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59)

<씨알의 소리> 편집장

박선균의 또 다른 이름이 ‘씨알의 소리 편집장’이었다. 함석헌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4반세기가 흘렀고, 박선균이 <씨알의 소리>를 떠난 지 3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씨알의 소리>의 오랜 독자들은 씨의 소리 편집장 하면 영락없이 박선균을 떠올린다. 한동안 박선균이 <씨알의 소리>를 떠나있는 사이 편집장역을 맡은 이들 이들이 없지 않았지만 대체로 함석헌의 혼을 품은 이들은 아니었다.

“선균이가 있으니까….” 씨알의 소리 운영에도 어려움이 없지 않지만 박선균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함석헌은 든든해했고 “선균이가 있어야 하는데….” 박선균이 함석헌을 떠나있을 때는 함석헌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박선균을 그렸다. <씨알의 소리> 복간호를 만드는 박선균은 형언 못할 감회에 휩싸여야 했고,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에 신명을 바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함석헌의 면전에서 함석헌의 소리라면 가부간 함구하는 옛 며느리 스타일은 결코 아니었다. 외형은 아주 유약한 듯하나 속에는 이상하리만큼 ‘칼’을 품고 있었다. 1971년 11월호였는지 12월호였는지 씨알의 소리 기획위원회(위원 박선균, 채규철, 김제태, 진영상, 문대골)가 모였다. 이 기획위원회는 채규철의 요구로 함석헌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씨알의 소리 편집 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상설가구였다. 송년호와 신년호 편집방향을 놓고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다.

   
▲ 김제태 목사가 성서·동양학회 모임의 사회를 하고 있다.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함석헌 선생,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박선균 목사.

그때 그 토론의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으나 편집 내용과 방법에 대해 좀 지나치다 할 만큼 세세한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갑자기 박선균이 오른손을 펴들어 공중을 쫙 가르는 모션을 하면서, “아 그러면 저 편집장 못하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기획위원들은 물론 함석헌도 놀랐다. 그 이후 기획위원회는 누가 제안해서가 아니라 편집의 방향에 대해서 조언하는 기구로서 역할을 계속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박선균의 제량에 일임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함석헌마저도 모든 편집권을 박선균의 것으로 했다는 것이다. 어떤 장준하의 일대기(一代記)에는 “장준하가 <씨알의 소리>에 참여하면서 그는 원고를 청탁하고 편집까지 하는 실제 편집장이었다. 그 밑에 직원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교정과 제작사무나 맡는 정도이고 책임 있는 일은 장준하의 몫이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회

박선균이 크게 받은 또 하나의 축복(?)이 있다. 당대 재야의 확실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사들이 대거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위촉된 것이다. 1972년 1월 28일부터 30일까지 ‘세계평화의 길’을 주제로 안양소재 농민교육원에서 제1차 씨의 소리 독자 수련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수련회를 계기로 편집위원회가 구성된 것이다. <씨알의 소리>를 ‘한국인의 가슴’으로 그리기 시작한 이는 장준하였다.

이 답답하고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씨들에게 ‘그래도 죽지 않는다’는 생의 기운을 불어넣고 싶었던 장준하는 함석헌에게 넌지시 ‘편집위원회’ 구성을 건의했다. 함석헌이야말로 그런 구상을 벌써부터 해온 터였다. 생각은 있으면서도 일로 추려내는 데에는 서투른 함석헌의 구석을 장준하가 때맞춰 채웠다고 할 것이었다. 장준하는 자신을 포함해 8인의 명단을 함석헌 앞에 내놓았다. 이병린, 김성식, 천관우, 이태영, 김동길, 안병무, 법정, 계훈제!

함석헌은 더할 수 없이 고마웠다. 장준하가 고마웠고, 고난의 역사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동지들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함석헌의 심중을 깊이 읽은 장준하는 7인에게 일일이 전화나 혹은 직접 만나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이 되어줄 것을 청했다. ‘아니오’ 하는 이 없었다.

