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54)

   
▲ 씨알의 소리 창간호 표지
-씨알의 소리(咸錫憲)
-聖書東洋學会(朴善均) 題字

# 함석헌에게 주어진 두 큰 일감

70년대에 들어서며 함석헌에겐 두 가지 큰 일감이 주어진다. 하나는 함석한 자신이 일생의 일감이라고 고백한 월간〈씨알의 소리〉창간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함석헌 자신과는 상관없이 외곽(?)에서 출범한 ‘성서·동양학회’(聖書·東洋學会)가 그것이다. 〈씨의 소리〉는 창간되어 4, 5월호를 내고 박정희 정권에 의해 폐간조치를 당하게 되는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시동된 것이 ‘聖書·東洋學会’다. 함석헌의 〈씨의 소리〉가 박정희군사 정권을 정조준하는 언론기구의 하나였다면 ‘聖書·東洋學会’는 성서와 동양사상에 가교를 놓으려는 일종의 학술모임이었다.

이 ‘聖書·東洋學会’는 이런 점에서 함석헌의 박정희 군부정치에의 저항사(抵抗史)에 있어 절묘한 타이밍(Timing)을 이룬다. 함석헌과 그를 곁자리에서 따르는 이들이 의도한 것이었던지 아니었던지간에 ‘聖書·東洋學会’는 학회로서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군부에 맞서는 투쟁의 성역(聖域)으로서도 흔들릴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聖書·東洋學会’의 관계에 대해선 장(章)을 바꿔 이어 언급하기로 하겠다.

 

# 월간 〈씨알의 소리〉

그 자랑스럽던 월간 사상계가 박정희 정권(?)의 언론그 자랑스럽던 월간 사상계가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으로 폐간되면서 “할 말”을 받은 예언의 사람 함석헌은 말 그대로 애닳는 나날을 살아야 했다. 역사도 사람도 말을 먹고 살아간다. 그래서 하늘은 역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말을 준다. 그 하늘의 말을 받은 것이 바로 예언자들이었다. 한국현대사 50년대 60년대의 악랄한 독재정치 군부정치, 그 흑암의 치하에 불행하기 그지없던 한국인들에겐 더할 수 없는 위로가 있었다. 사상계와 함석헌이 있어서였다.

함석헌은 누가 뭐라 해도 당대의 나팔수였고, 사상계는 곧 그 손에 굳게 들려진 나팔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손에 나팔이 없다. 1961년 5·16 군사반란은 50년대에 발행되고 있던 함석헌의 개인잡지인 〈말씀〉을 중단시킨 악연이 있다. 이제 사상계의 명맥을 끊어 짓밟고 서 있는 박정희 정권, 게다가 그 정권속의 언론담당자들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이제는 절대의 통치권을 장악한 듯한, 이제 “아니요” 할 놈은 다시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들은 막강한 권력이야말로 언제나 벼랑 끝에 존재한다는 것, 무너질 때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처참하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사상계가 폐간되면서 함석헌의 들소리(Voice of An peoplse)가 멈추어가자 들고 일어난 것은 천하에 별 볼일 없는 씨들이었다. 들고 일어나는 씨들의 “우리 선생님의 말씀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 그것은 함석헌이 대신(대언·代言)하는 씨 자신들의 말이었다. 그래서 함석헌의 말은 곧 민중의 대언이었다. 들고 일어난 사람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때로는 함석헌을 밖으로 불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원효로4가 언덕배기 함석헌의 집을 찾아들기도 하며 함석헌을 몰아쳤다.
“선생님께서 말씀을 멈추시면 안됩니다. 말씀하셔야 합니다. 당장 사상계 수준의 잡지를 낼 수는 없겠지만 우선 선생님 말씀을 전할 수 있으면 됩니다. 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첫 호만 내면 둘째호부터는 얼마든지 자비출판할 수 있습니다.” 몰려드는 씨들의 요구는 거의 강압에 가까웠다. 함석헌 자신도 그가 주간이 되는 월간 씨의소리 창간호의 첫머리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에서 “친구들의 몰아침에 못 견디어 내게 된 것”이라고 실토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출간된 〈씨의 소리〉는 그의 현존(現存)의 이유였다. 함석헌 스스로가 “이것으로 내 생(生)의 동그라미를 마치겠다” 할 정도였으니…. 어쨌든 적지않은 산고를 거쳐 함석헌의 〈씨의 소리〉가 창간되었고, 이 〈씨의 소리〉를 통해 함석헌은 그가 하늘로부터(역사로부터) 받은 ‘말’을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다. 언론인 송건호는 함석헌의 언론투쟁에 경의를 표한다.

