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오직 갈 길은 하나다. 루터는 설마 했던 교황의 파문교서를 받고 그것을 찢어버렸다. 교황권 역사 속에서 교황의 교서를 의도적으로 찢어버린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루터의 신앙적인 주장에 대해 ‘이신득의’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루터가 “교황권 절대불가”라고 믿는 개혁자임을 알아야 한다.

‘교황’이라는 괴물이 성경에는 없다. 초대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베드로를 비롯하여 어떤 사람도 교황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고집한 자들이 없었다. 그 이유는 루터의 주장과 선언인 만인제사에서 찾을 수 있다. 만인제사는 “천하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몸소 제사권을 행사하는 제사장이다”가 루터의 가르침이었다.

만인제사가 무엇인가, 하는 유럽의 반응은 즉각 번개 튀는 소리를 냈다. 독일의 농노들이다. 그래도 르네상스의 아들들인지라 그들의 반응은 무서울 정도였다. 뭐! 뭐야. 만인제사. 그럼 우리도 제사장 노릇을 할 수 있는 거야? 야, 이게 꿈이냐 생시나? 야호! 야호! 신난다. 단숨에 십만 명 정도의 게르만 농노들이 결집했다.

지도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토마스 뮌처 신부다. 그가 탁월해서가 아니라 마르틴 루터의 친구요 동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뮌처의 거친 동작을 루터는 싫어했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개혁자인 라스카사스가 루터보다 뮌처를 실력자로 존경했고, 그는 또 카를5세 신성로마제국의 인기 있는 황제의 궁정사제다.
머리가 있는 루터는 보름스의회에서 본 카를5세의 인품과 라스카사스가 보이는 토마스 뮌처 신임에 당황한다.

그는 신학적인 선택의 여지 없이 1세기 신학이며 예수 메시아의 신학인 만인제사를 크리스천의 의무요 축복의 카드로 들었으나, 어느 날부터 10만 명이 더 되는 독일 중심의 농노들이 세력화 되고, 만인제사 운동이 지지부진해지자 차츰 폭력적인 경향을 띠었다.

폭력이 싫은 루터, 개혁 이상의 혁명적 결단이 있어야 교황이 뒤집어쓴 9층 금관을 벗겨내고 교황좌에서 그를 끌어낼 터이지만 그것도 혁명적 방법은 싫었다. 그러던 차 영주들이 협상카드를 들었다.
루터여! 농노혁명을 진압하라! 그렇게 되면 우리는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암시다. 루터는 여기서 흔들렸다. 10만 명하고도 5천 명이 더 되는 농노들이 열망하는 “만인제사”를 루터는 농노들을 버릴 때 함께 버렸다. 그때 토마스 뮌처도 사정없이 버렸다. 그때가 1525년 5월인가 7월이다. 농노들의 혁명을 완전 진압! 농노 사망자 10만 명, 그리고 더, 화형장에서 농노들과 함께 죽은 토마스 뮌처.

괴로운 루터는 1525년 5월 카트리나 수녀와 42세의 나이에 결혼한다. 루터여! 모두를 잊었어도 “만인제사”는 잊어서는 안 되고 포기해도 안 되는 종교개혁의 핵이요 뇌관임을 잊지 마라.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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