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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의 소리〉는 그렇게 살았다!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60)
문대골  |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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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호] 승인 2015.02.12  14:2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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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알의 소리> 1972년 4월호 이야기

<씨알의 소리>1972년 4월호 발행엔 장준하, 박선균, 문대골, 박상희가 다 동원되었지만 주역은 단연 업무부의 박상희 양이었다. 박상희 양은 1971년,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衛戍令)이 발동하면서 군부세력에의 저항이 빌미가 되어 한신대학 재학 중에 제적(除籍) 당한 학생이었다.

박상희 양이 <씨알의 소리> 일꾼으로 일하게 된 것은 한국에 청십자 운동을 최초로 도입한 채규철을 통해서였다. 1971년 학생 박상희는 학교에서 제적당하게 되는데 그 두 해 전 1969년 3선 개헌 저지 투쟁이 그 도화선이었다. 1971년 4월 대통령선거 후까지도 학생은 물론 노동자, 농민, 정치인, 광범위한 제야인사들이 연대하는 전국적인 저항의 불길이 거세게 번지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드디어 수도권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해 3선 개헌 및 군부체제에 불응하는 학생주동자 173명을 제적시키도록 문교당국에 압력을 가하면서 각 대학에 점령군을 투입했다. 한신대학 같은 경우 전 교수들이 학생들의 제적을 거부했지만 군사정권의 하명(?)엔 방법이 없었다. 학생 박상희 역시 군사정부가 문교부에 제적시키도록 지명해서 특명을 내린 173명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1946년 전북 진안 출신으로 전주에서 성장했다. 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한신대학에 진학했는데, 학생 상희 양이 함석헌의 이름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뜨거운 민족 사랑의 가슴을 지니고 역사교사로 살아온 아버지를 통해서였다. 아버지는 아주 열심 있는 <思想界> 독자였다.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상희 양은 이렇듯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통해서 사상계를 접하게 되었고, 특히 아버지가 1985, 8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두고두고 애독해서 상희 양 역시 무거운 관심을 지니게 되었다.

학생 박상희는 제적된 중에도 수유동산(한신대)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날도 늘 하던 대로 학교에 나갔는데, 그때 마침 특강을 나왔던 채규철의 강의를 듣게 되었고, 박상희로부터 3선 개헌 반대투쟁으로 제적당한 사실을 전해들은 당시 <씨알의 소리> 기획위원이기도 했던 채규철은 흔쾌히 상희 양을 함석헌에게 천거해 <씨의 소리> 업무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 업무부장 문대골(文大骨)과 박상희 양

   
▲ 1972년, 박상희가 중앙정보부의 불법압류 직전에 지켜 낸 <씨의소리> 4월호 /1972년, 김제태가 중앙정보부의 감시하에 인쇄, 제책해 낸 5월호

업무부장 문대골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당하는 사건이 발생(1. 3)하면서 <씨알의 소리>는 거센 회오리에 휩싸이게 된다. 종로서적센터, <씨알의 소리>와의 일방적 총판 해약(1. 15), 삼명인쇄소 일방적 해약 통보(1. 22), 신년호 판금 조치 당함(2. 3), 전광산업신보(電光産業新報)와 인쇄계약체결(2. 29), 시중 서점에 배본된 2, 3월 합본 호 3천부 당국에 의해 압류 당함(3.29).

전광산업신보사 인쇄 계약 해약 통고, 문공부 인쇄인 시정 통보 요구(4)…(박선균 편 <씨알의 소리 이야기>, ‘<씨알의 소리> 창간 20주년 발자취’ 158, 159쪽).
<씨알의 소리>는 살 수 있어 산 것이 아니었다. 죽지 못해 산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삼명인쇄의 (박 정권의 탄압에 의한) 일방적 계약 해지로 인해 어렵게 어렵게 전광산업신보를 접선, 계약을 성사시키고 3월호를 출판했는데 3월 한 호를 내고는 ‘씨의 소리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4월호 한 호의 발행만은 인쇄소를 알선해주겠다면서 이전 출판비의 배에 달하는 금액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허나 어쩔 수 없이 “좋다” 했고, 안내해 준대로 원고를 가지고 을지로의 한 영세한 인쇄소로 달려가서 <씨의 소리> 4월호의 인쇄를 맡겼는데, 또 여기서 사건이 터졌다.

인쇄는 끝났는데 인쇄물 전체를 수사기관에 압류당한 것이다. 문 부장은 용달차를 불러 압류된 <씨알의 소리> 미제본 접전지를 용달차에 실어내면서, “어느 놈이거나 간에 <씨의 소리> 인쇄물에 손대는 놈 있으면 너 죽고 나 죽는다”며 고함을 질러댔다. 문 부장의 고함이 효력을 발하는 듯 했다. 문 부장은 청계천에 평소 교분을 나누는 한 제책사가 있었다. 그는 무조건 용달차를 청계7가로 몰았고, 그 제책사에 이르러 비용은 충분히 줄 터이니 시급하다면서 제책을 간청했다. 그런데 바로 그 제책작업이 시작되려는 찰라 중앙정보부의 홍(洪) 조사관이 이 제책작업 현장에 나타난 것이다. 모든 출판사, 인쇄소들이 예외 없이 중앙정보부의 통제 하에 있을 때였으니….

