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55)

“<씨알의 소리>로 내 생의 동그라미를 마치겠다” 하던
함석헌도 약간의 예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 큰 일감을 탈취당한 후 한동안 멍하고 있는 사이 역사는
함석헌을 위한 새 종교사(宗敎史)의 불씨를 일으키고
있었다. 소위 성서·동양학회(聖書·東洋學會)의 발기, 창립이라는 것이다.

 

씨알의 소리, 그 창간과 폐간

사상가로, 종교가로, 언론인으로 어떤 이들로부터는 한국의 간디로, 광야의 사람으로, 제도권 종교(?)에 매이지 않은 자유인들로부터는 한국의 예언자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함석헌은 예외 없는 비폭력의 사람이었다.

폭력이란 그의 평생의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말이었다. 그는 그의 자서전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에서 자신을 일러 “‘gentle’은 받아들고, ‘resist’는 골라들었다”고 말한다. 평화의 사람, 그것은 함석헌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런 그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에 직면하면서는 전혀 다른 형(形)의 사람으로 나타난다.

특히, 그가 창간하는 ‘씨알의 소리’에서 그랬다. 이 악의 시대 (‘박정희의 군부통치시대’·필자주)에 참의 실현, 참의 수호를 위해 죽을 수 있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발굴하기 위해, 그리고 그런 사람의 가족들, 그의 부모나 아들딸들을 지켜낼 수 있는 같이 살기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씨알의 소리를 내는 것이라는 발언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함석헌의 그 같은 ‘씨알의 소리’ 발행의 이유는 박정희 군부에겐 용서할 수 없는 반혁명이었다. 그 소위 혁명정권에 죽음으로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을 발굴해내기 위해 씨알의 소리를 발행한다는 함석현의 말은 망언도 보통의 망언이 아니었다. 어떤 작가의 표현대로 ‘죽으려고 환장한 것’이었다. 군부실력자들의 눈에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는 그야말로 군부를 뒤엎을 폭력배들을 키워 내겠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평화와 민(民)주(主)를 평생의 신조로 지키며 살아온 함석헌이 박정희와 그의 부류들에겐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폭력불사의 반혁명분자로 낙인된 것이다. 이후 ‘씨알의 소리’는 편할 날이 없었다. 박정희 군부에 의한 온갖 탄압, 협박, 편집·업무·영업 방해, 편집장, 출판부장 등의 불법연행, 고문 심지어 함석헌까지도 철저하게 연금, 밀착감시를 당해야 했다. 함석헌의 말대로는 공산당과 한 치 다름이 없는 만행을 견디며 살아내야 했다. 드디어 씨알의 소리사는 ‘씨의 소리’ 제2호를 발간, 일부는 총판으로 넘기고 일부는 정기구독자들에게 발송하는 도중 5월 29일, 문공부로부터(문공부 출1028-8973) 폐간통고를 받게된다. 문공부가 피력한 폐간 이유는 “인쇄인 변경철차를 밟지 않고 1호 출판사와 다른 타인쇄소에서 인쇄했다”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명(命)이 곧 법이었으니 천하의 함석헌이어도 별 수가 없었다.

‘씨알의 소리’ 인쇄소 문제엔 박정희 정권 차원의 고도의 정치 전략이 개입되어 있었다. 박정희 자신은 “함 씨 발언 막지 말라”며 대인연(大人然) 했지만 실속으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해야 할 늙은이”였다. ‘씨알의 소리’ 창간호를 내준 인쇄소는 서대문 소재 선일인쇄소였다. 선일인쇄로서 ‘씨알의 소리’는 더할 수 없이 좋은 고객이었다. 인쇄소가 요구하는 견적을 일언반구의 이론 없이 좋다 하고, 인쇄소의 날일꾼들과의 친교 또한 유다른 것이었으니…. 그런데 2호 원고를 선일에 넘겨주었을 때였다. 선일 사장은 거두절미, “‘씨알의 소리’는 더 이상 우리가 인쇄할 수 없습니다”라며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의 압력 때문이었다. 예나 이제나 법은 가진 자들의 것이었다. 법이 가지지 못한 자들의 권리를 지켜 준적은 역사상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가진 것이 없는 자들보다는 가진 자들의 가진 것을 지키는데 기여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선일의 문선 책임자였던 최진수(崔鎭守)는 사석에서 선일이 인쇄 거부를 하게 되기 까지의 전후 사실을 알려주었다. 타락한 권력은 정직하게 부지런히 땀 흘려 살기를 그토록 원하는 바닥살이들을 짐승으로 몰아갔다. 다시 선일로부터 2호 원고를 되돌려 받은 전덕용과 유창현은 선일 문선 최 부장의 암암리의 소개로 중구에 있는 이우인쇄소를 찾았고, 무사히 2호의 인쇄에 성공했다. “그것은 정말 천우신조였다”는 표현을 당시 어떤 시민, 어떤 독자가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제2호(1970. 5)는 ‘근대화는 되고 있는가?’(池明覲), ‘이 세상을 본 받지 말라’(安秉煜) 이 두 편의 외부필자의 글과 ‘사사오입(四捨五入)-5.16을 되돌아본다’, ‘옛 글 고쳐 씹기’, ‘씨의 설 자리’,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2)’ 등 함석헌의 글 네 편이 담겨 나왔다. 박정희와 그 주변의 무리들로 “이 놈의 늙은이가…” 하게 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이 “사사오입-5.16을 되돌아본다”는 권두언격인 함석헌의 글이었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자유당정권을 향해, 특히 대통령 중임 제한 조항의 철폐에 악용된 사사오입 국회를 들어 “꾀를 내도 분수가 있고 억지를 써도 정도가 있지. 지식을 배우고 경력을 쌓아서 국민을 대신하여 나라를 한다는 사람들이 어찌 감히 그렇게까지 도리를 짓밟고, 지식을 악용하고, 국민을 무시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함석헌은 전혀 함석헌 같지 않은 걱정을 쏟는다. “분한 마음으로 한다면 열두 번 죽여도 모자랄 것입니다”라고.


