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충훈부교회와 이봉범 목사, 복음 여정에서 주님을 노래하다

   
▲ 충훈부교회 이봉범 목사

사회생활하다 뒤늦게 신학공부, 신학교
3학년 때 ‘전도’ 열정으로 개척

소속교회인 기장 교단의 한상면 목사
“김응조 목사님에게 가서 배우라”

전도 어려운 시대, 교단 부흥사회
대표회장으로서 “힘 있게 선도” 다짐

 

 

 

 

 

 

# 처음 간 교회, 행복하고 좋아
한 사람이 역사적인 사람이 되는 과정을 보면 같은 말이나 글, 상황에서 범인들과는 다른 느낌, 다른 무언가를 느끼는 경우들을 본다. 안양 충훈부교회 이봉범 목사는 처음 교회 갔을 때 너무 좋았다고 했다. 특히 한복 입은 여인들의 상냥함에서 어떤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 당시 한복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저를 향해서 따뜻하게 맞아주는 한복 입은 여인(신자)들 때문에 교회에 계속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이봉범이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친구 따라서 간 교회, 그는 그 다음주부터 교회를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군대 가서도 주일 예배 문제로 30분간 얻어맞는 각오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봉범은 교회 가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좋았다. 그래서 집 주인 할아버지 집사에게 ‘교회에 무엇을 하고 싶은데 무얼 하면 좋겠느냐’고 조언을 구하자 ‘그렇게 소원이라면 십일조를 드리거라’ 하는 말에 십일조 또한 그때부터 쭉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학생시절을 마감하고 사회생활이 시작되어 다니던 어느날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은혜를,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귀에 쟁쟁하게 들려왔다. 교회 다닌 지 7년 만이었다.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집회가 끝나고 성령 받자는 몸부림으로 산에 가서, 기도원에 가서 은혜를 간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많이들 얘기한대로 ‘은혜 받으려면 소나무 한 그루는 뽑아야지’라는 간절한 열망이 이봉범 집사에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새벽에 ‘사랑하는 주님 앞에’라는 찬송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왔다. 계속 그 찬송을 부르게 되었고 우르르 쾅쾅 하는 소리와 함께 ‘봉범아, 봉범아 너는 어찌 보이는 너희 아버지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면서 하찮은 잘못을 한 과거의 일들을 보여주시자, 이봉범은 통회자복하며 회개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교회 다니고 난 이후 어머니와 5남매 형제들에게 전도했지만 아버지에게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늘 한량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반감, 미움이 그의 속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개한 이후 이봉범 집사가 아버지를 찾아가 간절히 전도하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순순히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또한 직장 간부사원 12명을 전도해 등록시켜서 구역장으로서 패를 받기도 했다.
 

# 사업 그만두고 신학의 길에 접어들다
회사를 그만 두고 자영업을 시작한 이후 6년 만에 교회 안에서 부자 반열에 올라섰다. 신앙생활의 고삐도 늦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장로로 봉사라도 하려면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해 서른세 살에 대학입시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고, 수능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목사님이 찾으신다는 얘기를 듣고 당회실로 올라가니 ‘이봉범 집사님, 신학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일이어서 한 달간 기도해보기로 했다. 3주 지난 어느 날 꿈 속에서 물을 찾아가는데, 물 웅덩이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꿈을 꾸었다고 목사님께 얘기하자 ‘물은 생수’라며, ‘김응조 목사님에게 가서 배우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다니던 교회는 가리봉장로교회로 진보적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이었지만 담임이었던 한상면 목사는 성풍회 멤버로 활동할 정도로 열정적인 교회였다. 그런 때문인지 그는 성결교단에서 맹활약을 떨치며 교계에 영적인 힘을 선사하고 있는 김응조 목사에게로 이봉범 집사를 보냈다.

목사님의 강권에 순종하며 신학교에 입학한 이봉범 집사는 학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네 발의 신을 벗으라’는 김응조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모든 학생들과 은혜를 받았다. 교정의 나무들이 자신을 향해 춤을 추며 반겨주었다(이 말을 하는 이봉범 목사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뒤늦게 신학의 길에 들어섰고, 영혼 구원의 갈망이 강했던 이봉범 목사는 신학교 3학년 때 지금의 충훈부교회를 개척했다. 그의 열망은 예수님의 소원처럼 ‘전도’였다. 많은 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전도하고, 전도한 이들을 예수님의 말씀 중심으로 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양육하는 데 힘을 써왔는데 어느새 28년의 세월이 흘렀다.

요즘도 봄가을로 2주간씩 전도하는 ‘더불어 한 길 축제’의 기간을 갖는다. 올 봄에도 축제를 했는데, 16명이 결신했다. 예전에 많을 때는 70, 80명에 달했던 것에 비하면 많이 저조한 편이다. 매주 목요일에 전도특공대에서는 이봉범 목사와 전도대원들이 “우리 동네에”(목사) “지금 구원 받을 사람이 많다”(대원)는 구호를 제창하고 지역 주민 4만 명의 영혼을 향해 나아간다.

전도의 결실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아예 하지 않는 교회들도 있는데, 이봉범 목사의 생각은 다르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해야 주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성장으로 사람들이 신앙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가려 하고, 인구도 감소하고, 교회들의 이미지도 실추되는 등 전도가 어려운 요인들이 있지만 그래도 정확히 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교단 부흥사회 대표회장으로서 역할

   
▲ 이봉범 목사는 신자들에게 저울 추를 직접 시연하며 정직을 강조한다.

올해 교단(예성) 부흥사회 대표회장직을 맡게 된 이봉범 목사의 감회는 남다르다. 개척했던 그해 여름 교단 부흥사회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는 산상성회 집회에 참석해 큰 은혜를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상성회의 중요성, 애착이 누구 못지않게 강하고, 부흥사회의 역사 속에 30여 년의 세월이 있기 때문에 단체의 속성과 흐름을 잘 알고 있다.

“어려운 시대 속에서 부흥사회는 열정적으로 기도하며 복음을 정확히 전하고 외치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설교하면서 죽는다는 각오로 평생 목회의 길을 걸어온 것처럼, 교단 교회들이 영적으로 부흥과 성숙을 이룰 수 있도록 매진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부흥회는 일주일동안 밤낮으로 했지만, 요즘에는 낮에 부흥회를 하기 힘든 세대가 되었다. 맞벌이로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고, 열정이 식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교회도 덩달아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수록 부흥회도 하고, 전도도 해야 합니다. 부흥회를 꾸준히 하는 교회는 그래도 침체하지 않고 서서히 부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교회인 충훈부교회는 네팔에 선교사를 15년 전에 파송해 선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고, 지역에서는 선교원을 운영했었고 지금은 아동센터를 운영, 지역 어린이들의 참된 교육의 터 역할을 하고 있다. 늘 15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인 아동센터를 통해 아동부, 중고등부, 청년부에 연계되는 보람되고 감사한 일이 이어지고 있다.

‘주님처럼 영혼을 사랑하며 전도하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소망으로 목회 전선에 뛰어든 이봉범 목사를 닮아서인지 충훈부교회는 동네 한복판에서 튀지 않고 주민들 속에 동화되어 영적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듯했다.
양승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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