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57)

성서·동양학회 20여 년간 함석헌의 역사관, 종교관은 그 수위를 놀랍도록 더해갔다.
유달리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나는 생각”을 얻어내고 그 새로 남, 새로 얻은 생각으로 고전을 풀어
다시 새 생각을 일궈낸다. 듣는 무리들, 배우는 무리들은 그야말로 감격의 도가니였다. 

2001년 도서출판 한길사가 발행한 함석헌기념사업회편 <다시 그리워지는 함석헌 선생님>에는 그 노장사상 운동이 어떻게 태동, 전개되었는지가 오롯이 담겨 있다. “노자 강좌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하는 성서·동양학회 초대 회장 김제태(金濟泰)의 글이다.
그 글속에 곧이어 <씨알의 소리> 편집장이 되는 박선균이 기초한 성서·동양학회(聖書·東洋學會)의 취지문이 실려 있다.

“우리는 지금 시대의식과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신(神)이 있어야 할 자리에 기계가 자리잡고 믿음과 사랑 대신에 불신, 허무, 증오, 혼란이, 자유와 평화가 깃들 누리에 권력의 횡포와 전쟁의 마신(魔神)이 난무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이제 우리는 역사적인 현실을 의식함에 있어 집단악(集團惡)에 대한 사랑의 힘과 기계문명을 능가할 정신문화 창조가 심각하게 요구되고 있음을 절감한다. 이에 우리는 성서(聖書)와 동양(東洋)을 직결시켜 성서적 바탕에서서 동양사상(東洋思想) 및 한국사상(韓國思想)을 연구하며, 동양 및 한국의 터전 위에서 성서의 바른 뜻을 밝혀내어, 인간의 정신적 새 기초(基礎)를 수립해야 할 필요성을 공감한다. 고로, 선구된 인물들의 사상 연구를 취지로 하여 성서·동양학회를 발기한다.”

김제태의 글 ‘노자 강좌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는 박선균이 기초한 이 취지문이 20여명의 발기인을 대표하여 김제태, 김영호, 박선균 3인 명의로 발표되고 있다.
7월 1일 발기, 9월 1일 창립, 그리고 11월 1일 성서·동양학회 회원이 된 세검정 현 상명여대 부근 김홍석의 집에서 안병무를 중심으로 성서·동양학회를 시중해 갈 6, 7명의 일선(一線) 그룹들의 모임이 있었고, 드디어 1971년 4월 19일을 함석헌이 시작하는 ‘노자 강좌’의 첫날로 결정했다.
역시 학회의 회장은 발기인회 회장으로 수고해온 김제태가, 총무는 발기 취지문의 집필자인 박선균이 맡게 된다.


성서·동양학회!

이 ‘성서·동양학회’야말로 <씨알의 소리>와 함께 함석헌의 후반기 공생애에 억겁(億劫)의 정신세계를 비상할 두 날개였다. 함석헌사에 있어 성서·동양학회의 출현은 그야말로 축복이 아닐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성서·동양학회가 아니었다 해도 함석헌은 이미 생명 없는 소위 정통 기독교에서 탈출한지 오래였지만, 성서적 종교이기를 포기한 ‘틀의 종교’를 벗어난 함석헌에겐 화석이 되어버린 기독교로부터의 탈출만이 아닌 새 종교를 찾기 위한 순례자의 길을 가야 하는 새 역사적 사명이 기다리고 있는 터에….

성서·동양학회는 함석헌의 이 새 종교의 순례에 착 달라붙은 길벗이었다. 이제 함석헌은 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홀로 갈 이유가 없어졌다. 성서와 동양사상, 한국사상과의 직결로 ‘인간의 정신적 새 기초’의 초석을 놓겠다며 함석헌의 길에 들어선 무리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말이다.

   
▲ 함석헌 선생과 박선균 목사(왼쪽은 성서·동양학회 발기동인 김영호 인하대교수)


함석헌과 한국기독교

한국 기독교, 특히 정통교회, 대교회를 비롯한 세력권에서 함석헌은 하나같이 ‘이단’이었다. ‘함 씨는 회개하라. 지옥은 있다’고 대놓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갈 자라며 입에 거품을 무는 명사(?)들도 있었다. 함석헌이 그렇듯 기독교의 미움을 당하게 된 것은 ‘진리의 구경(究竟)은 하나’라는 주장 때문이었다.

‘전날에는 내가 기독교에만 참사관이 있고, 기독교만 홀로 참 종교라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와서 보면 역시 종파심을 면치 못한 생각이었다. 기독교가 결코 유일한 진리도 아니요, 참사관이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진리가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식으로 나타났을 뿐이다’(전집1, 41쪽).

80년대 중반쯤의 일이다. <기독교사상> 편집부장 한용상(韓龍相)이 함석헌을 두 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함석헌에게 마지막 한 말이 이랬다. “지금까지 함 선생님의 폭넓은 사상에 대해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함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제가 종합적으로 느끼는 인상은 종교적 진리의 최고봉은 하나다. 그 정상에 이르면 동에서 출발하건 서에서 출발하건 서로 만날 수 있는데 중간에서 부분적인 것만 보니까 다른 주장을 하게된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기독교 각 종파는 물론이거니와 종교 간에 진리의 교류와 그 통합을 시도한다면 우리 종교와 사회 조화는 물론, 전 인류가 다양성 속에서 통일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1983, 5월호 월간 <마당>).

