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까지의 역사는 기득권에 의해 오도된 역사였다.
이제는 씨이 역사의 주(主)로, 그 역사를 이루어가게 될 것이다.
역사의 주역인 씨, 씨로 이루어져갈 역사,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25분. 어떤 이들은 이날,
이시를 함석헌이 죽은 날로 기억하고 또 이후에도
그렇게 기억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죽은 것이 아니다.
새로 쓰여지는 민중사(民衆史),
그 씨들의 혼이 되어 씨의 역사를 열어낼 것이다.
씨 함석헌! 씨은 죽지 않는다!” 

 

   

▲ 함석헌은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에서 여든아홉 해를 머물렀다.

사진 : 김성수의 <함석헌 평전>에서

한국 기독교의 경우 예수를 우상화한지 오래다. 예수의 도를 체화함으로 끊임없이 역사의 현장에서 예수를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저 창공 어느 곳에 유폐시켜놓고 어느 때, 때가 되면 그가 재림해서 세상을 올곧게 통치하게 된단다. 예수의 역사에 그보다 더한 반동은 없다. 네 몸을 참에 바침으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삶에 턱없이 무지하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한국의 현대사에 죽음을 이긴 오직 한 사람이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 온갖 악의 통치를 이겨낸 한 사람이 있었다. 필자는 그 한 사람이 함석헌이었음을 주저하지 않고 갈파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한다.

필자는 그 포악한 일본의 무단통치 아래서 조선의 역사를 가르쳤던 함석헌의 정주 오산학교 10년의 교사생활을 오히려 외도(外道)였다고 말했다 그 함석헌의 역사 교사 생활 10년이 처절하기 그지없는 저항의 연속이었던 것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함석헌의 그 10년이 관(官)이 주도하는 제도권 아래서의 삶이었다는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그의 나이 열여덟이 되던 1919년 3·1운동의 학생주도자로 참여했던 것이 문제되어 3·1행위와 같은 불온한 행위를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는 학교당국이 요구하는 각서를 거부하고 학교를 아예 자퇴하고 돌아서면서 “관(官)이라는 것처럼 더러운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관과는 원수가 됐다”(<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74~78쪽 참조, 삼중당, 1964. 3. 1) 한 함석헌 아니었나? 그랬던 함석헌이 동경 유학에 고등사범을 하고 귀국하던 길로 오산중학의 역사교사로 부임, 제도권에 예속되어 10년을 살았으니 그걸 어떻게 공(公)생애라 할 것인가?

그랬다. 그것은 분명한 외도였다. 함석헌을 쓰려는 하늘의 뜻은 결코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늘은 그를 완전순도(完全純度)의 씨로 쓰기로 했다. 하늘이 함석헌을 순 씨로 쓰기로 했다면 이제 함석헌을 위해 하늘이 할 일은 함석헌을 씨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하늘은 함석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한 것이다. 영원한 ‘들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눈에 처절한 실패자로 살게 하는 것이었다. 모든 인습, 전통, 체제, 제도, 상하고저, 질서니 체면이니 하는 일체의 것을 훨훨 벗겨 맨몸, 맨살, 맨 사람이 되게 하는 일이었다. 1938년 3월 그는 국가라는 것을 비롯해 일체의 틀을 깨고 나왔다. 자유, 자유, 자유 그리고 평등과 공존, 그래서 누리게 되는 영원한 평화….

그의 씨 사상은 모든 체제, 제도, 구조의 해탈이 준 하늘과 땅의 선물이었다. 만일 함석헌이 국가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이니 종교니 하는 틀 안에라도 있었다면 함석헌의 씨알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그가 세상에서 철저히 벗은 자로, 맨몸으로 씨 속에 들었다. 그날이 1989년 2월 4일 그리고 새벽 5시 25분이었다. 1989년 2월 4일은 함석헌이 죽은 날이 전혀 아니다. 그의 꿈, 그의 한이 이루어진 날, 씨들의 가슴에 영원한 씨로 안긴 날이다. 누가 함석헌을 죽었다고 말하는가?

