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도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하여’, 또는 ‘역사 예수의 현재’를 발견해야 한다.

어려운 말이다. 말을 어렵게 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장성한 분량이란 바울 선생의 용법인데 믿는 성도의 최대 가능성의 표준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까지’라는 뜻의 표현이다.

얼마 전 여론 통계 기관에서 발표한 내용 중에서 기독교 신자들의 신뢰도가 타종교에 비해 뒤진다는 수치가 있었다.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신뢰도를 높여야 하겠다고 다짐한다.

신자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신자 중에서 ‘목사신자’들이 더욱 큰 헌신의 단을 쌓아 주어야 한다. ‘저 사람을 보면 예수 냄새가 난단 말야’ 할 수 있는 사람, 요소요소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기독교에 용기를 주는 ‘저 사람’, ‘저 사람들’이 있어야 하겠는데… , 라는 신뢰를 주는 신자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예수를 구세주로 믿어 한평생 살아가며 만족할만한 헌신의 탑을 쌓고 싶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맹목적인 용기가 아니라, 기독교가 우리 사회 공동체 안에서 타종교에 비해 뒤떨어진다 하니, 그게 내 탓인 양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이 심히 불편하다.

죽으면 이 육신은 지, 수, 화, 풍으로 사라진다는 옛사람들의 지혜담도 있거니와 한번 사는 인생인데 흔쾌히 만족할만한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를 고민해 보자.

‘나를 믿는 자여! 나의 하는 일 너도 할 것이요, 어떤 경우는 나보다 더 큰일도 할 것’이라고 예수 말씀하셨으나 갈 길만 바쁘고 삶의 매듭은 참 쉽지 않구나.

인생이란 혼자 사는 것이면서도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오고가시면서도, 겨우 공생애 중반쯤 되어(마 16장)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이 나를 죽일 거라고 말씀하신 뒤로는 마치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건적 발언을 하시며 서두르시던 예수님을 생각해 본다.

내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사람들 속에 뭐가 들어있는 것을 (잘) 알기에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셨다. ‘들소리’에 <無然>의 이름으로 글을 오래 써왔으나 이제는 이렇게 나 자신을 질책하는 글을 써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예수의 십자가 비슷한 방법으로 죽을 수 있는 은총이 없을까?

십자가는 예수님의 독점물이 아닐 터인데, 분명히 저마다 자기 십자가가 있다 하셨는데 길은 어디로 열려있을까? 겨우 100년 인생인데, 그 세월이 부담스러우면 인생을 잘 배웠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들소리’를 읽는 이들 가운데 내 마음에 자리한 아픔을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한때는 방주 120년 간 지으면서 미친놈 소리 들었던 노아가 그리웠고, 모리아에 100살에 낳은 자식을 바치면서 마치 자기 인생을 묶어서 불의 제단을 만들었던 아브라함이 부러웠으며, 그 중에 예수 십자가 죽음이 가장 멋있고 자랑스러웠었다. 그러므로 죽어서 사는 것이면 죽음인들 두려울 것이 없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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