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현재형은 믿는 자의 부활신앙의 체험에서 구체화된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는 예수와 동반 죽음의 경험(갈 2:20)을 가진 자들의 삶에 나타나는 영생자의 징표다. 다시 죽을 수 없는 생명력은 역사 무대에 선 크리스천의 삶에서 표현되는 신비의 현장이다. 부활절이 지났으나 기독교의 삶의 현장에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중생의 경험마저 없는 신자들이 유령들처럼 흐느적거릴 뿐 공허하고 미신스럽기까지 하다.

예수의 죽음을 온몸으로 경험한 신자들아, 바로 당신들에게 기대가 있는 예수를 바라보라.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죽음 경험이 없는 위선자들뿐이라면 제3일의 부활은 그저 허망한 날의 빈 축제일 것이다.

예수 앞에는 위선자들이 설 자리가 없다. 살아서 죽음을 경험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부활의 체험이야말로 기독교의 필수이다.

지난 주간 한국교회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이 행사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그나마 삐거덕거리면서도 부활절 날만큼은 흉내라도 내오던 연합예배가 올해는 무산됐다. 이를 확인이라도 해 주려는 듯이 사회 언론이나 방송사들도 부활절 행사를 기사화하지 않았다. 겨우 천주교 행사 뒷부분에 몇 줄 보태 준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더 이상 낙심하지 말고 다시 공부해야 한다. 못난 믿음의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신앙의 기초부터 다시 공부해야 한다. 부활신앙은 죽은 뒤에 온다고만 믿고 있는 미신적 지식에서 과감하게 탈피해야 한다. 예수와 만나는 인간의 삶은 모두 현재형이다. 천국의 삶도 죽은 뒤에 오는 곳은 진정한 천국이 아니다.

예수가 말하는 부활이나 천국은 둘 다 현재형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사망의 세력을 이기신 예수의 삶에 뛰어들어 다시 죽을 수 없는 생명의 참 가치를 이루어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에도 전문기구가 있어야 한다. 기독교 신교의 경우는 초기부터 주어졌던 수도원 제도마저 내던져 버렸기 때문에 전문적인 훈련과 교육을 위한 제도가 없다.

수도원에 9살에 들어가면 90살에 시체가 되어 나갈 때 바깥출입을 할 정도의 수련과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수도공간이 있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이나 에세네 그룹의 훈련장만큼의 도장도 없는 세상, 냉혹한 야수들(The wild beasts, 막 1:13)뿐인 그 틈새에서 속고 속이면서 살아간다.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짐승일 수도 없는 것들, 용오름에 실패한 이무기들처럼 잡아먹을 수도 없는 물고기들만큼도 쓸모가 없는 신자들만 모여 있는 그 현장은 정말로 민망할 뿐이다.

벗어나라! 탈피하라! 뛰어 넘으라! 위기의 지점에서 어물거리지 말고 뜨겁든지 차든지, 신자가 되든지 아니면 떠나든지 하여 주 하나님을 더는 근심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부활신앙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 신앙에 뛰어들지 않는 거짓된 자들의 사슬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신자의 길로 나서라.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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