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공생애 막바지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셨다. 거듭 세 번이나 말해 주었으나 제자들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고 거듭 말씀하실 때는 그 말씀 듣는 것까지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했었다.

예수는 십자가 죽음 너머 제3일에는 다시 생명의 날을 회복하셨고 그 날을 하늘로 옮겨 오늘도 하늘 땅 모두를 보좌로 삼으시고 우리를 지도하신다.

그러나 제자들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을 중심에 두기보다 자기들이 이해하고 정리한 경험과 교리를 금과옥조 삼아 온 세상을 심판하고만 있다.

어떻게 하면 어리석은 자들을 기르고 다듬어 나라의 재목을 삼아볼까 하는 애정 어린 마음보다 눈에 보이는 대로 싹둑싹둑 잘라내는 데만 솜씨를 발휘해왔다.

떠오르는 생각 하나. AD 430년쯤 힙포의 어거스틴 감독시절 막바지에 반달족이 그곳에 침입했다. 그들은 어거스틴이 애써 가꾸어 놓은 거룩한 땅 힙포를 난도질 해버렸다. 그들 반달족은 아리우스의 단성론을 배경으로 정통 기독교인 어거스틴의 영지를 마음껏 조롱했던 것이다. 그 충격으로 어거스틴은 세상을 떠났다.

유럽 기독교의 터전은 그때를 신호로 해서 여러 게르만 족을 등에 업은 아리우스파 기독교의 무차별 공격이 끝없이 이어졌다.

드디어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른바 아라비아의 단성론 옷을 입은 이슬람의 무함마드 세력은 AD 637년 다마스커스 진출 후 곧바로 안디옥과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AD 640년 이집트 무혈입성과 동시에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데시폰을 점령하고, AD 711년에는 에스파냐(스페인)까지 먹어치우니 유럽 기독교 6백여 년 수고가 반 토막 나고 말았다.

단성론 기독교란 인성 중심의 유대교 영향, 신성 중심의 영지주의(범 헬라주의)로서 그들 유대주의나 헬라주의자들에게는 있어서 예수께서는 신이면서 동시에 사람이시나 두 존재는 본성에 있어서 일치라는 기독론을 소화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가 오늘도 우리들에게 ‘세상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라고 물으실 때 어떤 답변을 해야 할지는 오늘 우리의 몫이다.
십자가 너머에 예수의 길이 있다. 예수 거기에서 길, 진리, 생명되사 그곳에서 우리에게 만나자고 다짐하신다. 이만한 가르침 앞에서 공부하지 않고 예수 얻을 수 있을까?

엊그제 신문에 조계종 산하 선승들 숫자가 2천3백여 명이라고 밝혀졌더라. 그들 선승들은 하안거 3개월과 동안거 3개월 합해서 6개월 동안 밤이슬 피하는 잠자리가 보장되고 나머지 6개월은 말 그대로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산천을 떠도는 나그네가 된다더라. 겨우 빈집 투성이인 산골의 토굴 같은 집에 의지해 밤이슬을 피하는 구도자의 길을 산다더라.

기독교여! 예수의 길을 찾는 이들이여! 따르는 자여, 여우도 굴이 있고 산새들도 둥지가 있으나 인자는 하늘 아래 머리 둘 곳 없다 하신 예수를 배우는 자들이여, 어서 일어 예수로 길을 잡으라.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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