 

  함석헌, 그가 살아있다는 수많은 증거들

1. <咸錫憲 全集>(함석헌 전집 전20권, 한길사 1980~1988)

안병무(安炳茂)를 위원장으로 계훈제(桂勳梯), 고은(高銀), 김동길(金東吉), 김성식(金成植), 김용준(金容駿), 법정(法頂), 송건호(宋建鎬)를 편집위원으로 하여 장장 7년에 걸쳐 출판된 <함석헌 전집>이 그것이다. 이 전집이 특별히 가치를 지니는 것은 이 전집 자체가 함석헌이 생존해있는 동안 함석헌 자신의 교정과 통독을 거쳐 나왔다는 사실에서다. 함석헌의 역사를 지켜내고 증언해가는 데 이 <함석헌 전집> 20권은 독보적인 자료라 할 것이다.

이 전집의 발간에 가히 심신의 기여를 한 사람이 출판계에서는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도서출판 한길사의 김언호다. 역사의 사람 함석헌이 김언호를 만난 것, 출판인 김언호가 함석헌을 만난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헤아리기 어려운 축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언호는 그의 글 <시대에 우뚝 선 큰 사상가의 책을 만들며>에서 <함석헌 전집>의 역사와 그 선집을 맡아 간행하게 된 감회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함석헌 전집> 전 20권이 완간되는 데는 총 7년의 세월이 걸렸다. 한국 현대사에 우뚝 서는 사상가 함석헌 선생의 저작 전집을 위한 편집위원회가 구성된 것이 1980년이었고, 한길사가 편집위원 안병무 박사와 전집 간행을 협의하기 시작한 것은 1981년 3월쯤이었다. 그 첫 권인 <뜻으로 본 한국 역사>의 편집 작업에 들어간 것이 1982년 가을이었으며 1983년부터 그것이 간행되기 시작했다. 그 마지막 권인 <씨의 옛글 풀이>가 1988년 1월에 나왔으니 첫 권이 나오기 시작하여 완간하는 데에만 5년이 걸렸다. 함석헌 선생의 방대한 사상을 전집으로 간행해냈다는 것은 출판인으로서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이다. 전집 작업을 시작하면서 나는 선생을 늘 가까이 모실 수 있었다. 선생의 말씀과 행동을 옆에서 보고 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감동적인 보람이었다. 선생의 저작 전집이 간행되는 1980년대 초·중반은 민족·민중 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는 혁명적 시기였다. 출판운동도 혁명적인 모습으로 진전되었고 나는 그 와중에서 오직 책을 위하여 책과 더불어 출판문화운동의 현장에 서있었다. 이 고단한 혁명의 시기에 한길사가 함 선생의 저작 전집을 완결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함 선생의 글을 읽고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사상계>에 주로 발표되는 선생의 글은 부패한 군부독재에 눌리고 있는 세상을 온통 시원하게 만드는 큰 숨통이었다. 선생의 거침없는 말씀으로 모두들 정서적·정신적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2. 세계 철학자 대회(世界哲學者大會, 2008 서울)

2008년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서울대학교에서 제22차 세계 철학자 대회가 열렸다. 세계 철학자 대회는 그야말로 대회라 하기에 부족함 없는 집회였다. 매 5년 간격으로 개최되는 집회로 서울대회는 22회째의 대회였다. 100년이 넘은 학술기구이다.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철학자 대회에는 97개국에서 2300여 명의 철인·철학자(哲人·哲學者)들이 모여들었다. 지난 100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개최되어온 이 대회가 아시아권에서는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이는 세계가 철학을 서구중심으로 이해해왔다는 반증이며, 동시에 동양사상·동양철학의 몰이해내지는 경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랬던 그 세계 철학자 대회가 동양의 한국 서울에서 열린 것이다. 더군다나 그 대회의 주제가 ‘오늘의 철학을 다시 생각한다’였다.

