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여! 우리들 스스로 품위를 가다듬고, 이웃을 보살필 줄도 알고, 슬픔을 당한 자들을 위로할 줄도 알게 하라. 하루 속히 천하 만민의 칭송을 받을 수 있는 몸 가꾸기를 서두르라.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사 40:1~2) 인간이 지닌 근원적 죄악을 해결한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요 그 감격의 선언이다.

상호 파문을 끝내고 용서를 받으라. 광복절 전후로 가톨릭 교황이 4박5일간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12억 명의 가톨릭 신도들이 100여개 나라 이상, 세계 곳곳에 살고 있으니 자기의 제자들 또는 신도들 중심의 실무방문이겠으나 금번 한국교회가 교황에게 보여준 환영 그리고 자기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내놓고 도와 달라 하는 데서 고맙다는 생각과 더불어 교황적 기능보다 못할 것이 없는 한국교회는 그럼 무엇이었느냐, 하는 자괴감 때문에 부끄럽기도 했다.

교황을 찾아가서 울며 호소하는 세월호 유족들의 문제는 낯뜨거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사건 발생 후 100여일이 지났는데 정부나 우리 사회의 기능을 동원하여 범국가적인 재난 처리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었다.

유족들 자신은 물론 일부 돕는 이들이 단식을 하거나 교황을 찾아가서 눈물로 호소하는 등 도무지 그럼 우리는 무엇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자들인가.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보다 더 많은 신자가 있고, 그들의 능동적인 사회성이 뛰어난데도 불구하고 어느 교회 어느 목사를 세월호 유족들이 찾아와서 도와 달라고 했다는 소식 하나도 듣지 못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선지자에게 떨어졌다. 위로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위로와 용서는 하나일까?

현재 한국의 상황은 위로와 용서가 병행하는 시기인 것 같다. 먼저 위로를 받아야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고, 그때 거기서 생성하는 용서받은 자의 힘의 분량을 확보할 수 있다.

용서를 선포한다. 400년 전 임진왜란, 100여년 전 한일합방은 대한 사람의 기개를 모조리 꺾어버리고 상전과 하인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꼴이었다가 간신히 해방공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 제정신을 차려가고 있는 중이다.

해방을 주셨으나 준비 없어서 남북 분단이 70년이 되어가고, 가난을 극복하는 은혜는 진정한 부자노릇을 할 만큼 또 준비되지 못했다. 가톨릭 5백만명 주실 때, 기독교(신교)는 1천만명 주셨으나 준비되지 못하여 촌장 만큼한 어른 한 사람 모시지 못했다.

한국교회여, 어떻게 하니까 힘 없고 곤고한 이들이 감동하던가? 무엇을 주니까 저들이 달게 받고, 또 그로 말미암아 기뻐 뛰던가?

교회여! 우리들 스스로 품위를 가다듬고, 이웃을 보살필 줄도 알고, 슬픔을 당한 자들을 위로할 줄도 알게 하라. 하루 속히 천하 만민의 칭송을 받을 수 있는 몸 가꾸기를 서두르라. 교회를 향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있는 내(우리) 형제 자매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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