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백 종 국 교수

종교개혁의 단초였던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적 독재 만연한 한국교회
 

종교개혁 500주년을 2년 앞두고 한국교회가 새로워지는 길을 모색하는 시도가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지난 9월 한국교회연구원(원장 전병금)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심포지엄으로 마련한 두 번째 시간에 ‘한국교회 왜 민주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발제한 백종국 교수는 한국교회가 위기에 봉착한 원인으로 올바른 신학이 정립돼 있지 않은 현실과 종교개혁 정신의 핵심인 만인제사설에 위배되는 ‘사제주의 경향’, 담임목사의 권력 집중화를 꼽고 그 해법으로 교회 내 민주주의 실현을 제시했다.

그리스도인 정치학자로서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한 냉철하면서도 정확한 진단이었다. 종교개혁 기념일(10/31)을 앞두고 다시 만난 백종국 교수는 “평신도이고 정치외교학과 교수이기에 발언에 유리한 점이 있다”며 웃었지만 또다시 이어지는 “잘못된 가르침에 한국교회가 푹 젖어 있다”는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는 개혁을 향한 간절함이 진하게 배어났다.

   
· 경상대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상임공동대표
·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 본질로부터 멀어진 한국교회의 원인으로 담임목사의 사제주의적 경향을 꼽고 그 해법으로 민주주의의 실현을 제시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
- 한국의 기독교 신교는 역사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사제주의를 비판하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현재는 가톨릭교회에 버금가는 사제주의에 함몰되어 있다. 루터는 민주적 교회 체제가 가장 성경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만인제사장론에 따르면 성속 이원론에 근거한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적 독재는 터무니없는 것이며 성경말씀이 지지하지 않는 바이다.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왕 같은 제사장이며, 그들 중 어느 누구라도 자신이 구별된 성직자임을 주장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는 종교개혁정신의 핵심이며 복음의 가장 적절한 표현 중 하나이고 기독교의 뚜렷한 전통이다. 직업과 직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직위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목사를 비롯한 사역자들의 선택과 교회재정의 관리는 모든 회중이 공동으로 결정할 사항이며 누구도 독재적 권한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별된 성직자들이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를 매개한다는 사제주의(sacerdotalism)나 안수를 받은 목사들이 교회를 다스려야한다는 교권주의(clericalism)는 이러한 점에서 종교개혁의 정신과 배치되는 사상이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정신을 표방하는 한국의 신교가 이러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 기독교 신교의 대표적인 사제주의적 경향은 담임목사의 독재이다.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회들은 담임목사를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구조를 마련하고 있다. 또한 담임목사의 독재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각종 권한을 개발해왔다. 당회장권, 강단권, 설교권, 목양권, 축도권, 세례권, 안수권 등이 그러한 사례로서 교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신앙적 행위를 목사들이 배타적으로 보유하는 권리로 선포하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일은 가톨릭적인 사제주의를 개신교적인 신앙원칙으로 포장한다는 사실이다. ‘치리교권’이라는 용어를 개발해 ‘기본교권’과 대비시키고 치리교권은 성직자인 목사에게, 기본교권은 평신도의 대표인 장로에게 귀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장로는 세속적 의사를 대변하고 목사는 성스러운 의사를 대변한다는 사고야말로 루터가 그토록 강력히 공박했던 복음의 사제주의적 왜곡이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재정문제, 목회 세습, 성윤리 문제 등은 담임목사의 사제주의적 경향이 강해지고 독재권이 강화될수록 심각한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도인 모두 왕 같은 제사장,
담임 목사 한 사람의 전횡 아닌 공동체 의사결정
구조인 민주주의 체제가 가장 성경적


△ 한국사회적으로도 민주주의의 정착을 말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교회 내 민주주의 실현은 과연 가능한가?

- 종교개혁정신에 바탕을 둔 교회정치의 핵심은 자유와 민주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제주의적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다. 루터가 공격한 것은 교회도 아니고 교황도 아니며 복음은 더구나 아니었다. 루터가 공격한 것은 탐욕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사제들의 독재체제였다. 이들은 온갖 방법으로 약한 자들의 양심을 옭아매서 자신들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악한 독재”를 수립한 배교자들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피치자의 동의 즉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군가가 구태여 끼어들 필요가 없다. 사제들이 교회 운영의 필요에 의해 일정한 분업적 직분을 가질 수 있겠지만 주어진 직분이 가지는 최소한의 역할 이상으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사제들이 뭔가를 주장하려면 반드시 교회 회중의 신앙양심에 따른 판단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교회 내 민주주의 실현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이다. 민주주의를 ‘인간에 의한 지배’로 규정하고 이에 대비되는 ‘신에 의한 지배’를 말하면서 ‘신본주의(神本主義)’나 ‘신정주의(神政主義)’ 심지어 ‘신주주의(神主主義)’와 같은 게토화 된 용어를 마음대로 생산해내기도 한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몰이해는 심각한 반지성주의적 태도로서 마침내 이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복음의 본질마저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 교회 내 민주주의 실현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 민주 체제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담기에 알맞은 그릇이고, 개신교의 정관이나 헌법은 이러한 그릇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기독교 신교의 민주적 정관이 종교개혁정신의 구체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반인 이유는 첫째, 기독교 신교에서는 개별 교회가 가장 핵심적 단위이고, 둘째, 이 기본단위가 어떤 방식으로 말씀 위에 굳게 서느냐가 향후의 모든 다른 공동체적 활동을 좌우하기 때문이며, 셋째, 국가 및 시민공동체와의 교류에 있어 민주적 정관이 개신교임을 보여주는 준거의 틀이 되기 때문이다.

