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C 개혁은 절반승이었다-

1529년 10월 1일부터 3일까지 독일 마르부르크 성에서 루터와 멜랑히톤 등 독일 대표들과 쯔빙글리, 오이콜람 파디우스 등 스위스 대표들 수십 명이 ‘성찬론’에 대한 회담차 모였다. 그들 비텐베르크와 취리히 대표들 간에 팽팽한 접전이었다. 10월 1일 금요일부터 3일 밤까지 때로는 진지하고 또 격렬하게 토론했다. 자칫 파국이 올 수도 있는 지경에 몰리기도 했으나 그들은 방청객 자리에 앉아있는 일반 신자들 때문에 인내를 거듭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마르부르크대학교 의학교수 유리키우스 코르두스(Euricius Cordus)는 통렬한 루터, 점잖은 이오콜람 파디우스, 도량이 넓은 쯔빙글리, 웅변가 멜랑히톤, 경건한 슈네프, 용감한 부처, 충직한 헤디오라는 촌평으로 당시 회담장 모습과 함께 회담 대표들의 성격과 분위기를 스케치했다.

이 회담은 루터의 화체설(化體說:성찬 시 떡과 포도주가 즉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설)과 쯔빙글리의 상징설의 대립이었다. 특히 여기서 루터의 화체설은 로마(가톨릭)교회와 사실상 동일한 성찬론으로 이는 로마교회의 기본골격을 이루는 ‘미사’에 기초가 되는 교리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들(개혁교단 포함) 어디에도 화체설이 없는데 루터만의 독자적인 성찬론이다.

약속했던 10월 3일, 회담이 모두 끝났다. 그러나 차마 그냥 헤어지기는 너무나 중요한 안건이었기에 헤세 영주는 주일 밤 다시금 회담 대표들을 자기 숙소로 불렀다. 그러나 양측은 한 발짝의 진전도 없었다. 루터는 “나는 육체적 임재에 관한 나 자신의 견해를 변경할 의사가 추호도 없으며 죽는 날까지 이것을 고수할 것”이라고 했다.

답변에 나선 오이콜람 파디우스는 철학적 주장을 삼가고 성경에 호소한다고 말하면서 명백히 상징적 의미를 지닌 성구들을 인용하고, 특히 요한복음 6장 63절을 힘주어 인용했다. 첫 날부터의 양측 주장에 진전이 없었다. 떠나는 날 10월 4일 아침, 쯔빙글리는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루터에게 악수를 청했다. 루터는 그의 악수를 거절하면서 “여러분의 정신은 우리의 정신과 다릅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루터는 그날 이후 쯔빙글리파 개혁자들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이것이 16세기 종교개혁기 두 영웅(?)의 모습이었다.

성찬론으로 분열된 16세기 종교개혁, 그들은 다 함께 교황을 향해 ‘사탄의 자식’이라고까지 저주하면서 목숨 걸고 로마교회의 늪에서 교회를 구원했다는 16세기의 개혁자들이다. 우리는 성찬론 시비로 서로를 용납하지 못한 16세기 종교개혁(기독교개혁)은 절반의 실패요, 다른 표현으로는 절반승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16세기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기독교의 개혁을 불러야 한다. 특히 1세기의 요구인 만인제사와 매일매일의 예배공동체, 곧 생활공동체 실현을 통한 기독교의 완성시대를 향한 본격적인 개혁시대를 불러내야 한다.

더 이상 유대교 수준의 기독교, 요단강을 건너지 못한 율법종교로의 기독교에 머물지 말고 종말적 기독교의 실현을 해내려는 믿음으로 십자가 앞에 바르게 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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