함석헌에게 있어 기독교는 절대의 종교가 아니었다. 각종의 불경들이 불교만의 경전이 아닌 것 같이 성서(聖書) 역시 기독교만의 경전이 아니었다. 동서고금의 모든 경전들, 어떤 단일 종교를 위해서 어떤 단일 종교의 것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1971. 4. 19일 노자 강좌 문을 열다

함석헌이 그의 유명을 달리하게 되는 이후 1989년 2월 4일, 그 한 해 전까지 18년 동안 함석헌과 함께 한국을 중심으로 동서를 연결하는 대역을 이어가게 된다. 함석헌의 동양고전 강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성서·동양학회 회장 김제태는 당시 성서·동양학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설마라고 말할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이것만은 사실이다. 존경하는 스승의 문하에 나아가 배우는 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아는 것과 깨달음을 전하는 일이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던 때가 있었다는 것 말이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군사 정권 하에서의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 아래 5.16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그 정권 자체를 거부하는 함석헌 선생의 정기 강좌가 근 20년이나 계속되었다는 것은, 그 강좌의 규모 여부를 막론하고 기적 같은 일이다.”

더불어 김제태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정동교회에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당시 군사정권의 감시와 탄압을 극도로 받고 있던 함석헌의 강좌라 매주 한 차례씩 사용해야 하는 장소를 빌려주는 곳이 없어 말 못할 애를 태우던 때, 정동교회가 교회의 소유 건물인 서울청년관(젠센기념관)을 제공해 주어 그 값진 일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서·동양학회 20여 년간 함석헌의 역사관, 종교관은 그 수위를 놀랍도록 더해갔다. 유달리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 “나는 생각”을 얻어내고 그 새로 남, 새로 얻은 생각으로 고전을 풀어 다시 새 생각을 일궈낸다. 듣는 무리들, 배우는 무리들은 그야말로 감격의 도가니였다. 도서출판 한길사는 후에 함석헌의 노장강좌 녹음했던 것을 풀어 <씨알의 옛글 풀이>라는 이름으로 함석헌 전집 20권째의 책을 발간하게 되는데, 함석헌은 그 책 머리글 ‘노장을 말한다’에서 이렇게 토설(吐說)하고 있다.

노자의 숨으로 이긴 악정(惡政) “나는 노자 장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숲에 깃들인 뱁새’ 같이,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는 두더지’ 같이 날마다 그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혹 그들이 어느 시대 사람들이냐, 정말 생존했던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토론하기도 하고, 그들의 이름으로 전해오는 글은 사실 그들이 쓴 것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이 지은 것이라 하기도 하지만, 내게는 그런 것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앉을 가지(枝)를 그들에게서 찾고 마르는 내 목을 축이면 그만이다. 그러면 혹 그래도 역사적으로 그 사실을 밝혀야 그것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느냐 할지 모르지만, 2천년 이상을 이만큼 시간·공간을 뚫고 내려왔으면 그것이 곧 역사적 존재지 그 이상 무엇을 더 밝힐 것이 있을까?

어디에 누구의 아들딸로 났던 것은 분명하면서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으며 무슨 일을 했던지 전혀 알 수 없이 돼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격은 결코 육체 속에 갇혀 있으면서 한때만 사는 것이 아니요 무한히 자라는 것이다. 소위 죽었다는 후에도 계속 살고 자라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 석가, 노자, 장자는 영 알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노자요 장자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삶’(死而不亡者壽, 도덕경 제 33장)이라 했다. 나는 일제치하를 살아내면서 구약성경의 이사야, 예레미야를 많이 읽었다. 그 압박 밑에서 낙심이 되려 할 때에도 그들의 굳센 믿음과 사상을 접하면 모든 시름을 다 잊고 다시 하늘을 향해 일어설 수가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말을 해주는 산 영이었지 결코 죽은 글이 아니었다. 내가 그들을 다 알지 못해도 좋다.

마찬가지로 이 몇 십 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썩 잘함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것에 좋게 잘 해 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으려 한다. 그러므로 거의 도(道)에 가깝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 而不爭 處衆人之所惡 幾於道, 도덕경 제 8장) 하는 노자의 말을 듣지 못했던들 씨알을 잊어버리고 낙심했을지도 모르고, 아침저녁으로 장자를 따라 무용(無用)의 대수(大樹)를 아무도 없는 동리나 넓은 광야에 심어 놓고(無何有之鄕廣莫之野) 그 옆에 한가히 서성이며 그 밑에 거닐며 누워 잘 줄을 몰랐던들(장자 도덕경), 이 약육강식과 물량퇴폐의 독한 공기 속에서 벌써 질식되어 죽었을는지도 모른다”(씨알의 옛글 풀이, 함석헌 전집20. 25, 26쪽). 동양·성서학회는 함석헌이 새 역사, 새 종교의 숨을 쉴 수 있도록, 동서를 아우르는 꿈을 꿀 수 있도록 온갖 시중을 다했다.

   
 





문대골

생명교회 원로 목사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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