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기독교(景敎)_ 47

“놓치지 말아야 할 기독교의 소임은 자기의 부족은 예수 십자가로 채울 수 있음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예수의 십자가가 자기 죽음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세요. 복음이 여기에 있지요.”

   
▲ 현종의 계비인 중국 최고의 미인 양귀비 동상.

여기까지 겸허한 음성이면서도 또렷하게 자기 소신을 말하던 알로펜 주교가 ‘더 말씀해 주시오’ 하는 듯 그를 바라보는 군중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로마교회 선교단 젊은 사제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교님! 왜 그러세요? 우리가 뭘 잘못 했다고요….”
알로펜은 그들에게 “용서를 빈다”면서 큰 절을 했다. 로마교회 사제들은 쿰바홀 부주교를 붙잡고 도와달라면서 울상들이었다. 그러나 쿰바홀은 알로펜이 왜 저러는가를 잘 안다.

“신부님들, 나도 방법이 없습니다.”
“……?”
로마교회 사제들이 알로펜 주위로 빙 둘러앉는다.
“주교님, 무엇인가 저희에게 가르침으로 주시고자 하시죠? 저희가 주교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제야 알로펜의 눈 가장자리에 서려있던 물기가 그의 눈빛과 더불어 반짝이면서 그가 벌떡 일어나 군중들을 향한다.

“내 오늘 여러분을 만나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무함마드 이슬람 교주의 어릴 때 친구라 했던 말은 여러분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그는 이미 큰 종교의 종조가 되었는데 내가 이러고 저러고를 말해서 무엇 합니까. 그러나 내가 오늘 여러분을 마주하고 보니 여러분 가슴에는 종교성이 많아 보입니다. 내 가끔 여기에 오거든 찾아뵙겠소이다.”
알로펜의 정중한 인사에 둔황의 나그네들이 박수로 화답하면서 뒤늦게나마 알로펜을 환대해 주었다. 알로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명사산 굽이치는 모래언덕들을 바라보면서 아름답구나, 참 신묘하구나, 오늘 밤은 나 저기서 산모래들과 친해보고 싶도다. 그는 마음으로 다짐하고 로마교회 선교사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한마디 한다.

“시간이 남아 있거든 나와 함께 가서 저녁 요기라도 하면 좋겠구먼.”
알로펜은 그들 젊은 수도자들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이역 만리에 와서 청춘을 바쳐 얻고자함이 무엇일까. 저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주교님, 가능하시면 저희들에게 이 밤 하루 모두 가르침으로 채워 주세요.”
“그래, 그게 정말인가? 여러분이 나를…, 혹시 네스토리우스 귀신이 여러분에게 옮겨 붙으면 어찌하나…?”

젊은이들은 웃음으로 받아 넘기면서 알로펜 가까이로 다가온다.
알로펜은 그들의 등을 토닥여 주면서 기뻐했으나 군중들은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알로펜은 그들에게 무슨 말인가 해 주고 싶었다.
“주교님, 둔황에는 얼마나 머무실 것인가요? 저희가 또 찾아뵙고 싶습니다.”
“그래요. 내가 여기 쿰바홀 부주교와 상의하여 한 번 크게 잔치를 하겠소. 수삼일 안에 연락하리다. 나는 ‘석굴 여사’에 머물고 있어요. 그 정도 장소이면 3백여 명 잔치는 할 수 있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주교님.”

알로펜은 젊은 사제 20여명과 함께 명사산 기슭으로 향했다. 둔황은 아름다웠다. 이곳은 실크로드의 관문이다.
BC 111년 한나라 무제가 당시 하서주랑(河西走廊)에 거주하고 있던 흉노(匈奴)를 몰아내고 둔황, 주취엔(酒臭), 장예(張?), 우웨이(武成)에 하서 4군을 설치했다. 이것이 이 도시의 출발이다. 당시 둔황은 가장 서쪽에 있는 도시여서 이 지역을 서역(西域)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중국인의 허황된 포부라 할까. 큰 꿈은 황하의 서쪽뿐 아니라 중국의 서쪽이면 둔황은 물론 인도, 페르시아, 로마의 각 도시들까지도 크게 말하여 서역이라 한다.
7세기부터 둔황은 사주(沙州)와 북러 군사적인 역할보다 실크로드의 교역 중계 역할을 하는 황금의 세월이 시작됐다.

