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우루무치, 위구르 시장에서 물건 흥정하는 사람들

<당·고 전쟁 ①>

알로펜은 아침 일찍 장안 행 마차에 올랐다. 한혈마다. 젊은 사람이면 초코에서 둔황, 하서주랑을 건너 난주, 다시 길을 잡으면 장안까지 하루 안에 당도할 수도 있다.

알로펜이 서두르자 하였으나 황실 경호대가 이끄는 일행은 황제 당태종의 특명이라며 빨리도 좋으나 노령인 알로펜 주교의 건강을 살피면서 속도를 조절했다. 알로펜은 분초를 다투어 가야 한다며 서둘렀으나 경호대장 안서강은 주교 앞에서 미소로 답례하면서 조심스러운 여정을 계속했다. 투르판과 둔황 사이는 단숨에 달려왔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 알로펜 일행은 3일 후에 장안에 도착했다.

곧바로 궁성으로 들어간 알로펜은 당태종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폐하, 신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신을 벌하여 주소서.”
“아니오, 아닙니다. 내게 있어서 사부님이신 주교를 내가 어떻게 벌합니까. 그보다 어디 편찮은 데는 없으시오?”

“네, 폐하. 신은 강건하옵니다. 강성하신 황상의 용안을 뵈오니 신은 기쁘옵니다. 고구려를 응징하시기 위하여 불철주야 심려가 크실 것이오나 옥체를 늘 살피소서.”
“그렇소. 주교가 걱정해 주니 마음이 평안하오. 그렇지만 금번에는 응징이 아니라 저들 고구려는 지상에서 사라져주어야 합니다.”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있던 알로펜은 응징이 아니라 고구려를 멸망시킨다는 당태종의 결심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황제의 표정을 살피면서 평소부터 한 번쯤은 묻고 싶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황상이시여. 굳이 변방의 조그마한 나라를 파멸시키기보다는 굴복시켜 신하 국으로 삼아도 되는 것 아닐까요?”

말을 조심스럽게 했으나 당태종은 잠시 생각에 잠기듯 눈을 지그시 감고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당태종은 오른쪽 용상 팔걸이 부분을 주먹으로 툭 치면서 말했다.
“알로펜 주교! 주교도 그 같은 말을 하시는가? 혹시 당신네 종교에서도 불교나 힌두교처럼 비폭력을 앞세운답시고 적을 두둔하시오?”

“아, 아닙니다. 천하가 다 황제폐하의 발아래 있는데 누가 감히….”
“아니, 그럼 당신네 경교의 대진국도 짐의 발아래 있다고 믿고 있는가, 주교는?”
“그럼은요. 폐하시여!”

“그래, 그래서 내가 알로펜을 좋아하지요. 그러나 대진이나 파사, 또는 대식국까지 대당제국을 인정하는데 고구려가 말을 듣지 않아요. 그들은 엄격히 말해서 전부터 우리의 지방 토호국이야. 지방의 영주국들 중 하나란 말입니다. 그런 고구려가 지금은 대당제국과 맞서려하고 있으니 어찌 그들이 살아남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중국에 있던데 그 짝이로군요.”
“짐이 직접 출정합니다.”
“폐하, 그건 지나친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고구려가 오히려 자만하는 계기가 되고, 또 그들이 자기 과신에 빠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폐하는 고구려 정도의 나라를 공략하시러 전쟁터에 나가실 때가 아닙니다.”

“주교의 말에는 늘 예절과 충심이 들어있어 나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금번 고구려 정벌 과정에서도 당신과 지금처럼 대화하고 싶어 내가 목이 빠지도록 기다린 것이잖은가. 짐이 굳이 직접 정벌에 나서려는 것은 전 왕조가 네 번이나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수백만 명의 군사를 잃고 왕조까지 무너졌어요. 우리 대당 군사들이 자칫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전 왕조 꼴이 날수 있으니 나는 2백만 명쯤 대군을 이끌고 가서 단숨에 제압해버리겠소.”

