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21세기 이렇게 대비한다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생명, 생명이라는 말 하나로 모두 표현할 수 없는 부활. 언어의 한계로서 부활이다. 한 번 죽는 절차를 밟게 되었으니 부활이라는 어휘가 절차상 나온 것이다.

왜 한 번 죽는가? 에덴을 저버린 아담의 인생은 죽음이라는 처리과정이 필요해서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린 인간, 또 인간들에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라 하였다. 반드시 한 번 죽는 절차인 믿는 자들의 십자가는 예수와 함께 죽는 십자가의 절차가 된다(갈 2:20).

이 죽음의 절차를 ‘아멘’으로 통과한 모든 믿는 자들이 예수와 하루 반나절 무덤에 머물렀다가 영생의 길로 들어서는데 이때를 부활의 시간으로 본다.

다른 종교, 불교 같은 곳에서 열반(니르바나)에 드는 절차에 비교되는 어휘가 부활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자들은 부활의 그 순간을 감히 두려움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 예수의 부활을 증거해야 할 기본적인 인물들은 예수께서 직접 부활 후의 활동을 통해서 간섭하셨다. 무덤 가에서 서성거리던 막달라 마리아(요 20:1), 엠마오의 제자들(눅 24:13), 사명을 내던져버리고 (이제)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다른 제자들을 선동했던 베드로를 잡으러 갈릴리로 가셨던 예수 이야기가 요한복음 21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부활동산에서 승천하신 예수를 바라보았던 5백여 명들, 또 성령 하나님의 모습으로 강림하시는 오순절 날 (행 2장)의 기쁨은 오늘의 우리들을 위한 은혜의 절차과정일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요한복음 11장 25절 이하의 말씀으로 더는 설명이 필요없이 부활 예수와 만남을 이루고, 또 이룬 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오늘의 기독교 위기는 선행적 부활신앙, 또는 현재적 종말신앙으로 부활의 현재화가 절박한 요구를 상실한 데서 왔다. 믿는 자의 믿음에 따라서 예수의 부활, 그리고 나의 부활을 동시적인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먼 훗날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 떼어내고 관 속에 담아 냉동실에 넣어두고 장례식을 치른 후 죽은 자들의 절차상 갈 수도 있다고 믿는 요단강을 건너서 가는 곳이 부활의 세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또 그런 식으로 살아가면 될 것이다.

믿는 그 순간, 십자가 예수와 동반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 내게 이루어 지는 부활, 이 아름답기도 하고 전천후의 용맹을 확보한 부활신앙이면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또 이기고, 나 자신까지도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바로 이런 인물들이 군집을 이루면 우리들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조건들, 답답한 정치판, 북한의 꼭두각시 놀음 같기도 한 모습을 어떻게 요리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더 큰 일은 아닐지라도 세상의 온갖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인 부활생명 당사자들은 교회와 일반사회를 가리지 않고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넘나드는 꽃 나비들처럼 향기로운 사회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도다. 부활신앙자들의 등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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