알로펜 일행은 명사산을 잠시 둘러본 후 그들의 거처가 있는 박고굴 방향 입구에 있는 여관으로 갔다. 처음에 찾아와서 짐을 풀었던 정오 무렵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판이 커졌다. 쿰바홀 수하 몇 명이 여관 지배인을 만나서 여관 전체를 사용하기로 계약을 바꿨다. 소상인들로 보이는 십여 명은 다른 여관으로 불편하지 않게 자리를 옮겨 주었다. 큰 방이 20개요, 거실은 물론 집 마당이 둘레에 있는 간편한 방들이 있고 마구간도 넉넉했다.

저녁상이 나오기 전까지 20여명의 로마교회 선교단 사람들은 짐을 정리하고 2명이 시내에 다녀왔다. 그들은 자기들의 현 위치를 누구에겐가 알리고 왔을 것이다.
쿰바홀이 그들을 찾아왔다.
“여러분, 나는 로마교회의 방침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소이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이 보여 준 아량은 생각 밖이요. 상대방에 대한 파격적인 이해가 놀랍고, 특히 우리 네스토리우스파들에 대한 이해도 놀라울 뿐이오. 아무튼 고맙소. 여러분에게 불편함이 없는 시간이 되도록 내가 조금 노력을 하겠소이다.”

“부주교님, 저희가 오늘 주교님을 뵈니 알로펜 주교님은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가 아닙니다. 그것을 저 어른의 말씀에서 발견했어요. 또 죄송한 말씀이지만 여러분의 언행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사상이 조금만 보였어도 저희는 지금까지 여러분과 같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허허, 그런가요. 어찌됐든지 저는 여러분과의 만남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이다. 알로펜은 로마교회 젊은 선교사들에게 말했다.
“나는 오늘 밤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군요.”
“뭐든지 말씀하세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럴까요? 그렇다면 고맙지요.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 로마교회는 스스로를 ‘로마 가톨릭 교회’라 하는데 ‘가톨릭’이라는 말은 더 이상 여러분의 이름이 될 수 없소. 로마교회는 AD 431년 에베소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로마제국의 영토에서 추방했소. 그때 네스토리우스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로마교회와 등을 돌렸소. 바로 그때 로마제국의 전 영토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기독교에게는 중대한 위험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게 뭔 줄 아세요?”
“그야 뭐, 이단 세력의 척결이었죠.”

로마교회 선교단 모두가 잔뜩 긴장했고 또 한편 그들의 얼굴에는 후회 같은 어두운 기색이 서려 있었다.
“아니오. 물론 이단적인 요소가 네스토리우스에게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저도 그것을 압니다. 그러나 당시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가 가지고 있는 기독론(基督論) 지식은 로마 교구는 물론 제국 기독교의 각 교구들, 즉 예루살렘 교구, 시리아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물론 콘스탄티노플 교구 안에서도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과 유사한 교훈이 많이 있었지요. 그들 교구들 중 네스토리우스 기독론보다 훨씬 뒤떨어진 기독론을 가진 예루살렘 교구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기독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로마교회 선교사들은 자기들끼리 말을 나누기도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다.
“여러분, 금번에 일어나고 있는 아라비아 메카·메디나에서 일어난 사라센 혁명은 이미 예루살렘 교구와 안디옥 교구를 이슬람 종교의 수중에 집어넣었소. 그리고 알렉산드리아를 공략 중이고, 그들도 곧 이슬람 종교의 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시나요. 주교님!”
“네, 그들은 모두 ‘기독론’에 실패한 교구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제국의 모든 영향력 범위 안에 있던 기독교는 처음부터 ‘거룩한’이라는 이름을 교구들의 이름 앞에 붙였지요. 예를 들어 홀리 예수살렘 가톨릭교회, 홀리 안디옥 가톨릭교회, 홀리 알렉산드리아 가톨릭교회, 홀리 로마 가톨릭교회, 홀리 콘스탄티노플 가톨릭교회, 즉 ‘가톨릭’이라는 뜻을 모든 교회(교구)들의 이름에 적용했습니다.