당시 한국의 조직위원장 이명현 박사는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철학적으로 성찰함과 동시에 21세기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하여 이 시대 위대한 철학자들이 머리를 맞댈 것”이라고 하면서 “이번 대회의 소중한 의미가운데 하나는 한국의 철학자들이 동아시아의 유서 깊은 철학적 전통을 바탕으로 오늘날 철학의 성격과 역할, 책임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성찰을 세계 철학계에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피터 캠프(Peter Camp) 국제철학연맹총재는 국가단위를 넘어서는 세계문명의 발전과 연관된 문제, 갈등, 불평등 그리고 불공평 앞에 선 인류가 가장 높은 수준의 사고가 무엇인가를 전 세계에 보여주겠다는 선언으로 대회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주목할 내용이 있다. 97개국의 2300여 대표 철학자들이 모여 ‘오늘의 철학을 다시 생각한다’(Rethinking philosophy today)는 그 주제의 ‘다시 생각한다’는 그 핵심이 바로 ‘함석헌과 유영모의 씨 사상’이었다는 것이다. 대회에 참석했던 2300~2500여 명의 철학자·철인들이 ‘함석헌의 씨 사상’의 씨앗을 품고 동서남북 자기네 땅을 찾아 돌아간 것이다. 그들이 품고 간 그 씨앗 잘 심어 가꾸어낸다면 새 역사, 새 세계의 싹이 터오를 것이다. 들에 뿌려지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함석헌이 그렇게 그리던 씨의 세계가 열려올 것이다!

 

3. ‘성서·동양학회’ 1세대가 그리는 함석헌세계평화센터·평화공원

박정희가 그의 영구집권을 꿈꾸면서 국민(?)들을 소위 교도(敎導) 운운 하면서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을 만들어 국(國)의 민(民)을 강요하는가하면 유교의 충효(忠孝)를 약용해 국민(?)을 오도하려 획책할 때 함석헌은 노장의 자연·자유·자활을 주제로 박정희의 거짓 책략에 저항, 박정희의 독재치하는 물론 전두환 군인정치의 마감기까지 한학회를 열어 끈질긴 저항을 계속했다. 그것은 함석헌이 죽을 때 까지 계속된 학당이었는데, 이 학회를 이름 하여 성서·동양학회라 했다. 이 성서·동양학회를 발기, 발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20여 년 동안 그 운영을 이끌었던 1세대들이 ‘함석헌 다시 모시기’에 매진하고 있다.

이들이 ‘함석헌 다시 모시기’의 구체적인 운동으로 일으키고 있는 것이 ‘함석헌세계평화센터’ 건립과 ‘함석헌세계평화공원’ 조성이다. 이 운동의 일선에 선 인물이 이미 <함석헌 전집>에서 밝힌 바 있는 한길사 대표 김언호다. 평화센터와 평화공원의 설립 예정지는 경기도 파주시 통일동산 예술인마을 헤이리(이 헤이리는 김언호 대표 기획·추진으로 이루어진 마을임·필자주)와 불과 500미터 거리의 통일동산 중에서 빼어난 구역이다. 특히 김언호는 이곳에 우람하게 세워질 센터와 공원의 설립에 중심을 모으는 이다.

“함석헌 선생님의 삶과 사상, 정신과 실천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 현대사와 민족 공동체의 빛나는 유산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삶과 사상, 정신과 실천을 기리고, 세계 평화를 구현하는 한 기지(大基地)가 될 ‘함석헌평화동산’과 ‘함석헌국제평화센터’를 전쟁의 땅 파주에 세우는 일은 실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아직도 남과 북이 무력으로 대치하고 있는 땅 파주에 세워지는 함석헌평화동산과 함석헌국제평화센터는 세계인에게 비폭력 평화 사상을 발산하고, 세계의 평화를 구현해내는 중심이 될 것입니다”라고 함석헌의 평화기구를 역설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역사는 기득권에 의해 오도된 역사였다. 이제는 씨이 역사의 주(主)로, 그 역사를 이루어가게 될 것이다. 역사의 주역인 씨, 씨로 이루어져갈 역사,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25분. 어떤 이들은 이날, 이시를 함석헌이 죽은 날로 기억하고 또 이후에도 그렇게 기억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새로 쓰이는 민중사(民衆史), 그 씨들의 혼이 되어 씨의 역사를 열어낼 것이다.

씨 함석헌!

씨은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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