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58)

   
▲ 문대골 목사
생명교회 원로 목사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정희와 그의 수족들을 제외한 정치, 종교, 법조, 교육, 문단 등 전 분야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박정희 정권을 향해 저항의 일자진(一字陳)을 쳤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갈수록 가중되어 가는데도 제야의 민주세력은 흔들림 없이 저항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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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에게 영수증 사인을 요구한 박총무(朴善均)

“선생님, 여기 영수증에 사인 좀 해주십시오”
“영수증? 영수증이라니 무슨 영수증?”
“네, 학회에서 소정의 강사료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

성서·동양학회가 주관하는 노좌강좌는 매주 화요일 몇 달 간 진행이되면서 함석헌에게 그야말로 활력(活力)의 일터가 되었다. 함석헌으로서는 큰 맘 먹고 시작했던 <씨의 소리>가 폐간 당하고 속상해(?) 있는 터에 그의 평생에 또 다른 일감이었던 동양사상의 계발과 새 종교의 추구에 자신의 혼을 맘껏 불어넣을 수 있는 현장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수증에 함석헌의 강사료 수령인(印)을 요구하는 이는 성서·동양학회 총무를 맡은 박선균(朴善均)이었다. 함석헌은 잠시 멍했다. 그러나 성서·동양학회의 살림을 맡은 박선균으로서는 당연한 요구였다. 함석헌은 지참하고 있던 도장을 꺼내 박선균이 내민 영수증에 낙인을 했다.

함석헌도 박선균도 묘한 기분이었다. 후배 박선균은 당시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아니, 문 목사. 참 미안했지. 선생님더러 영수증에 도장 찍어 달라는 게 말이오. 허나 생각해보시오. 나는 성서·동양학회의 공인으로 공무를 처리해야 하는데, 선생님이라 해도 어쩔 수 없지 않았겠소.”
매사에 공인의식의 삶을 살아내는 이였다는 점에서 그는 함석헌을 너무 닮은 사람이었다. 필자가 이전에 함석헌의 제자로 두 씨이 있었다고 했지만 박선균은 함석을 만나기 위해, 그를 따르고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온 것 같은 사람이었다. 아직도 생존해 함석헌 사상의 숙고와 연해설(演解說)에 매진하고 있는 이여서 그를 언급하는 데 있어 조심스러운 바 없지 않지만 필자는 두 가지 사실을 들어 ‘함석헌의 사람’으로서 박선균을 좀 더 말하려 한다.

하나는 그가 지닌 함석헌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이요, 다음은 함석헌에 못지않은 자존(自存·自尊)의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이다. 그는 90년대 중국 산둥성 웨이팡시 산동방직직업대학(山東紡織職業大學)에서 한국어를 교수하던 시절, 그가 함석헌의 <씨의 소리> 편집장으로 일했던 10년의 역사를 묶어 펴낸 <씨알의 소리 이야기>에서 함석헌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생님은 고전 강좌 시간에 공자에 관한 말씀을 많이 가르쳐 주셨다.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는 꼭 ‘공자님’이라 하시고 ‘님’자를 빼는 일이 없으셨다. 그 한마디에서도 선생님이 공자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게 있다. 공자는 분명히 위대한 인물이다. 세계가 인정하고 자타가 인정하는 성인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나는 공자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공자님보다는 함석헌님을 따르고 싶다. ‘그것은 네가 한국 사람이고 또 가까이 모시고 있었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 하겠지만 단순히 한국 사람이고 가까이 모셨다고만 해서는 아니다. 나의 얕은 생각이라 할지 몰라도 공자님은 큰 인물이다.

그러나 함석헌님은 더 큰 인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함석헌 울타리 안에 공자는 수용할 수 있어도 공자의 울타리 안에 함석헌을 수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네가 공자를 얼마나 아느냐? 또 함석헌이 뭐 그리 대단한 인물인가?’ 공자를 얼마나 아느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함석헌이 뭐가 대단한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함석헌은 인물이다. 위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묻혀있는 보물 같이, 화씨의 박옥같이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보물이 드러나고 화씨의 박옥처럼 깨져서 구슬이 쏟아져 나오는 날, 함석헌은 드러나 빛을 발할 때가 반드시 오리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거의 확신에 이른 것이다. 어느 날 하루 아침에 갑자기 깨달은 것이 아니다. 오래오래 두고두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얻어진 결론이다.”

그는 말한다. 10억을 넘은지 이미 오랜 대국 중화의 대자산(大資産)인 공자보다 더 큰 사람이 험석헌 이라고!
‘함석헌의 사람’으로서 박선균의 두 번째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 폐간된 ‘씨의 소리’가 천우신조 속에 다시 복간되어 나오는 자리에서 이어가기로 한다.


>> <씨알의 소리>는 죽지 않는다

1970년 7월 28일, 함석헌이 그 ‘목적’을 담은 씨의 소리 발행 신청을 했을 때 문화공보부 당국자들 사이에 대혼란이 일었다. <씨의 소리> 정기간행물 신청자가 함석헌이기 때문이었다. 1964년 이전부터의 문공부 관리들에겐 5, 6년 전의 언론자유수호위원회법(言論自由守護委員會法)이 전광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언론자유수호연맹이란 함석헌 위원장에 장준하를 대변인으로 하여 출범한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그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조직된 범국민적 기구였다.