함석헌이 말하는 혁명(革命)과 반혁명(反革命)

   
▲ 김제태 목사가 성서·동양학회 모임의 사회를 하고 있다.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함석헌 선생,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박선균 목사

그런데 함석헌은 이처럼 형언할 수 없는 민족의 부끄러움, 국가(?)의 부끄러움을 씻어 세계를 향해 얼굴을 들 수 있게 해준 것이, 4.19 였다는 것이고, 천하에 설명이 필요없는 이 성(聖) 4.19의 명맥을 눌러버린 것이 5.16 박정희의 군사폭동이라는 것이었다.

“밉거나 곱거나 간에 5.16의 뜻이나 값은 4.19와의 관계를 내놓고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말하는 때에 밉고 곱고에 붙잡혀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인 이상, 연대책임인 이상 곱다면 곱고, 밉다면 다 밉습니다. 미운 일을 한 사람일수록 그 노릇을 맡았던 것이 가엽습니다. 사람이 어디 한둘이냐? 어찌 네가 하필 그 노릇을 했느냐! 그러나 곱고 미움은 말하지 않아도 잘했다 못했다는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년 다 돼오는 오늘 무슨 지나간 일을 왈가왈부하느냐 할지 모르지만, 역사는 문제입니다. 풀지 않고 넘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모든 사건이 풀지 못한 문제의 항의요 그것이 풀릴 때까지 역사는 제대로의 길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10년이 지났어도, 100년이 지났어도 따질 것은 따져야 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이렇게 흐리터분한 것은 5.16을 아직 숙제로 둔 채 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의 말은 계속된다. “5.16은 분명히 4.19에 맞서(대적하여, 필자주) 일어난 것입니다. 혁명에 대한 반혁명입니다. 5.16정권이 5.16을 될수록 혁명으로 규정지으면서 4.19를 반혁명으로 갖은 수단을 써서 구구한 억지설명을 하는 것이 벌써 그것을 증명합니다.”

5.16 정권의 한 실력자가 말했다. “씨알의 소리, 이거 없애버려!”. 그렇게 없어진 ‘씨알의 소리’였다. 실무자가 ‘씨알의 소리’를 없애버리라는 그 실력자에게 되물었다. “영감은 어떻게 할까요?” “뭐, 그 늙은이 말야? 좀 더 둬봐….”

폐간을 단행한 행정적인 조치는 이미 말한바데로 제2호‘씨알의 소리’의 발행이 문공부에 신고 돼 있는 선일인쇄소가 아닌 이우인쇄소였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배후에는 시종 중앙정보부 6국3과가 작동하고 있었다.

 

성서·동양학회(聖書·東洋學會)의 발족

   
▲ 박선균이 기초한 聖書·東洋學會 발기 취지문 전문

그러나 “‘씨알의 소리’로 내 생의 동그라미를 마치겠다” 하던 함석헌도 약간의 예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 큰 일감을 탈취당한 후 한동안 멍하고 있는 사이 역사는 함석헌을 위한 새 종교사(宗敎史)의 불씨를 일으키고 있었다. 소위 성서·동양학회(聖書·東洋學會)의 발기, 창립이라는 것이다. 이 성서·동양학회의 발기에 초석을 놓은 동인들로 김영호(金榮鎬), 김제태(金濟泰), 박선균(朴善均)이있었다. 이 3인 동우들은 모두가 중신(中神)의 학장이었던 안병무의 제자들로 이후 국내에서 국외에서 학문을 계속해 대학에서 혹은 교회에서 일생을 헌신한 이들이다. 이 3인 중 함석헌과의 관계에 있어 이후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람이 박선균이다.

함석헌은 야인이라 불렸고, 군사정권 치하에선 “재야(在野)의 어른”이라 일컬었는데, 함석헌에게는 이 재야의 기간이야말로 ‘공(公·空)생애’였다 할 수 있다. 그가 그의 모교의 역사교사로 재직하던 기간도 실로 전설적이었지만 어찌됐던 그 기간 10년은 조직 속의 살림이었고, 불려가기도 하고 내쫒기기도 하는 틀 속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서른여덟 봄, 일제의 탄압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죽어 묻히기로 했던”오산을 나와 여든아홉 세상을 떠나기까지 오직 하늘과만의 약속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바로 이 기간이 함석헌에겐 절정의 공생애였다는 것이다. 이 함석헌의 공생애 기간을 전후반으로 나누어 그의 분신으로 그와 더불어 자신들의 생을 바쳐간 “두 씨”이 있었다.

그 하나가 함석헌의 4, 5, 60대 함석헌의 공생애 전반기를 함께 살아온 전에 길게 언급한 바 있는 최진삼이고, 6, 7, 80대 후반기를 함께 살아온 박선균이다. 이 박선균을 특히 주목 할 필요가 있다.

김영호, 김재태, 박선균은 틈나는 대로 자리를 함께 하며 성서·동양학회 출범을 위한 지혜를 모아갔다. 드디어 6월 어느 날, 7월 1일 발기인모임, 9월 1일 창립식을 갖기로 하고, 聖書·東洋學會의 발기인 취지문을 박선균이 기초해 수일 내로 다시 한 번 함께 모여 검토하기로 했다. 

   
 

 

 

 

문대골
생명교회 원로 목사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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