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루지아 트빌리시 시내에 있는 그르지아 정교회 총대주교좌 앞에서 필자(알로펜이 중앙아시아 선교여행 중 머물렀던 곳, 알로펜 총 주교의 제자인 드보라의 고향)

“종교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본능의 요구를 사실화하고 형태화해서 인간의 또 다른 양심기준이
된 것입니다. 타락의 시대를 끝내고 자기 본모습을 찾아가는 인간들은 종교 따로
생활 따로가 아닌, 생활이 종교이고 종교가 생활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이 자리잡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아이고, 아우님. 그걸로 맞으면 뼈가 으스러지겠소. 이리 주시게!”
드보라는 마리아와 알로펜을 번갈아 살피다가 작대기를 문밖으로 치웠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우리 착한 영부 주교님이신데….”

영부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면서 한쪽으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알로펜의 가르침을 기다렸다. 당나라 조정의 형편을 생각할 때 알로펜 총주교에게서도 현안을 풀어갈 해법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무 씨의 야심을 꺾을 수 없는 이상 우리가 한 발 물러서야 해요. 그동안 우리는 황제의 품 안에서 많이 놀았어요. 그래서는 안 된다 하면서도 나 역시 별 수 없는 인간이었음을 지금은 많이 느껴요. 솔직히 말해서 그 좋았던 태종조에 아무런 역할을 못하고 세월만 허비했어요.”

알로펜은 누구에겐가 가슴을 툭 터놓고 사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다. 역사 평이란 하기 좋아서 하는 것이지 당사자의 심정은 지금 자기 자신과 같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수완에 말려든 카타콤 시대의 성도들이 과연 떳떳했을까를 늘 의심했었다.
로마의 박해가 중지된 것이 아니라 카타콤 성도들이 막바지 고난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못하고 지난 수백 년 동안 박해하고 죽이던 원수들인 로마 황제 집단과 결탁하거나 그들의 달콤한 회유에 말려들거나 또는 로마 제국의 약점을 먼저 발견하고 그들에게 정치적 수명을 연장시켜 준다는 식으로 무혈 제압했다고 착각하면서 자기 위안을 삼았던 것은 아니었을까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는 지금 자기 자신의 주체하기 힘든 좌절감이 생각보다는 순수했던 카타콤 그리스도인들의 빛나는 승리를 모독하고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망령된 생각까지를 거침없이 하고 있는 자신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알로펜의 성정을 잘 아는 마리아 등 함께 앉아있는 사람들 그 누구도 그의 쓰라린 마음을 쉽게 위로하러 나서지 않았다.

“내가 권력을 너무 얕봤지. 아니야. 그보다는 오늘 우리가 이렇듯 참담한 패배를 맛보게 된 데는 나의 오만한 성격 탓이 커. 반성해야 해. 뼈가 시리도록이야. 금번에 우리들이 무조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하면 당나라에 모처럼 자리 잡은 우리 기독교는 앞날을 기약할 수 없을 거야.”
“어르신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만, 그래도 우리가 이곳에 와서 보낸 수십 년 세월을 모두…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총주교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런 평가를 내릴 수는 있어도… 우리들 스스로가 반백년 세월을 모두 허송했다고 볼 수는 없었으면 하네요. …우리는 어느 누구 예외 없이 지나온… 세월 동안 피눈물 나는 헌신의 생활을 해왔거든요.”
마리아가 가끔씩 숨을 고르면서 띄엄띄엄 말했다. 마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한 만큼 알로펜을 포함해 드보라와 영부 주교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었다.

“그래, 마리아 교수 말씀도 옳아요.”
알로펜의 말이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당조의 권력은 매우 유동적입니다. 지금 무조가 여황제 선언을 했으나 당나라 법통상 여자가 황제 되는 길이 없어 그는 나라 이름을 주나라로 개명했어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지금의 당나라를 주나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조의 여황제 수명은 단명으로 봐야 합니다. 무조의 권세가 시들면 우리 기독교의 봄이 올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바로 그거다. 역시 우리 영부 주교가 그 봄의 주인공이 될 거야. 그래 좋다. 나는 패배를 말했고 너는 승리를 내다보고 있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너를 선택하신 거야. 고맙구나.”