다시 박상희의 이야기다. 문 부장은 다시 그 현장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연행되어 갔고, 현장에 함께 있던 박상희는 두려움 없이 인쇄물을 지켜내면서 재빨리 이 사실을 본사에 알렸다. 보고를 받은 편집장 박선균이 장준하와 더불어 현장으로 달려왔다. 상희 양은 한결 같이 제본되지 않은 그 인쇄 전지를 타고 앉아 지키고 있었다!
이 인쇄 전지는 그대로 용두동 소재 장준하의 집으로 옮겨져 온 식구들이 비밀리에 전지를 그대로 접어 표지를 씌운 채로 전국의 독자들에게 발송됐다. <씨알의 소리> 창간 2주년 기념호 이야기다. 후에 박상희는 ‘다시 그리워지는 함석헌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함석헌 문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일로 인해 저는 개인적으로 <씨의 소리>에서 일할 수 있는 일꾼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한 셈이었습니다.”
지금 그 박상희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로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 장준하특별법제정 공동대표로 두 스승의 제자로서의 길을 의연히 가고 있다.

# <씨알의 소리> 1972년 5월호 이야기
  ‘극비의 인쇄추진단’

<씨의 소리>의 발행은 전쟁이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폐간, 복간, 다시 전두환 정권하에서 폐간, 복간이 반복되었다. 그런데도 함석헌이 하는 말은 단언이었다. “그래도 해봐야지!” 두 정권이 한결 같이 휘두르는 칼날이 언론이었다. “딴소리”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이 하는 소리는 언제나 “딴소리”였다. 정권에 혈안이 된 장본인들이 그 함석헌, 그 <씨의 소리>를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씨의 소리>는 안 된다.” 그것은 가히 지존자의 명(命)이었다. 그런데도 함석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잡지는 그만둘 수 없다” 한다.

이때가 업무부장 문대골이 실제 <씨의 소리> 업무부장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때다. 1972년 5월호의 출판을 목전에 두고서였다. 더 이상 버틸 수도, 방법도 없어서였다. 그런데도 <씨의 소리>는 계속된다. 극비의 ‘인쇄추진단’이 뜬 것이다. 그 대표 격의 인물이 이미 언급한 바 있는 함석헌으로 하여금 장장 20여 년 동안 일심으로 동서의 가교를 위해 몸, 마음 드려 헌신하게 한 ‘성서·동양학회(聖書·東洋學會)’ 설립 멤버의 일인으로 그 ‘성서·동양학회’의 초대회장을 역임한 녹촌(綠村) 김제태(金濟泰)였다. 함석헌이 영원히 씨의 혼 속에 든 후, 후에 그를 그리는 추모문집으로 ‘다시 그리워지는 함석헌 선생님’이 발간되는데, 거기 김제태가 쓴 함석헌사(咸錫憲史)에 길이 남겨질 두 역사적 사실이 담겨 있다. 두 사실이 하나처럼 함석헌의 사람들에겐 “육의 심비(肉의 心碑: 고후 3:3)에 새겨두어야 할 사실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중 하나가 ‘성서·동양학회’의 창립과 그 역사의 증언이고, 다른 하나가 지금 바로 필자가 말하려는 ‘1972년 5월호 이야기’이다. 실제로 업무부장이 빠져나가버린 <씨의 소리>는 말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이때, 정말 비밀리에 꾸려진 것이 ‘4인 비밀 인쇄 작업단’이었다.

장준하와 박선균 그리고 김제태 부부가 그 작업 단원, 단장이 김제태다. 투쟁형이라기보다는 기획형인 김제태였다. 그는 반정부의 전선보다도 일을 구상하고 꾸며내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만큼 그는 주변에 글쓰는 이, 책 만드는 이, 인쇄업하는 이 등 내로라하는 많은 지인들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주변이 자연스럽게 김제태에게 힘을 실은 것이다.

1972년 <씨의 소리> 5월호 원고가 김제태의 손에 넘겨졌다. 그런 후 한 달 동안 <씨의 소리>는 폐간된 잡지사를 방불케 했다. 함석헌도 일의 진행 과정을 보고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편집장 박선균 역시 진행과정을 제대로 파악 할 수 없었다. 일은 철저히 김제태의 손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의 수족으로 그 싸움에 동참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의 아내 임영희(林英嬉)였다. 만일 김제태와 임영희의 손에 있는 원고를 정권의 하수인들에게 빼앗기게 되는 경우, 잡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김제태는 물론 그 아내 임영희까지도 문 부장 꼴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김제태는 지금도 그때의 을지로 섭정동 황해도 출신 실향민으로 가지가지 역경을 헤치고 인쇄업에 성공했던 유사장을 깊이 기억하고 있다.

김제태는 원고를 유 사장에게 넘겨주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 나와 연락을 뚝 끊고 있다가 10여일 후 교정지를 넘겨받아 단 두 번의 교정을 거쳐 박선균 편집장의 OK를 거쳐 서둘러 여러 과정을 진행시켰다”. 문제는 인쇄만이 아니었다. 이제 인현동의 ‘삼성제책’으로 가야 한다. 일반 택시를 이용, 혹시나 기관원들의 미행을 대비해 두 차례나 인쇄물들을 옮겨 실으며 기어이 1972년 5월호 제책과 발송에 성공했다. 그 큰 두려움을 이기고 한 전선의 동지로 그와 그 시종을 함께 한 사람이 바로 그의 아내 임영희였다.
“너무 무섭고 떨려서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아내 임영희의 술회였다.

 

   
▲ 문대골 목사

 

 


 

생명교회 원로 목사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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