 

# 송건호(宋建鎬)가 말하는 〈씨알의 소리〉

그 역사나 규모로 말한다면 보다 큰 일간지들이 수개나 있다 해도 너 나 없이 순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주머니 돈들을 출연, 국민모금으로 창간된 이후 25년여, 한국인의 민주화투쟁에 견고한 버팀목이 되어준 〈한겨레〉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진 초대사장 송건호(宋建鎬)는 후에 “함석헌의 씨의 소리” 창간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함석헌이 직업적 언론인으로서는 전혀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으면서도 그야말로 죽은 언론계에 언제나 생기와 양심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참된 언론인으로서 높이 평가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 신문기사를 어떻게 쓰는 것인지 전혀 경험이 없는 그를 우리 언론계에서 위대한 언론인으로서 존경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양식과 용기와 일편단심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세상이 다 아는, 아무 재산도 없고, 그리고 아무것에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심지어 기독교인이면서도 어떤 교회에도 메어있지 않은 문자 그대로의 자유롭고 독립된 존재다. 세상에서는 그를 누구도 언론인이라고 보지 않는데, 사실상 그야말로 가장 뛰어난, 아마 가장 진정한 언론인이 구름처럼 많은 이 세상에서 오직 유일한 진짜 언론인으로서 활동해 온 것은 그의 그 아무것에도 메어 살지 않는 자유롭고 독립된 생활이 한 조건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韓國現代人物史論 p321-, 한길사 1984. 3. 15).

같은 책 344쪽 “「씨의 소리」를 발간하다”에서는 “1970년 4월부터 그는 「씨의 소리」 바꾸어 말하면 ‘민중의 소리’라고 하는 월간지를 내게 되었다. 100페이지 안팎의 이 잡지는 그의 사상을 발표하는 잡지로 그가 대부분의 원고를 쓰고 있었으나 그후 그의 사상에 공명하는 인사들도 기고하기 시작했다(송건호 역시 1988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이 된다·필자주). 창간호는 56페이지 정도의 크기 않은 잡지로 그 내용을 보면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 「씨」 「썩어지는 씨이라야 산다」 「씨의 울음」 등 모두 그가 쓴 글인데, 이 중에서도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는 한국잡지 사상, 아니 한국 언론 사상 오래오래 기록될 만한 명문(名文)이다. 70세에 이른 노인으로서 이렇게 예리하고 날카롭게 시국과 언론의 자유에 관해 쓴 탁월한 글을 못 보았다.”라고 쓰고 있다.

 

# 씨알(민중)에 미친 사람

함석헌은 역사의 진행에 있어 민중의 역할에 특심을 가진이었다. “나는 씨에 미쳤습니다. 죽어도 씨알은 놓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울부짖는 씨이란 그에게서 새롭게 불려지기 시작한 “민중”의 또 다른 이름이다. “민중은 씨알입니다”(전집 14, 350쪽).
함석헌이 시작한 〈씨의 소리〉는 그가 이 민중 곧 씨, 씨 곧 민중에게 그의 남은 생(生)을 담아드리는 증정품(贈呈品)으로 정말 볼품이 없으면서도 반면에 신비하기 그지없는 ‘한 나팔’, 민중의 손에 드높이 들려져야 할 ‘한 나팔’이었다. 함석헌은 역사의 진화를 이끄는 ‘말(言)’의 힘, 글의 힘을 확신했다.