훗날 편집위원 중 유일한 여성위원이었던 이태영(한국 최초의 여류변호사)은 “<씨알의 소리>와 같은 격조 높은 잡지의 편집위원님들이 한결 같이 존경하여 뵙고 싶은 분들이라서 장준하 선생의 그 청이 황송하고 슬그머니 기쁘기까지 했다. 과연 그때의 편집위원 모임처럼 무게 있고 뜻있는 모임을 그 뒤로는 별로 가진 기억이 없다”라고 회고했다. 사실 그것은 이태영만이 아니었다. 하나 예외 없이 편집위원들에게 그 회는 잔칫집에 가는 날 같은 기분들이었다.

더군다나 박선균에게 있어 이날은 자신이 세상에 온 의미를 재인식하는 것 같은 날이었다. 그는 그가 후에 쓴 ‘씨의 소리 이야기’에서 이 편집위원회 구성을 <씨알의 소리>가 “천인만마를 얻은 것이었다”면서, 그 편집위원회의 유일한 간사로서 자신이 수행했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편집위원회가 모일 때면 필자는 나름대로 편집계획과 필자 선정을 해가지고 갔다. 그러나 한 번도 편집문제를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한 일이 없었다. 모이면 주로 시국에 관한 문제 아니면 국가와 민족에 대한 화제였다. 필자로서는 불만이었다. <씨알의 소리>를 어떻게 낼까에 대해서 구체적인 말씀들을 해주시면 참고가 되겠는데, 그런 말씀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가 내가 가져온 계획서를 드리면 그걸 앞에다 놓고 말씀은 다른 내용들이었다. 필자가 이런 내용을 친구들에게 말했더니 ‘<씨알의 소리> 편집회의야말로 위대한 편집회의다’라고 누가 말했다. 그때 필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성서·동양학회’의 역사적 과제

<씨알의 소리>가 복간되어 잡지로서의 자리를 굳혀가고 성서·동양학회의 노자강좌가 씨의 학당으로 자리 잡아 가면서 박선균은 더욱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다. <씨알의 소리> 편집장과 성서·동양학회 총무를 겸직해야 했기 때문이다. 장준하의 편집위원회 구성이나 김제태, 김영호, 박선균의 성서·동양학회는 자신들이 의식하고 시작한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두 역사(役事)는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 역사적 과제(歷史的課題)였다고 필자는 단언한다.

1972년 박정희는 10월 유신헌법을 공포한다. 국회를 해산하고 사법부의 기능을 중단시키고, 이제부터는 선거도 없다. 이후 <씨알의 소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탄압을 받게 되지만 박선균이 말한 대로 이제는 천군만마에 비견되는 편집위원회가 존재한다. 이 편집위원회 출범이 1972년 초였으니 그것은 마치 박정희 정권의 악정(惡政)에 저항하기 위해 예비 된 것 같았다.

다음해 1973년 장준하가 주도하는 ‘유신철폐 100만인 서명운동’이 함석헌을 제1번 서명자로 불을 지핀다. 동시에 성서·동양학회가 주관하는 함석헌의 노장강좌가 불을 뿜기 시작한다. 그곳은 학술을 숭상하는 학당만이 아니었다. 광란의 칼날에 맨몸을 내어대는 전술(?)을 익히는 곳이었다. 박정희가 자신의 영구통치를 위해 유신헌법(?)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론 소위 정신적 교회를 위한다면서 유교의 ‘충·효 사상’을 전략화하려는 그때 성서·동양학회는 함석헌을 그 지도자로 확신하면서 그가 강론하는 노장사상으로 맞불을 놓는다. 이때부터가 함석헌이 ‘씨’을 새 종교의 핵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하는 때였다.

이전에도 함석헌이 씨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지 않지만, 씨(이라는 말)을 알리는 일을 그의 소명처럼 하기 시작한 것은 <씨알의 소리>와 성서·동양학회의 ‘노자강좌’를 통해서였다. 함석헌이 어느 자리에서 ‘예수는 내 구주십니다’ 해서 그의 제자 장기려로 “선생님, 선생님도 예수를…”하며 울게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만 함석헌에게는 또 하나의 구주가 있었다. 노자와 장자였다(전집 20, p26).

