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요르단^이스라엘 선교여행기 ⑧  (끝)

팔레스타인과 아라비아 사막엔 이스마엘, 에서, 모압, 암몬 자손들이 중심
 
 페트라와 카락성을 거치면서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다른 이들은 성지순례차 이스라엘이나 요르단, 그리고 시나이 사막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다가 귀국하는지, 그러나 나의 발걸음은 언제나 무겁다.
내가 이 사막, 이 성지에 나타나면 저들은 내게 말을 걸어온다. `조 목사야! 너희들의 예수는 언제쯤 우리들의 신원을 들어준다더냐? 우리가 이 사막에서 끝내 버린 자식들이 되어 영원한 저주에 갇혀서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무슨 말인고 하니, 팔레스타인과 아라비아 사막의 사람들은 이스마엘, 에서, 모압과 암몬의 자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저들은 다함께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고, 형제들이다. 그런데, 저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죄 때문에 버림 받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맏아들 이스마엘의 경우, 아비 아브람과 어미 사라가 충분한 합의와 양해 아래 새 어미 하갈을 통해서 태어난 죄밖에 없는 이스마엘, 약속의 자손으로 인치는 표로서 아비 아브라함과 같은 날 ‘할례’까지 받은 아브라함 가문에서 법적으로나 또 혈통으로도 빈틈없는 상속자(후사)인 이스마엘이 아무런 이유없이 어느날 갑자기, 내쫓는다는 말 한마디 없이 어미와 함께 사막에 버림을 받았지 않은가?
어찌하여 나와 내 어미를 도둑 물건 들통나려 하니까 내다 버리듯이 왜 버린 겁니까? 우리를 버리고 당신(아버지의) 정의(正義)는 별도로 세우겠다는 것입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 이스마엘이 무죄이면 아브 아버지여 당신도 무죄(無罪)일 것이며 내가 유죄(有罪)이면 아버지 아브라함도….
이 경우, 우리는 중간 역할을 똑바로 해야 한다. 에서 또한 그의 아비 이삭에게 항변이 있다. 내게 축복하소서. 내가 에서입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대로 산에 나가서 살진 짐승을 잡아서 맛있게 요리했습니다. 잡수시고 축복하소서.
더는 없다. 너에게 줄 축복은 야곱이 그 어미, 곧 네 어미 리브가와 공모하여 네게 줄 축복을 도적했느니라. 어찌하느냐, 내 아들아.
안타까운 일. 에서는 날벼락을 만났다. 생각 짧은 사람들은 하는 말, 에서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은 놈이라고 하는데, 그런 소리하지 마소. 장자권이 팥죽 한 그릇에 팔릴 수 있는 성경의 근거가 없소. 그리고, 팥죽 한 그릇과 장자권을 바꿀 수 있다는 자는 참으로 악질이고 사기꾼이 됩니다. 그것을 자기 동복형, 쌍둥이 형에게 어찌 그같은 야비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뒤죽박죽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가닥 정리해 둔 생각이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 가계를 통해서 메시아를 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것이다. 사단의 방해가 극심한 때에 이 일을 약속 받은 아브라함은(인간의 한계 때문에) 무리한 행동을 얼마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이삭’을 통해서 ‘약속’의 혈통, 인류 구원사를 열겠다는 뜻은 이해한다. 다윗에게서 성취되는 언약의 중간 성취까지를 보아도,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혈족을 대표하는 맏아들 노릇을 해도 이삭은 ‘약속’의 가계를 이어갈 수 있다.
조선조 왕통을 보면, 우선 태종의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 양녕대군이 왕통을 잇고자 하는 생각이 없어서 사양하자, 효령대군에게 눈을 돌렸으나 효령은 불가(佛家)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충녕대군이 왕통을 이어 조선조 4대 임금 세종대왕이 되어 나라를 잘 이끌었다. 이런 논리로 한다면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집안에서 충분히 아들 행세를 하고, 이삭은 약속의 계시에 동반해 가면 되는 것이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한 집안에서 형제애를 나눈다면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 또한 충분히 `약속'이행은 별개로 지켜가면서도 가문의 명예를 이어갈 수 있다.