박정희와 그의 수족들을 제외한 정치, 종교, 법조, 교육, 문단 등 전 분야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박정희 정권을 향해 저항의 일자진(一字陳)을 쳤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갈수록 가중되어 가는데도 제야의 민주세력은 흔들림 없이 저항해 나갔다. 이 저항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비법으로 구상해 낸 것이 우리 헌정사상 초유의 소위 언론자유수호연맹(言論自由守護聯盟)이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특명 하에 제1야당인 민정당까지를 회유해 어렵게 표결에 붙여 통과시킨 법안이었다. 그런데 결전은 밖에서 일어났다. 각 신문의 발행인들이 이미 통과된 언론법(言論法)의 철폐를 격렬히 요구하면서 각계의 지도자들이 총망라되어 이 법을 악법(惡法)으로 규정하고, 그 철폐를 위한 투쟁 기구를 구성, 범국민 투쟁을 감행했다.

이 기구 이름이 언론자유수호연맹이었다. 윤보선, 박순천 등을 고문으로 위원장에 함석헌, 부위원장에 김상협, 모윤숙, 장이욱, 장준하를, 장준하는 대변인직을 겸임, 언론수호를 위한 투쟁의 깃발을 들었다. 500여명의 준비위원들이 결사적으로 임전의 자세를 갖추자 9월 10일 박정희는 드디어 언론자유수호협의회 대표들을 만나 그 회심의 거작(?)인 언론법의 전면 보류를 수용 그 싸움의 막을 내렸다.

함석헌이 신청한 정기간행물 신청서를 받아든 자 들은 치를 떨어야 했다. 맘 같아서는 불가, 반려로 정리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함석헌, 아 그 언론파동의 장본인, 국회에서까지 합의되었던 법안을 폐기시킨 반의회 주의자, 그것도 직접 ‘박정희 각하’의 입에서 기어이 “전면보류”를 받아낸 사람, 그가 발행하는 잡지가 얼마나 격렬한 반동을 해야 갈 것인지는 불문가지의 사실이었다.

결국 정기간행물 등록을 허락했고, 아니나 다를까? 5.16 세력이 부정적으로 대하는 “4.19는 혁명이다”면서 5.16은 “도둑”이라 해대니 더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억지로 덤터기를 씌워 아예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하겠다며 등록을 취소 처분했던 것인데, 그놈의 <씨의 소리>가 고법에서도, 대법에서도 “문화공보부의 씨의 소리 폐간처분은 재량권의 범위를 넘은 처사이며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하다”고 판결, 죽었던 <씨의 소리>가 다시 살아나 그 복간을 준비하게 되었다.


>> 이병린(李丙璘) 변호사

함석헌과 그의 사람들은 이 <씨의 소리>가 다시 살아나게 한 은인(恩人)을 잊지 못한다. 그가 바로 이병린 변호사다. 평생을 함석헌 연구로 낙을 삼아 살아가는 이치석(李致錫, 현 함석헌사상연구원장)은 당시의 이병린(李丙璘)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때 소송대리인을 자청하고 무료변론에 나선 이가 이병린 이었다. 오늘날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원로격인 그는 196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계엄령의 해제 요구, 삼선 개헌 반대를 위한 호헌선언문을 발표하는데 앞장섰고, 1970년대 유신체제아래서는 민주수호 국민회의 대표를 맡는 등 한국의 ‘의로운 변호사’의 표상이기도 했다.”


>> 박선균은 누군가?

대법원에서 문공부장관의 씨의 소리 등록 취소 처분의 취소가 확정되자마자 용산구 원효로 4가 70번지 함석헌의 거처에 ‘새 역사의 날개’로 날아든 이가 있었다. 박선균이었다. <씨알의 소리>를 복간하기 위해서였다. 70년대 이후 함석헌을 말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첫 사람을 꼽으라면 박선균이라 할 것이다.

박선균은 지금의 강남대학의 전신인 중앙신학을 졸업한 후 중신의 교무로 10여년 학교 살림을 맡아 온 실세였다. 그러나 1970년 뜨겁게 따르던 안병무가 학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전임 대우를 받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함석헌마저 학교의 강의를 그만두게 되자 자신에게는 이미 확실하게 보장되어있는 꽤 괜찮은 일자리를 내던지고 <씨알의 소리> 복간작업을 하게 되기까지 1년여의 실업(失業)의 나날을 살아야 했다. 박선균이 함석헌을 만나게 된 것은 그에겐 실로 천운(天運)이었다.

“함석한은 공자를 품을 수 있지만 공자는 함석헌을 품을 수 없다” 하는 이였으니 함석헌에 대한 그의 우러름이 얼마나 지극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할 것이다. 그는 지금도 그가 고교재학 시절에 함석헌으로부터 받은 4291년 12월 31일자 소인이 찍인 봉함엽서를 지니고 있다(현품은 함석헌기념사업회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음).

박선균은 1938년 강원도 평창군 호명리에서 태어나 향리에서 고교 재학 중 사상계를 통해서 함석헌을 만나게 된다. 1957년 3월 호에 실린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라는 글을 통해서 였다. 박선균은 고교시절 어린나이에 이 글을 두고두고 읽었고, 전문을 필기까지 해 읽고는 했는데 후에 그는 그때 그 글에 대한 느낌을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한다.

“그것은 다듬어서 낸 문체가 아니었다.” 다듬어서 낸 문체가 아니라면 그는 “그저 받은 대로 쓰는 이였다”는 말이다. 가세는 가난하기만 했고 부모를 통해 대학 간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 그래서 그는 무작정 상경을 한다. 그도 함석헌만큼이나 하늘을 믿고 사는 이였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이다. 그렇게 해서 서울에 올라온 박선균은 다행스럽게도 숙식이 제공되는 중앙신학대학의 장학생선발에 합격하게 되고 여기서 세계적인 민중신학자 안병무, 종교가요, 사상가인 함석헌을 만나 지극한 사랑을 입게 된다. 안병무는 쾌히 이 박선균을 ‘좋은 일꾼’으로 함석헌에게 씨의 소리 편집장으로 추천한다. 험석으로서도 아주 흐뭇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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