가톨릭이라는 말의 뜻을 아시나요? 그것은 ‘보편성을 지닌’, 또는 ‘정통성을 지닌’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도도하게 흘러오는 교회들은 천년, 이천년을 이어오면서, 또 어어 가면서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모습이 흐려지기도 하다가 또 환경이 좋아질 때면 교리의 투명성을 확보하게 된답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가톨릭)교회가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을 문제만 삼았지 당시의 시대성을 외면하고 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정죄하면서 당시 세계 기독교는 큰 타격을 받았고, 결국은 오늘날 여러분과 내가 피할 수 없이 맞이할 이슬람 세력들이 아주 악질적인 자세로 우리 교회들을 짓밟고 있습니다. 아마, 오늘 우리가 머물고 있는 둔황에도 이슬람 세력은 와 있을 것입니다. 이미 그들 세력들이 진을 치고 버티면서 나와 여러분의 기독교를 집어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로마교회 선교사들은 얼마간의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주교님, 그럼 주교님은 이슬람을 이겨낼 가르침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래요. 그러나 먼저 모두 우리들의 기독교가 각 지역에서 일관되고 일치된 기독교로서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먼저 확보해야 합니다. 내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기독교 교파들끼리 편 가르기 따위는 삼가야 합니다. 서로 간에 떨어져 살다보면 교리적인 차이나 또는 얼마간의 해석상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은 종합적이고, 매우 복합적인 이해력과 성경의 실력을 갖게 되면 늘 얼마간의 오해 따위는 정돈될 수 있답니다. 보세요. 오늘 여러분은 나 알로펜에게 네스토리우스파 냄새가 나지 않는다 했어요. 그러나 나는 태어날 때부터 네스토리우스파 감독의 집단에서 태어났어요. 하지만 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셨어요. 기독교 여러 교파들이 얼마간의 교리적 차이를 가진다 해도 서로를 받아들이고 각기 처했던 환경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으면 교리적 갈등도 극복하고 모두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하, 놀라운 가르침이십니다. 평생의 교훈으로 삼겠습니다. 그럼 이 시간에 우리에게 이슬람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쿰바홀이 가까이 와서 저녁을 드신 후에 하면 어떨지 말했다.
“아닙니다. 쿰 부주교님, 저녁밥보다 더 중요한 것부터 하게 해 주세요.”

사제들의 간청이었다.
“좋아요. 그럼 내가 말하죠. 내가 무함마드를 만났을 때 그는 유일 신 하나님 섬기는 자세가 분명했었습니다. 단, 그는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을 향한 대속죄의 제물이 아니라 자기 한 사람 몫의 제사일 뿐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요. 인간이란 자기 한 사람 책임만 다하면 이 세상은 낙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했었어요. 그러나 인간이 과연 자기 몫의 행위를 감당할 수 있느냐에 접근해보면 그것은 불가능이라고 나는 그에게 말해주었다고 했지요.

여러분, 바로 여기에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기독교의 소임은 자기의 부족은 예수 십자가로 채울 수 있음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알로펜이 여기까지 말을 이어가다가 멈추고 젊은 선교사들을 한 사람씩 주의 깊게 바라본다. 어느 누구도 알로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궁금증이 다 풀렸다는 표정도 아니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신 예수의 십자가가 자기 죽음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세요. 복음이 여기에 있지요.”
알로펜은 다시 젊은 사제들을 바라본다. 

• 작가 조효근 : 1976년 『월간 문학』 신인상 소설 등단.
대학에서 세계교회사 및 종교사 38년째 강의.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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