“네, 네.”
알로펜은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 야심에 대해 평소부터 우려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의 한족과는 별도의 종족으로 당나라의 지배대상도 아니고, 고조선부터 이어오는 북방족을 이끄는 종족으로 알고 있다. 그들을 향해서 이웃해 살아가는 제국이 야욕을 부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전쟁불가를 요구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위치나 경교가 당나라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볼 때 자칫 내정간섭으로 비칠 수 있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당태종은 알로펜의 표정을 읽어본다. 턱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 쓸쓸한 표정이었다.
“주교는 혹시 내게 숨기는 게 있는가? 아니면 무슨 고민이라도? 무엇이든지 말해 보시오. 나는 제국의 황제로서가 아닌 이세민 개인의 이름으로 당신하고 대화하고 싶어요. 혹시 고구려 정벌에 대한 숨겨둔 의견이 있지 않나요?”

알로펜은 힘을 냈다. 한 번 부딪쳐보고 싶었다.
“폐하! 저에게 어리석은 말을 골라서 한다고 꾸짖어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고구려의 숨통을 끊는 것은 생각을 더 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왜 그런가?”

“폐하의 말씀에 따르면 고구려는 폐하의 하늘같은 은혜를 힘입어 자기 분수껏 살아갈 수 있게 했으면 합니다. 그들이 대당과 마주쳐도 주눅 들지 않음은 달리 생각해보면 그들의 자존심이 아니겠습니까.”
알로펜의 말에 불편함이 없지 않았으나 황제는 이해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래요… 자존심이라….”

황제는 알로펜을 바라보면서 소리 없이 웃는다.
“황제 폐하. 어찌 이 늙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시나요. 두렵습니다.”
“아니오. 그러지 마시오. 주교는 나의 신하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나라 사람도 아니지 않소이까. 더구나 하늘 아래 있는 인간의 생명들을 고루 살펴야 하는 하늘의 선지자가 아니오. 그런 신분의 인물이면 더 심한 말을 해도 제왕으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정의라고 봅니다.”

“폐하, 참으로 크시옵니다. 폐하는 대왕이 분명합니다. 고구려 따위의 변방나라에 관대하시니 이는 하해와 같은 은혜이옵니다.”
“아니, 알로펜 주교! 그렇다고 내가 고구려를 용서하겠다는 것은 아니오이다. 그들은 크게 응징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이죠. 그들은 대왕폐하의 가르침을 받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좋소. 그럼 고구려 이야기는 그만하고 당신네 종교이야기 좀 해보시오.”
“네, 폐하! 저희는 폐하의 하늘같은 은총을 힘입어 장안은 물론 낙양 등 주변 도시까지 전도자를 이미 파송했으며, 앞으로는 동남방 변경으로도 파송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그런데 금번 주교가 중앙아시아와 서역 도시들을 순방한 뜻은 무엇입니까?”
“네, 제가 금번 초코국이나 사마르칸트에 가서 제자들을 교육시키고 왔습니다. 이슬람이라는 새 종교가 등장해 우리의 등을 늘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와 정치를 단순일치시키는 호전적인 종교지요. 폐하의 제국과 저희 경교 입장에서도 제국의 후방을 방어하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아, 그런가요. 과연 주교는 당나라에서도 충신이구려.”
“황공무지로소이다.”
알로펜은 약간 미묘한 기류를 의식했으나 당나라 이후까지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는 이슬람 종교 세력을 의식한 선교전략이었으나 기독교(경교)와 당나라 안위까지도 복합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문제 될 이유는 없었다.

알로펜은 황제가 자기를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충분한 대화를 이루었다고 확신하면서 대진사로 돌아왔다. 긴장을 풀지 못하고 선생님으로부터 구두시험을 보는 초등학생 같은 심정의 시간이었다.
“주교님, 조금 쉬세요. 피곤해보이세요.”
마리아 교수였다.

“황제가 전보다 민감해졌어요. 왜 그럴까?”
“그걸 모르세요?”
“난 잘 모르겠어요. 오늘 조심스러워서 신경이 많이 쓰이더군요.”
“황제가 민감해진 것을 모르시다니 주교님답지 않으시네. 두 분이 다 초조병이라 해야 하나 뭐 쉽게 말하면 황혼병이라고 하면 더 좋겠군요.”

“뭐요? 황혼병? 그래, 짐작이 가는군요.”
“당태종은 고구려가 전 왕조인 수나라를 멸망시킨 일을 떠올릴 때면 그 자신이 늙고 노쇠해 가는 현실이 늘 조급하겠지. 그리고 나 역시 늙고 노쇠하고, 또 병들어 죽을 날이 멀지 않으니 그럼 그때 마리아 교수님을 홀로 두고 어찌 갈까를 심히 걱정하겠지요. 헛허….”