 

# 씨알의 소리를 내는 두 가지 이유

그는 그의 ‘씨알의 소리’의 간행이유로 두 가지를 드는데, 첫째, 죽을 사람을 찾는 일, 둘째는 그 죽을 사람을 현실적으로 지켜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첫째 이유의 “죽을 사람”이란 하늘의 소리(하나님의 말씀·필자주)를 토해낼 사람을 말한다. “씨의 속에는 일어만나면 못이길 것이 없는 정신의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을 받아야 합니다. 누가 명령합니까? 하나님이 합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이 어디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마는 그 ‘입’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입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 모든 사람이 하나님 입 노릇할 자격이 있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악한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말을 하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말중에 가장 강한 말은 피로 하는 말입니다. 악하던 사람도 바른말 하다가 죽는 사람을 보면 맘이 달라집니다. 전체 씨알을 동원시켜 봉기케 하는 데는 피로써 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역사의 증인)을 전하는 일로 피흘리는 한 사람, 역사의 증언자로 죽음을 맞서는 한 사람, 함석헌은 그의 〈씨의 소리〉는 바로 그 한 사람을 불러내기 위해서라고 선언한다.

둘째는 이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반동이요 반국가범으로 체포, 구금, 처형하는 국가권력에 맞서, 그 악한 권력으로부터 예의(禮諠) 그 의의 증인을 지켜낼 수 있는, 더 나아가 그같은 의인의 씨를 계속 키워낼 수 있는 ‘유기적 생활공동체’를 건설하려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가족이거나 교회이거나 또는 무슨 클럽이거나 간에 하여간 하나의 무슨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강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요, 약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평소에 약하던 사람도 여럿이 뒷받침을 해주면 놀라운 용기를 얻어 도저히 보통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되고 반대로 아주 용감하던 사람도 자기가 감옥에 간 후에 제 어린 것들이 길가에 헤맬 생각을 할 때에 그만 간장이 녹아버립니다. 그런 실례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과 싸우려면 개인 플레이를 해서는 아니됩니다. 싸우는 사람 편에서 영웅심을 배제하는 것은 물론 주위에서도 만일의 경우 그의 가족 혹은 그의 평생의 관심거리에 대해 계속 공동책임을 질 준비를 해야 합니다. … 4·19 이후 정권의 앞잡이들이 학생진영을 분열시키려 할 때 그 부모를 통해 ‘너 생각해 봐, 4·19라야 남은 것이 뭐냐? 너 하나 곯을 뿐 아니냐’ 하고 꾀이는 것은 사실 그럴 만한 말입니다.”

함석헌! 그는 정치현실의 분석이나 전략 같은 것엔 거의 무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가 말한 〈씨의 소리〉 발행의 이유 두 가지 내용이 지금 3선 개헌으로 영구통치를 획책하는 박정희 정권에의 정면대결이라는 사실, 그래서 그것은 바로 박정희 정권의 가차 없는 언론압살을 불러올 것이라는 사실을 함석헌은 미처 챙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작년(1969년) 9월 14일, 국회 제3별관에서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들만으로 3선 개헌안과 국민 투표법안을 투표는 10분, 개표는 5분만에 변칙통과시켰고, 이어 10월 17일엔 3선 개헌법안을 국민 투표에 붙여 가결시키고 내년(1971)에는 가결된 3선금지철폐로 196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번이 마지막입니다”라면서 유권자들의 표를 애걸하던 박정희가 또 다시금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해, 그리고 그 다음해 1972년은 유신통치가 선포되는 해다. 그것은 그의 영구집권 획책의 제일보였다. 함석헌은 이같은 군사정권의 광란에 맞서는 “피흘리는 사람”을 찾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람을 지켜낼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씨의 소리〉를 내는 것이라 했으니.

정말 그는 순진하다 못해 바보 같은 이였다. 하기야 그가 평소 즐겨 쓰는 그의 아호가 ‘바보새’였으니….

 

문 대 골
생명교회 원로 목사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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