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498주년을 상기하면서 꿈틀, 움찔하는 식의 미세한 자각증상을 보여주는 우리 한국교회의 영적 수준에 만족할 수 없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뜻으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를 붙잡고 5백여년을 버틴 신학의 단순한 해석이 오늘의 기독교를 빈약한 종교로 만들어 버렸다.

이신칭의가 무엇인가? 로마서 4장 1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며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리라’에서 발전한 바울 선생의 논리가 오늘의 우리에게 ‘이신칭의’로 주어졌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 무엇을 믿는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를 말하는데 이 부분도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4)가 이어 주고 있다.

여기서 예수 십자가의 대속론(代贖論)이 출발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대속사건’을 1회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끝내는데 ‘대속사건’은 1회적, 곧 단번의 죽음이 일만죄악에서 우리가 용서받는 것이지만 용서받은 자의 화답이 어떻게 처리되는가를 살펴야 한다.
나를 대속하신 예수가 십자가 앞에서 반응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생각해 보라. 십자가 예수의 피는 등산 갔다가 어느 산비탈에서 30년 묵은 산삼 몇 뿌리 캔 것과 다르다.

십자가의 예수와의 만남에 대해 바울 선생은 ‘내가 그리스도와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또 어떤 자세로 배우는가?

십자가 예수 사건은 그 피를 통해서 구원받은 자의 십자가 사건으로 연속된다. 이를 십자가의 연속성이요. 또 연속동작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가 예수 십자가의 연속성을 보였던 때는 카타콤시대(AD 66-313년)까지였다. 그때 그 시대의 신자들은 진실로 성도들이었다.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식을 하고 아직 첫날밤도 치르기 전에 이들은 함께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끌려간다. 관리들의 여러 가지 회유가 있었으나 그들 신혼부부는 함께 사자굴에 내던져져 죽어간다. 이 같은 유형의 안타까운 일은 물론이고 예수 십자가의 대신 죽어주심을 통해 인류가 받을 죄 용서 받음과 평화, 그리고 당사자들은 마치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감당해야 한다는 듯이 자기 희생으로 예수를 믿는 믿음을 표현했었다.

오늘의 기독교는 바로 여기에서 고장이 났다. 예수 십자가 죽음과 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어떻게 고백되어야 하고 또 내 뒤를 따르거나 함께하는 믿음의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고백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잘못된 신앙이다. 이신득의, 믿음으로 얻는다는 가르침에 대한 배반이요 배신이다. 교회가 그리고 내가 지금 십자가 앞에서, 주 예수의 피 흐르는 모습 앞에서 ‘주여, 십자가의 남은 고난은 내 몫이나이다’고 고백하는 신자가 되고 바로 이런 신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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