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천년여행 155

“나무는 열매를 보아서 안다는 말씀은 입으로 하는 말의 단계에서 내가 한 그 말의 가르침을 받은
나 자신의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내 말이 열매로 나타날 때까지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

 

 

 

   
▲ 서안에서 돈황으로 가는 길목의 도시 난주. 실크로드 시절에 화물 창고였던 자리에 세워진 이슬람사원 청진사

 

논쟁. 내면의 승부

마리아 교수가 쿰바홀 주교와 다위드를 동반하여 사마르칸트에 온 지 한달이 되어서야 사마르칸트의교구, 교구장 회의를 열었다. 각 지역 활동 선교사(수도사)들 30명이나 40명 단위의 책임선교사들 35명 중에서 들었으나 29명이 모일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전체가 다 모인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마리아 교수가 무조건 다 모이게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려니와 꼭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1천여 명의 일종의 지도자들을 단위별 숫자 30명이나 40명을 지도 감독하는 책임자들이 한 날 한 장소에서 모인다는 것은 보통 성의를 가지고서는 어려운 시대였다. 그러나 당시 7세기 중반의 중앙아시아에서 일개 외래 종교에 지나지 않는 기독교 선교 책임자들이 조직력을 확보하여 선교하고 계몽과 사회봉사를 해내는 종교들이 감히 있었겠는가를 떠올리며 교구 감독인 야고보 주교는 은근히 양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야고보 주교님! 수고했어요. 이만큼 숫자를 회집시킬 수 있는 것은 주교님의 지도 능력을 확인한 것이니 더는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열등감을 가지시면 안됩니다. 아셨지요?”

마리아의 이 말에 야고보 주교는 “네”라고 힘차게 대답하며 기뻐했다. 옆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다위드는 약간 고개를 오른쪽으로 저어보이기만 했을 뿐 무슨 말을 할 듯 하다가 그만두고 마리아의 곁에 붙어선다. 그들은 야산 중턱에 마련된 모임 장소로 향했다.

쾌청한 가을 날씨는 멀리 들판의 곡식들 익어가는 누르스레한 모습에 윤기를 보태주고 있었다. 도심 길거리는 말이나 낙타들이 주인을 따라서 오가는 모습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평소에는 수백 마리의 낙타와 말들이 거리를 누비는 대상 행렬들이 늘 있었는데 오늘은 한가로웠다.

마리아 교수는 백 살이 넘은 할머니답지 않게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젊은 시절 다마스커스에서 알로펜을 만났을 때, 알로펜이 아니라 그 무렵 스무 살 가까운 나이에 나사렛 마리아의 동정 같은 순수, 정결한 시온의 처녀, 사내를 모른다는 그것이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일까를 생각해 볼 때도 있었지만 허락하시는 날까지 동정을 기켜내는 이스라엘 여인, 다시 말하지만 다윗을 얻고 다윗이 노래하던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온 처녀로서의 마리아, 나사렛 마리아가 아니라 일곱 귀신에 잡혀 살았지만 끝내는 귀신의 유혹을 뿌리치고 예수의 여인으로 성공했던 여인 중 여인 막달라 마리아도 아니고 백 년 가까이 흠모하다가 그의 영혼에게 붙잡힌 알로펜의 마리아가 일백 살 꼬부랑 할머니 모습으로 강의실로 들어섰다.
“아하, 왓! 와하핫!”

함성소리가 일분쯤은 계속 되었을까 꽤나 긴 함성이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가슴에 두 손을 모아 쥔 마리아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야고보 주교가 그만, 그만이라고 몇 번이나 소리 친 후에야 청중은 진정했다. 30명 정도라더니 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청장년들과 십여 명은 되는 여인들이 한 쪽에 모여 있었다.
“여러분, 아마 스승이 그리운가 싶군요. 스승! 우리를 지도해 주실 어른이 그립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조짐입니다. 아시는 대로 우리들 모두의 자애로운 어머니요, 마치 성령님처럼 따사롭게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마리아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아마, 사마르칸트 교구를 지도하시다가 십여 년 전인가. 알로펜 총주교님의 부르심을 받고 당나라 장안에서 활동하시다가 이년 전쯤에 코초에서 서역(타클라마칸) 교구를 지도하고 계시는 교수님이시죠. 오늘 모처럼 귀하신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자, 환영합니다. 교수님! 이라고 외치면서 모시겠습니다.

야고보의 소개가 끝나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 선교사들이 마리아 교수를 맞이했다.
“그래요. 우리는 서로 그리워했지요. 그러나 이 시간 저는 좀 더 색다른 말씀을 들려주려 합니다. 혹시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리는 분들이 있을지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듣다가 나중에 질문 시간을 드릴 터이니 그때 질문하세요. 아시겠죠?”

