달리, 바울의 성령론을 받아들이면 나는 성령이 사시는 집, 오직 성령의 터전으로 확보된 내 육신은 예수 십자가를 통하여 완벽한 신성에 참여하고,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면전까지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울의 논리이다. 그리고 아시아 기독교 시대의 맹주가 되려 하는 알로펜의 기독론이고 성령론이다.

알로펜은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가 로마식 교권에게 철저하게 학대당하고 버림받았던 시대의 반복을 차단하기 원했다. 유럽 기독교와 네스토리우스 기독교까지 겸하여 극복하는 미래형 새 기독교를 목표하고 있다.

알로펜은 집회 현장을 넌지시 살펴보았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몇 사람이 눈물 훌쩍이면서 기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강당이 조용하다. 저녁 시간 후에도 기도회와 토론회가 겸해진다고 안토니에게 알리고 알로펜은 서재로 돌아왔다.

저녁 모임이었다. 마리아 교수가 강단에 나섰다. 어머니의 모습처럼 자애롭다고나 할까. 마리아의 표정에는 넉넉한 여유와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며 이 믿음의 각오에 변함이 없으신 줄 압니다. 그런 우리는 신학적인 기독 정리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로마제국 교회로부터 정죄되어 추방된 네스토리우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신학적 입장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알로펜 주교의 창의적 신학이론의 보충을 필요로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로마제국 교회의 이단 정죄는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가 기독론에서 얼마간의 빌미를 주었고, 그것을 약점 삼아 파고들었던 로마주교 관구의 심부름꾼인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키릴로스에게 지적된 것입니다. 그러나 AD 431년 에베소 세계회의 때는 기독교 신학이 발전적 과정에 있었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기독론에 있어서나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세계 어느 교구들에게도 뒤지지 않아야 합니다.

즉, 신학의 완결성과 합리성은 알로펜 주교의 주요 방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가능하면 오늘 이 밤이 가기 전에 자신의 신학과 교리학에 확실한 견해를 확보해야 합니다. 어디, 어느 분이 먼저 우리들의 기독론을 말씀해 보시렵니까?”

“네, 저는 드보라 수녀입니다. 저는 예수께서 죽으실 때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과의 동반죽음과 동반부활의 아침을 맞이한 이후 저는 예수 십자가의 대속죄 은혜를 입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잘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연속적으로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형제자매들에게 임하는 것을 믿습니다.”

언제 나왔는지 알로펜 주교가 마리아의 사회봉을 대신 쥐고 드보라의 말을 보충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 은혜의 연속성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가 십자가 은혜의 대속을 말할 때에 주 예수가 준비하고 행동하신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는다 하고 은혜의 증인이 아멘으로 화답해 주는 순간 십자가의 대속죄는 신비한 힘의 교감을 성취해 냅니다. 여기서 십자가 대속론과 성령의 동시동반의 사건이 되어 내가 예수 십자가의 대속자가 되었음을 성령이 밝히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대속죄를 힘입은 그 사람에게 성령께서 즉시 달려오사 내주하십니다. 사람아, 은혜를 입은 사람아, 성령의 사람 되어 그대는 거룩한 집이요 성령의 처소가 되었으니 당신은 성령 안에서 성자와 성부를 동시에 모실 수 있는 삼위일체의 현장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네, 옳습니다. 주교님 말씀에 아멘 하여 동감을 표합니다.”
마리아 교수의 말이다.

“여러분, 주교님이나 마리아 교수님의 말씀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거나 믿어지지 않거든 말씀해 주세요. 나 안토니가 밤을 새워서라도 함께 기도해 드릴 마음이 있습니다.”
“…….”
안토니의 발언 요청에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앞으로도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에 대해 의문이 있는 사람은 안토니 사제나 마리아 교수님의 도움을 받으세요. 그리고 여기 내시부 키세로 님이 와 계십니까?”
“네, 저 여기 있습니다.”
“네, 좋습니다. 금번에 페르시아 피난민들 중 우리 교회에 남겠다는 사람들이 파악되었습니까?”
“네, 그 문제는 제가 확인했습니다. 잠시 후에 별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안토니의 말이었다.

“좋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학과 교리의 핵심을 다시 정리하고 다짐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당나라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우리는 이 사정을 알고 생활해야 합니다.”
“전쟁 상대는 어느 나라입니까?”
키세로의 물음이다.
“고구려와의 전쟁입니다. 고구려가 쳐들어온 것이 아니라 당나라 태종께서 고구려의 버릇을 고쳐주겠노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강한 나라라고 하던데…….”
“그럼요. 당나라에게 망한 수나라가 고구려를 건드렸다가 백만 대군을 거의 모두 잃고 수양제가 무릎을 꿇었답니다.”
“안토니 사제님, 그럼 당나라가 혹시라도…….”
“그런 말은 삼가세요.”
마리아가 키세로와 안토니에게 주의를 주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나라의 형편과 관계없이 당나라 각지에 복음을 본격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저녁 늦은 시간, 알로펜과 마리아가 마주 앉았다.

“주교님, 피곤해 보입니다.”
“나도 늙나봅니다. 몸이 전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로마기독교보다 더 강한 기독교를 만들어 낼 힘은 있습니다. 당나라가 고구려와 전쟁을 한다지만 지금의 국력과 전 왕조인 수나라 국력과는 차이가 크다더군요. 고구려와의 전쟁은 어른과 아이의 싸움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 말을 믿으십니까? 당나라가 강하다 하지만 고구려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주교님, 신라로 보낼 피루즈 왕자 문제는 어떤가요? 신라가 바로 고구려에 인접한 나라라고 하던데…….”
“아닙니다. 오히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군을 형성할 거라더군요.”
“아, 그래요.”

“그리고 마리아여! 내가 가까운 시일 안에 쵸코에 한 번 다녀와야 하겠는데……?”
“아니, 안됩니다. 이제 긴 여행은 못하십니다. 당나라에서 많은 지도자를 길러내야 합니다. 서역이나 사마르칸트에 대해서도 안토니 사제에게 맡기세요.”
“왜 그래요. 내가 여행을 하지 못할 만큼 늙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뭡니까?”“주교님은 날마다 제자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왜, 왜요……?”
“보면 모르세요? 당나라는 우리 앞에 마치 호랑이가 아가리를 벌린 것처럼 위험한 존재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마리아를 겁주었는지 나는 모르겠소.”
알로펜은 차츰 긴장하면서 마리아의 의견을 더 들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주교님, 중국은 성격적으로 음흉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를 집어삼킬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상적으로 도교나 유교사상은 물론 지난 몇 백 년 동안 인도불교를 중국식으로 만들어 버린 나라입니다. 잘 아시잖아요.”
“그래요. 중국이 지닌 종교사상적인 면에서의 친화력은 무섭지요. 그러나 나는 그 점에 있어서 중국 선교의 매력을 느낍니다.”
“네, 뭐라고요?”
“중국은 잡아먹는 즐거움은 아는지 몰라도 잡아먹히는 묘는 아직 모릅니다. 우리 기독교는 죽어주는 삶에 능합니다. 죽어주지요. 저는 이미 중국에게 먹히는 기독교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먹고 소화시켜냈는지 몰라도 기독교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먹혀 죽어서 살아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을 과감하게 지도하여 중국사회나 중국 종교들과 더욱 친하게 지내다가 그들과 하나 되는 미덕을 발휘할 것입니다. 반드시…….”
 

 

•작가 조효근 : 1976년 『월간 문학』 신인상 소설 등단.
대학에서 세계교회사 및 종교사 38년째 강의.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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