이후 20여년 계속된 매주의 강좌를 준비할 때마다 헛삶을 용인하지 않는 함석헌은 그 준비에 진액을 쏟았다. 함석헌에게 있어 이 동양사상의 탐구와 갈파(喝破)는 성서·동양학회의 창립취지문에서 밝힌 대로 동양사상과 기독교사상 사이에 더할 수 없으리만큼 반듯한 가교를 형성해 냈다. 씨 사상 말이다. 함석헌의 노장은 일체의 가부장적 권위에 저항한다. 따라서 노장을 통해서 굳혀진 자유정신과 초월사상은 박정희가 강조하는 유교의 충효사상과 경제지상주의에 저항하는 불퇴전의 일선(一線)을 그었다.

“함석헌이 만난 노장사상은 ‘새 종교의 차원’에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박정희 정권의 이념적 토대를 근본적으로 허무는 사상적 무기”였다(김성수, 「함석헌 평전」 삼인 332).
<씨알의 소리>와 성서·동양학회! 그것은 함선헌이 씨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데 ‘좌우 날 선 검’이었다.

<씨알의 소리>에 실리는 장준하의 그 사상계지의 수난사

1972년 1월부터 장준하는 그의 분신이었던 사상계지 수난사(受難史)를 씨의 소리에 싣게 된다. 장준하는 그의 생명과도 같은 사상계가 어떻게 그토록 처참한 죽음을 당해야 했는가를 토로한다. 박정희는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이후 곧 이어 반 군정세력의 숙청을 시작했다.

특히 문공부는 그 최우선 정책으로 사상계 죽이기에 돌입한다. 박정희의 군부가 사상계 죽이기를 우선과제로 삼은 이유는 바로 다음달 7월호(6월호의 편집은 이미 끝나 있었음, 필자 주)에 실린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장준하는 그 수난사 첫 회의 머리 부분의 글 ‘수난의 시작’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하여튼 나의 ‘권두언’과 함께 함석헌 선생의 글을 실은 이 <思想界> 7월호(통권 96호)는 그 후(5·16 쿠데타 후, 필자 주) 이 나라가 되어온 역사와 함께 여러 의미로 나에게는 잊어버릴 수 없는 한권이다.

6·25 후 피난지 항도부산에서 이 나라 백성들이 살 길을 잃고 갈 바를 몰라 헤맬 때 감히 그 길잡이 지(誌)로서의 기치를 든 이래 만천하 애독자들의 절대지지와 성원으로 천하가 공지하는 자유당 치하 학정의 탄압도, 민주당 치하의 혼란과 경제 공황도 무난히 뚫고 오히려 청청히 이 나라 잡지사상 최장지령, 최고 부수를 지속해오던 <사상계>가 오늘날 이 땅에서 그 흔적마저 없어져 버리게 된 그 원인의 시발이 바로 이 7월호부터였으며 내가 본의도 아니면서 거의 발악적(?)으로 잠시나마 정계에 몸을 담지 않을 수 없게 된 원인의 시발도 역시 이 사상계 7월호로부터였던 것이다.

그 후 사상계는 점점 엄습하는 음성적 탄압에 견딜 수가 없게 되었으니…. 난데없이 판매루트를 봉쇄하는가 하면 반품공세를 퍼붓고 자금줄을 끊어 놓고, 세무사찰을 벌이고 제작관계 업자들의 감시와 사찰이 날이 갈수록 가혹 해 갔다(1972, 1월호, p39). 이렇듯 함석헌이 그의 소리를 장준하의 <사상계>를 통해 토해냈듯이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으로 기어이 <사상계>를 잃은 장준하는 그 수난사를 <씨알의 소리>를 통해 토해낸다.

이때 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편집장이 글자대로 삼위일체를 이루어 <씨의 소리> 교정원이 된다. 거기는 서열도 선후도 없었다. 함석헌의 글 교정을 장준하가, 장준하의 글을 함석헌이, 그리고 다시 바꿔 자신들의 글들을 보고 교정이 됐다 싶으면 편집장의 손으로 넘어가 OK 사인이 된다. 당시 편집장이 박선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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