필자는 이 점을 매우 중하게 생각한다.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역사 위의 갈등은 오늘날 세계사의 갈등이고, 또 자칫 3차(핵) 세계대전이 그들의 후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사이의 분쟁 때문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불안하고 두렵다.
그래서 서로를 인정하고, 4천여 년 전의 역사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양해하는 자세를 취하면 응어리진 미움과 갈등의 해빙기가 올 수 있다고 믿는다.
이스마엘과 에서의 집안은 오늘의 아라비아에서 수천 년 살면서 버림받은 자들의 설움 속에 살았다. 또 당사자들은 그런 그들의 집안 사정이라고 해도 그 후손들은 무슨 죄인가? 왜, 후손들까지 마치 〈연좌제〉에 묶인 자들처럼 수천여 년 동안 저주의 자식들로 살아야 하는가?
분명히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성경에 써 있다고 해서 이스마엘 자손이 어떻구, 에돔 자손이 어쩌구…, 하면서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가 똑똑한 조상을 가졌으면 신약성경 속에 무죄한 자들의 죄를 분별하는 법을 가르쳤을 터인데 그리 되지 않아서 불필요한 저주와 불행이 우리 기독교 안에 남아 있다. 아마, 그 죄 때문에 이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들과 기독교가 함께 고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제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웠으면 아라비아 자식들은 함께 구원을 받았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무함마드는 세상에 나와서 따로 종교(이슬람)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가 저들을 구원해 주지 않으니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 돌아가자. 한국, 내 조국으로 돌아간다. 우리 일행 21명은 10일 동안의 일정을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암만으로 돌아오는 길, 비가 질척거리고 바람이 부는 초저녁. 우리를 태운 관광버스 앞 유리창이 깨지는 매우 위험한 사고가 일어났다. 어디선가 날아온 물체가 원인이었다. 0.01초만 늦었으면 반대편 차선에서 날아온 듯한 파편이 차창을 때렸을때 우리 일행 중에 큰 사고가 날 뻔 했다. 0.01초!
다음날 우리는 모세의 비스가 산에 올랐다. 느보산 비스가 봉이 더 정확하다. 아무튼 우리는 모세의 산에서 요단강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날씨가 맑은 편이어서 요단강 너머가 시야에 들어온다.
모세. 참으로 큰 인물이었다. 우리가 지난 10여 일 동안 밟고 지나온 이집트, 시내산 일대, 그리고 요르단 등 3천 3백여 년 전의 모세와 우리 일행이 오늘도 만나는 방법(은혜)을 우리는 배웠다.
‘수평’의 시공간으로 하면 3천여 년 저 너머의 인물이 모세이지만 ‘수직’의 눈, 곧 계시의 눈을 뜨면 모세는 오늘 우리의 현장에서 만날 수 있다. 여행 중에 나는 일행들에게 오늘 나는 예수님을 만났다, 아무개를 만났다고 하면 사람들은 덕담이거니 하면서 웃고 지나간다. 그러나 내게는 덕담이 아니라 한 차원 달리하여 역사 속의 인물들과 만날 수 있는 비법을 말하는 것이다.
각설하고…, 모세 기념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모세의 영웅적 인생, 신앙의 깊은 수련을 거친 지도력, 오늘의 우리 시대에도 모세와 같은 인물이 나왔으면 하는 기도를 드렸다.
모세. 지상에서 가장 온유했다는 그 분이 지팡이로 바윗돌을 두 번이나 후려쳤던 장소로 알려진 페트라 입구 우물터와 느보산이 내 눈에 겹쳐서 보인다.
인생에 있어서는 이런 저런 갈등이 있을 수 있다. 또 우리의 모세가 요단강을 못 건너갔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은 여호수아(요수아, 예수)가 모세의 품속에서, 그의 교훈과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 왔다. 비록 모세는 우러르듯이 요단강 건너는 여호수아의 백성들의 가는 길을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으나 역시 그는 큰 사람이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행담을 여기서 마친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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