민주적 정관에 나타나야 할 3가지 핵심 조항은 △사역자의 임기제 △의사결정의 민주화 △재정의 투명성 보장이다. 물론 민주적 정관이 말씀을 실천하는 완벽한 대안이라고 주장할 순 없다. 다만 종교개혁정신에 따라 가장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차선의 제도라고 할 수 있다.

△ 한국교회의 위기 원인으로 목사의 사재주의적 현상을 꼽으셨는데, 사실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은 목사와 성도의 합작품이 아닌가? 만인제사장의 실현이 절실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 만인제사장론의 실패 원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국 기독교 신교 자체가 소위 ‘매개의 변증법’에 빠져들었다고 본다. 매개의 변증법이란 매개의 관계에 있어서 매개자가 매개의 본질보다 선행하게 되는 현상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돈, 화폐이다. 화폐는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가 없고, 인간과 인간이 필요한 것의 매개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런데 점차 돈이 본질을 앞서가기 시작했다. 나와 내가 추구하는 풍요 사이를 화폐가 매개하고 있는데, 나중에는 화폐가 나와 내 풍요 사이를 결정해버리고, 종국엔 풍요를 포기하고 화폐를 숭상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안전과 풍요를 얻기 위해 화폐가 필요했는데 나중엔 화폐를 얻기 위해 윤리, 도덕, 건강조차 포기하고 돈만 많이 쌓아놓고 죽어간다. 매개의 변증법은 참 무서운 거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나와 하나님 사이를 매개하는 매개체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고 우리는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동참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 둘이 만나면 된다. 그것을 설명하고 분위기를 조성해주며 공동체를 이뤄주는 것으로서 교회가 매개체로 존재한다. 그런데 어느새 교회가 본질을 선행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고, 그 교회와 나를 목사가 매개한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목사와 성도의 합작품이라는 말은 공감한다. 잘못 가르치는 것에 대해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문제이다. 개혁교회의 중대한 원칙 중 하나가 신앙의 양심과 성경 중심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스스로 올바른 양심을 가지면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목사가 잘못 가르쳤으니 그대로 따른다는 건 만인제사론으로 볼 때 반쪽자리 신앙이다.

또 한 가지는 올바른 신학이 정립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50년대까지만 해도 교회들마다 종교개혁기념일을 중요하게 지켰는데 점점 관심이 사라지는 것 같다. 당시 교세는 약했지만 목사들은 순수했고 성도들은 진지했다. 80년대 들어와서 복음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초대형 교회를 만들어내고 아쉽게도 그걸 동경하며 따라가는 교회들이 생겼다. 문제는 교인들도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윤리의식이 약화돼 물질적으로 성공하면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인식이 교회에도 팽배해졌다. 하지만 성경에서 권력과 부에 대해 성공이라고 얘기하나?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인데 그중에 조금 모아놓고 성공이라고 말한다. 인간들의 어리석은 모습일 뿐이다.

60년대 무렵부터 한국교회는 신학교에서 좀 더 진지하고 토착화 된 복음주의 신학을 하지 못했다고 본다. 그리스도 신앙을 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들이 매우 혼란스럽고 개념들을 연결하는 논리도 지극히 부실하다. 혼란스러운 개념과 부실한 논리에 입각한 신학은 결국 종교권력자의 도구가 되기 마련이다. 특히 성공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번영신학을 특징으로 하는 캘리포니아 복음을 무분별하게 수입함으로써 크게 왜곡됐다. 500명 모이는 교회보다 5만 명 교회가 더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선 아무런 차이가 없다. 
 

스스로 공부 않고 잘못된 가르침 따라가는 신자는 반쪽신앙,
종교개혁 500주년이 헌신적 그리스도인들을 폭넓게 깨우는 계기 되길


△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교회 다움과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것 같다?

-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거시적으로는 사탄의 유혹과의 싸움이다. 그리스도인의 실제 삶은 인애, 공평, 정직을 실천하는 것인데 사탄은 끊임없이 그것을 거스르는 방식으로 더 많은 부와 평안 가질 수 있다고 유혹한다. 아쉽게도 일부 잘못된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걸 대치해서 이야기한다. 인애, 공평, 정직을 ‘윤리’로 치부하면서 신앙은 윤리가 아니라고 하고 마치 신앙을 가지면 윤리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올바른 신앙의 결과가 윤리이다. 루터의 ‘믿음으로 구원’의 부분도 오해이다. 루터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와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를 같이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앞에 것만 강조한다.

루터의 때에는 한 명의 교황이 있었다면 현재 한국의 기독교 신교에는 수천 명의 교황들이 활보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500년 전 독일의 상황보다 훨씬 희망적이다. 당시 독일에는 한 명의 루터가 있었지만 지금의 한국에는 수 많은 루터들이 있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역사적 계기는 이러한 헌신적 그리스도인들을 폭넓게 깨우는 결과를 불러 낼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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