알로펜의 극찬에 영부는 알로펜과 마리아를 바라보다가 드보라에게 하소연한다.
“드보라 이모님! 날 좀 도와주세요. 내가 지금 위험해요. 어린애가 불가에 서 있어요.”
“쳇, 급하니까 이모님이네. 이모 소리 영부에게 들어본지 10년은 더 되었구먼요. 또, 엄살은 거 뭐예요. 장부가 뭐라고요. 불가에 선 어린애라고…, 그게 아니라 당나라는 뱀의 나라예요. 그게 그러니 뱀, 이무기, 또 그것들이 하늘로 오를 때는 용이라 해요.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다 뱀의 종자들일뿐, 그렇다면 우리가 겁을 내거나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역시 이모님은 여장부세요. 그래요. 겁내지 않고 이겨나갈 게요.”
“무슨 회의가 이래요? 이게 토론입니까, 아니면 꿈 이야기 판입니까? 좀 더 구체적인 발언을 하세요.”
마리아 교수가 드보라와 영부 앞에서 주먹으로 탁자를 치고 나선다.

“그래요. 이제부터는 좀 더 책임감 있는 발언을 해 봅시다. 내 생각에는 무조가 우리 기독교 교회당 몇 개 처를 폐쇄하거나 불당으로 바꾸었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봐요. 그들 당나라 황제가 돈을 들여 지어준 건물들인데 잠시 기독교에게 주었던 것을 불교에게 주었다 해서 억울하고 분해하면 안 됩니다. 기분이 좋지 않고 위축감을 느낄 수도 있으나 그럴수록 우리는 침착하고, 준 자가 다시 가져갔다는 느긋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당이라는 것, 그것은 한 시대의 기념물일 뿐이요. 참된 교회당은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집들입니다. 모든 가정마다 그곳이 교회당이 되는 날 기독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성숙한 시대가 됩니다.”

“그래요. 늘 어르신이 가르치신 신학의 기본인데 과연 언제쯤 그런 날이 올까요?”
마리아가 정색을 하며 묻는다.
“물론 어느 때 어느 날이라고는 말하기가 어렵겠죠.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섬기고 자칫 우상시 했던 시대가 예수 활동기 전후로도 계속되고 있으니 앞으로 과연 언제쯤 ‘생활교회당’ 시대가 올지는 장담 못하죠. 그러나 그날이 꼭 오게 되어 있어요.”
“그걸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 논리인가요?”

마리아의 추궁이다.
“출발이 그러했고 마지막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종교란 본디 별도의 존재가 아니거든요. 범죄 후 인간의 요구가 종교였고, 죄에서 해방을 받은 후 인간은 탈 종교 시대를 이루게 되죠. 종교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본능의 요구를 사실화하고 형태화해서 인간의 또 다른 양심기준이 된 것입니다. 타락의 시대를 끝내고 자기 본모습을 찾아가는 인간들은 종교 따로 생활 따로가 아닌, 생활이 종교이고 종교가 생활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이 자리잡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참으로 총주교님은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형식 종교 운동을 100여 년 동안이나 하셨나요?”

“인생은 하나님의 동반자입니다. 모든 인생살이는 그 과정에 있습니다. 내가 형식종교와 내면 종교를 말했는데 지금까지는 형식종교 과정을 거쳐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들이 이루어야 할 종교시대는 종교라는 형식을 뛰어넘는 시대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가 언제쯤 올까요?”
드보라의 질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만이 아시겠지요. 그런 날이 와서 혹시 이 세상에 종교마저 없어지면 세상은 도덕 폐기시대처럼 또는 무정부시대 같은 모양새가 될까봐 걱정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부가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기며 알로펜 곁으로 한 발 다가서는 모습이다.
“종교가 인간의 성숙으로 마음속의 평화를 이룰 경우를 맑고 푸른 봄날이라 한다면 종교가 인간사 간여를 포기해 사회가 무정부 상태가 되는 날은 초가을에 진눈개비가 쏟아지는 한낮으로 비유할 수 있죠.”
“….”