“네, 얼마든지…. 알겠습니다.”
“여러분, 저는 수리아(시리아) 다마섹 출신입니다. 크게는 수리아도 아시아에 해당하는 나라지만 지금 여러분과 함께 있는 이곳 사마르칸트의 이웃인 페르시아나 또 다른 이웃인 중국, 북방으로 몽골에 인접한 그 밖의 나라들이 모두 아시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당나라에서 살면서 느낀 것은 솔직하게 말해서 윤리나 철학 또는 종교나 사상에 있어서 결코 만만한 나라들이 아니더군요. 천축국의 석가모니도 마찬가지고요. 저의 느낌 중 하나는 당나라보다 먼저 있었던 나라들, 소위 오호 16국 시대나 한나라와 진나라, 그보다 앞서서 있어왔던 하·상·주라 한 나라들이 배출해 낸 인물들이 있죠. 고대 국가 시대부터 제국의 형태로 로마보다 큰 나라를 이루었던 진나라까지 소위 춘추전국시대가 있는데 그런 시대에 전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진리탐구의 동반시대였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 저는 진리를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겠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내가 표현하는 진리에 대한 주장과 상대방 문화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표현의 차이가 있더라도 너무 민감한 반응보다는 그렇군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나보죠, 라고 말해가면서 숨을 고르기도 하고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쌓을 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마리아는 탁자 위에 있는 그릇에서 물을 한 잔 마셨다. 목은 마르지 않았으나 물을 마셨다. 그것도 천천히 주변과 선교사들의 얼굴 표정도 살피면서 말이다. 모두들 숨을 죽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나무는 열매로 분별할 수 있다 하신 일이 있으셨죠. 이 말씀의 본 뜻이 무엇일까요? 나무들이란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감나무인지 배나무인지 모를 수 있다는 말씀이겠죠. 다시 말하면 진리를 가르칠 때 표현 또한 조심스러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크게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내가 전도사요 수도하는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나 하늘나라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표현할 수 있겠죠. 그러나 나무는 열매를 보아서 안다는 말씀은 입으로 하는 말의 단계에서 내가 한 그 말의 가르침을 받은 나 자신의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여기서 내 입의 말은 진리를 표현했으나 이 말은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비유에서는 ‘나무’에 해당하고 내 말에 대한 책임으로 내가 이루어내는 내 인격의 모습은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말이 열매로 나타날 때까지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또 하나의 요구, 즉 나무는 그 열매로 보아서 안다는 또 다른 표현은 ‘나무 속에 들어있는 열매’를 다른 언어로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대목을 향해서 긴장감을 가지셔도 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예수님은 본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나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 또 그가 육신의 언어로 말씀하신 표현법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灵)으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내 말이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나요?”
“…….”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모두들 숨소리까지 죽이면서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좋지요.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옷을 입었으니 사람이 풍습(관습)에 따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지만 육신의 한계 안에 갇혀있는 하나님(예수님)은 사용하시는 말씀 또한 갇혀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는 어때요. 이해되시나요?”

마리아가 다시 물었다. 부하라 지역에서 활동하는 실라 수도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가 매우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마리아 교수님, 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자칫 커다란 오해를 남길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이 말씀을 없었던 것으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의 말씀인데 감히 이런 표현을 하고 말았습니다.”

실라 수도사의 말은 마리아 교수 자신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회중 가운데에서도 어, 어, 저런, 저 사람이라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 다수의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사태의 진전을 기다렸다. 마리아는 좌중을 한동안 더 살피는가 했더니 갑자기 웃는다. 그것도 큰 소리로 웃는다.

“하하, 호호호…, 나 모처럼 웃습니다. 실라 선교사의 용기있는 발언을 기뻐하면서 말입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말하자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도 하고 좌중은 활기를 되찾았다.
“저는 여기 사마르칸트에서 야고보 주교님을 모시고 있는 스데반 수도사입니다. 저는 마리아 교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또 우리가 당나라의 화려한 사상을 이기려면 지금쯤은 마리아 교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말씀을 떠올려 본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천 가지 뜻을 담아 말씀하신다 해도 육신 속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 중에 한 가지밖에 표현할 수 없는 제한을 받는다는 말씀은 명언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 당나라 이전에 노자(老子)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그의 경전 첫 줄에 도가도 비상도(道歌道非常道)라 했어요. 이 말씀을 풀어보면 道를 道라고 하면 그것은 非常道라는 뜻입니다. 정확한 해석은 아닙니다만 다시 말하면 말로 표현하는 진리는 참 진리가 아니라는 뜻으로도 해석됩니다. 무슨 뜻일까요. 인간이 만들어서 사용하는 말도 그 속에 여러가지 뜻이 담겨 있어서 자칫 잘못 해석하여 오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어찌 쉽게 표현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은 교수님의 말씀을 더욱 경청하여 겸허한 구도자를 겸한 전도사가 되어 주셔야 하겠습니다.

사마르칸트 스테반은 마리아 교수에게 정중하게 머리 숙인다.
“두 분 말씀을 모두 존중합니다. 먼저 부하라의 실라 수도사가 하신 말씀은 진리를 함부로 말하여 자칫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뜻으로 저도 동감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공부도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육성부터 따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육성이라 함은 기록된 성경을 그대로 해석하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그 다음으로 태산이 무너져도 흔들림이 없는 수준이 된 후 사마르칸트 스테반처럼 이해의 깊이를 더하려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노자나 공자 등 당나라 조상들의 유명한 선생들이 표현하는 다양한 철학사상을 이겨내려면 우리 기독교는 지금부터 그들에게 뒤지지 않을 철학과 사상의 깊이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오늘 이 말씀을 하게 된 것은 앞으로 천년쯤 멀리까지 내다보는 마음 자세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스데반이 나선다.

“내가 앞으로 천년의 공을 들여야만 우리들의 구세주 예수님의 참모습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그런 망발을 거두시오. 먼저 갈릴리 바닷가에서 말씀하시고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따르면 됩니다. 십자가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을 듣지 못했나요.”
부하라의 실라가 크게 부르짖었다.

“그건 예수님이지 우리들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그저 인간임을 왜 모르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스데반의 말을 이어서 마리아가 나선다.

“좋아요. 두 분 다 옳아요. 예수님과 나와의 거리가 천년일 수 있다는 표현이 좋군요. 인간의 무한한 겸허함, 또 백년 산다는 인간이 그 백년 동안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군요.”

 

• 작가 조효근 : 1976년 『월간 문학』 신인상 소설 등단.
대학에서 세계교회사 및 종교사 38년 강의.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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