알로펜은 말해놓고서는 어린애처럼 웃는다.
“농담이 지나치네요. 언제 주교님이 내 걱정했다고 그래요. 이제 우리는 70살이 넘었어요. 곱게 죽을 준비나 해야지 무엇을 더 망설이겠어요. 나는 평생 주교님이 언제쯤 날 사랑해 주시려나, 하면서 많이 기다리고 기대하던 때도 있었죠. 그러나 이제는 내게 아무리 달콤한 유혹을 하신다 해도 내 인생의 석양을 무슨 수로 되돌리겠어요. 그래서 쉽게 하는 말이면 아무리 주교님이라지만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좋다, 좋아…. 우선 나 좀 쉬고 싶네요.”

“네, 그러세요. 서재에 자리 봐두었습니다.”
“안토니 사제는 왜 안보입니까?”
“그분은 낙양으로 가서 그곳에서 잘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열정을 가졌더군요. 주교님은 이제 제가 사라져도 끄떡없을 것 같아요. 안토니뿐 아니라 모두들 자기 위치에서 최고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교님이 제자 교육을 잘 시키셨음을 확인하는 날들이었습니다. 참, 주교님. 영부가 영특해요. 이 아이가 장차 주교님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 아이가 지금 열일곱 살인데 앞으로 10년 또 10년만 더 성장하면 우리들의 미래 지도자 자질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몇 명 더 경쟁시키면 더욱 좋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웃한 또래들을 열심히 찾아봅시다.”
“주교님이 여기 계시지 않을 때 제가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드보라를 좀 더 가까이 두세요. 그가 주교님께 힘이 많이 될 것입니다.”

“아니, 이제는 얼굴도 붉히지 않으면서 별소릴 다하시네. 내가 왜 드보를 곁에 둡니까? 마리아가 내 옆에 있는데!”
알로펜은 실제로 그의 옆에 서있는 마리아를 덥석 안았다. 그녀의 볼에 키스하고, 이어서 입술을 찾는데 마리아가 그를 침대 바닥에 밀어버린다.

“나, 마리아뿐이오. 딴소리하지 마시오. 마리아 교수가 내 품에 안기는 것을 사양하다가 세월 반백년쯤 허송한 것도 억울한데 나를 흔들지 마시오. 나 순결과 순정뿐인 사람입니다.”
알로펜은 피곤한지 침대에 누워 마리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네, 다 알아요. 그러나 우리는 둘 다 너무 많이 늙었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제가 주교님의 품은 지켜낼 터이니 드보라는 조수로 가까이 두자는 겁니다. 사람 목숨 누가 압니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주교님을 돕지 못하고 무너지면 누가 나의 소중한 주교님을 보좌합니까. 주교님, 저는 저의 모든 소망이나 현실로도 주교님 한분뿐입니다. 주교님은 내 목숨보다 백배 천배 소중합니다. 그래서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이니 나를 경솔한 여자라고 흉보지 마세요.”

“나도 다 알고 있소. 내가 어디 목석입니까. 더 말 안 해도….”
“말씀 잘하셨네요. 어디 목석뿐인가요. 철벽이죠. 마리아가 지금은 이렇게 늙어 쪼그라들었지만 처음에도 그랬나요. 나 알로펜 처음 만났을 무렵 다마스커스에서 두 번째라면 서러운 미모였어요. 아시죠? 그때 보았잖아요. 그런 미녀가 당신만을 바라보면서 50년을 한눈팔지 않았으면 열녀로 칭송이라도 해줘야지 어떻게 쭈그렁 할멈으로 살게 하시나요.”

“어디, 어디. 그래, 다시 봐도 미인이 틀림없구만 왜 쭈그렁 타령을 반복하는고, 어디 한번 만져볼까.”
알로펜은 거의 평평하게 누웠다. 베개를 모로 세워 머리만 조금 높인 채 두 손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으나 곧 그의 팔에서는 힘이 빠져 나가고 눈도 반쯤 잠겼다. 그러나 그의 구레나룻 속에 숨어있는 근엄하고 준수한 얼굴에는 미소가 행복한 진달래꽃처럼 잔뜩 피어올라있다.

피곤에 지친 알로펜, 이제는 사랑의 감정을 곧잘 표현하는 마리아의 평생사내가 안쓰러워서 마리아 교수는 눈물이 핑 돈다. 잠이 들어버린 알로펜 가까이로 가서 입으로 그의 입술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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