모두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궁금증이 다 풀렸다거나 영부 주교가 긴급지원을 얻기 위해서 달려온 수고의 대가가 충족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대화가 방향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일까.
“내가 너무 먼 훗날 되어질 것을 미리 말해서 여러분의 생각에 혼선이라도 온 것인가요?”
알로펜이 다시 대화의 불씨를 살리려 했다.

“아닙니다. 당나라 조정에서 우리 기독교의 교회당을 빼앗아서 불당을 만드는 데는 그들대로의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말이다.
“그게 무엇입니까?”
“내 짐작이기는 하지만 당나라 민심의 흐름이죠. 그리고 우리는 어찌 생각하면 선황제인 태종의 지나친 편애에 의존했었다는 반성이 필요할 것 같군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요?”

알로펜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공짜로 주는 은전에 너무 취해 있었단 말입니다. 기독교 에배당이면 기독교 신자들이 헌금하고 희생을 다해 지어야 옳지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준 자가 다시 가져갔다는 생각으로 우리들의 생각을 정리해야 합니다. 무조를 미워하거나 불교를 욕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당나라 안에 사는 신자들이 예배당이 없어서 길바닥에 버려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무조를 찾아가서 기독교와 불교의 갈등을 원치 않는다 하고, 몇 개 처의 교회당을 불당으로 바꾸었다고 해서 우리 기독교는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노라 하는 의견을 전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영부가 마리아의 단호한 지시에 따르겠노라고 하자 드보라가 나섰다.
“그건 조금 성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무조가 더 이상 시비를 하지 않는데 미리 그같이 말하면 혹시 우리가 권력 앞에서 떨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거든요.”

“그건 그래요. 그러나 내 말은 당 조정이 기독교와 불교 간의 문제로 몰고 갈 수 있는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에요. 또 주교가 한달음에 이곳까지 달려온 것은 장안의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뜻도 포함되었다고 보면서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중심을 잘 헤아려서 행동해 달라는 것입니다. 장안이 온통 시끌시끌하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당 몇 개 처 잃었다고 해서 당장 큰일이 터진 것처럼 당황하거나 우왕좌왕 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결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어머님, 뼛속 깊이 새기고 앞으로는 어린애 같은 생각을 버리고 당당하게 저의 책임을 지켜가겠습니다. 저 지금 당장 장안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어허, 이 사람. 주교! 거 무슨. 내일 떠나도 늦지 않아요. 이제 골치 아픈 말은 그만하고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기로 하죠.”

알로펜은 피곤을 느꼈는지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주저앉는다.
“아니, 어디 아프세요?”
영부가 하마터면 땅바닥에 주저앉을 뻔 한 알로펜을 부축해 방으로 향했다. 알로펜의 방에는 전에 보던 책들이 없었다. 조그마한 책상과 침대만 방 한구석에 있었다. 너무나 쓸쓸한 침소였다.
그날 밤 알로펜은 갑작스런 호흡곤란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했다. 다음날 아침에도 그의 몸은 부자유스러웠다. 그는 자리에 누운 채 영부에게 장안으로 곧바로 돌아가라고 했다. 마리아와 드보라가 함께 있었으나 그들은 말이 없었다.

“네, 하지만….”
영부의 어정쩡한 답변에 마리아가 거들고 나섰다.
“영부 주교! 간밤에 아버님이 하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오늘 중으로 장안으로 가시게.” 

 

• 작가 조효근 : 1976년 『월간 문학』 신인상 소설 등단.
대학에서 세계교회사 및 종교사 38년째 강의.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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