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7:21에서 구원의 조건이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 ‘믿음과 행함’둘이라는 사실은,
지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고, 인정해야하는 진리 아닌가요?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씀하는 성경구절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제2종교개혁연구소 소장
호서대 명예교수

존경하는 서문강 목사님,

강의 내용을 면밀히 읽으시고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주장하는 “행함 있는 믿음(fide cum opera)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제2종교개혁사상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 목사님께서는 로이드 존스를 존경하시고 좋아해서 그의 책들도 번역하시고, 로이드 존스가 추구한 청교도적인 삶을 사시면서, 교인들도 청교도적으로 교육하시고 목회하시는 분이시니, 제가 추진하고 있는 제2종교개혁의 방향과 멀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서 목사님께서 제기하신 질문들은 제가 오랫동안 강의해오면서 수 없이 많이 들어본 질문들입니다. 이번 기회에 서 목사님과 같은 질문을 가지신 다른 많은 분들을 대신해서 서 목사님께서 질문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답변은 서 목사님 개인에게 드리는 답변임과 동시에, 그동안 저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신 모든 분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동일한 질문을 제기하실 많은 분들을 염두에 두고 드리는 답변이기도 합니다. 이번 답변을 들으시고 혹시 오해가 있으셨다면 오해를 푸시고 제2종교개혁신학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답변드리겠습니다.

질문1: 본인이 이해하기로는 박사님의 주장의 핵심적인 요점은, 구원은 ‘믿음으로만’이 아니고 ‘믿음과 행함 두 가지다’라는 것입니다. 들소리신문에 기사화된 대로 박사님의 주장은 ‘믿음 + 행함 = 구원’이라는 공식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계십니다(해당기사 보러가기). 박사님의 파일 논문 6면에서 이런 대목을 발견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 7:21에서 구원의 조건은 ‘믿음과 행함’ 두 가지다. 루터는 구원의 조건을 ‘믿음’ 한 가지 뿐이라고 말한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마 7:21에서 구원의 조건을 ‘믿음과 행함’ 두 가지로 제시하신다.” 개신교는 루터의“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alone)”는 주장을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정당한 이해로 받아 들여왔습니다. 그러므로 루터 이후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생명처럼 여겨왔던 정통 개신교가 잘못이든지 박사님의 주장이 잘못인지 둘 중 하나입니다. 박사님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는 박사님 스스로 주장하듯이 ‘제 2의 종교개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님이 오해한 것이라면 박사님의 주장은 마땅히 수정되거나 철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답변: 질문1에 대한 답변을 마 7:1에 대한 답변과, 이신칭의에 대한 답변으로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첫째, 마 7:21에 대한 답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마감하시면서 마 7:21에서“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의 조건은‘주여 주여’ 하는‘믿음’ 하나만입니까, 아니면 ‘믿음과 행함’둘입니까? 만약 ‘믿음’하나만이라면 주님께서는“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행함’이 천국에 들어가는 또 하나의 조건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주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주여 주여’하는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 ‘행함’도 구원의 조건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데, 여전히 마 7:21에서 구원의 조건은 루터가 말한 대로 ‘믿음’하나만이라고 주장하시겠습니까? 마 7:21에서 구원의 조건이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 ‘믿음과 행함’둘이라는 사실은, 지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고, 인정해야하는 진리 아닌가요? 여기에 대한 서 목사님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씀하는 성경구절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지켜 구원”즉 ‘행함’이 구원의 핵심조건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고 인정되는 진리이므로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고, 신약에서만 중요한 성경구절들을 골라서 설명드리겠습니다.

(1) 눅 6:46-48(마 7:24-25)에서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구원의 조건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이란 말은 여기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말을 듣는 것”에서‘믿음’을 유추해 낼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비유에서 구원의 조건은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 “행하는 것”을 포함하여‘믿음과 행함’ 두 가지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시겠습니까?

(2) 마 25:34-36에서 주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조건은 ‘믿음’인가요, 아니면 ‘행함’인가요? 이 말씀에서 믿음이란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믿음은 37절 ‘주여’란 말 속에 숨겨져 있어서 겨우 유추해낼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주님(인자)께서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하신 말씀은 “먹을 것, 마실 것, 옷을 주고”“병들었을 때에 돌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보는”‘행함’ 아닌가요? 이 비유에서도 구원의 조건은‘믿음과 행함’ 두 가지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음만’이라고 주장하시겠습니까?

(3) 마 19:16-19(막 10:17-31; 눅 18:18-30)에 나오는 대화 즉“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는 대화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영생의 조건으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계명은 십계명의 5-9계명과 이웃사랑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들을 지켜야 즉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영생 즉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음’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 부자청년이 이스라엘 사람이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믿음을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서‘행함’이 ‘믿음’과 함께 영생의 조건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4) 눅 10:25-28에“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대화가 나옵니다. 이 대화에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하여 율법교사가 답변한 대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는 일”을 “행하면 살리라”고 답하십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제시하신 영생의 길은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서도 믿음이란 말은, 율법교사가 이스라엘이요 율법학자이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일 것이라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계명을 행하는 행함 아닌가요? 여기에서 영생 즉 구원의 조건은 행함임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이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5) 요 5:29에서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구원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오직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선한 일을 행함”입니다. ‘행함’이 ‘생명의 부활’을 얻는 구원의 조건임을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오직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즉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여전히 루터의 가르침을 따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주님을 헛되이 경배하는”(마 15:9) 일이 될 것입니다. 루터의 말을 예수님 말씀보다 더 사랑하고 우위에 둔다면 이는 주님께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마 10:37).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님의 분명한 말씀을 무시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루터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루터의 제자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6) 고전 6:8-10에서 바울은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조건으로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행함을 내세웁니다. 간음하고 우상숭배하고 도둑질하는 사람 즉 행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 율법들을 지키고 행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여기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내세우는 구원의 조건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입니다. 이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믿음’이란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 서신의 수신자가 8절에 나오는 ‘너희’라는 사실에서, 그들이 고린도교회 교인이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임을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전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도구원의 조건은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믿음과 행함’ 두 가지임이 분명합니다.

(7) 갈 5:18-21에서 바울은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조건으로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행함’을 내세웁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내세우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아닙니까? 여기에서 ‘믿음’이란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 서신의 수신자가 18절에 나오는 ‘너희’라는 사실에서, 그들이 갈라디아교회 교인이므로 하나님을 믿는‘믿음’을 가진 사람들임을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전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도구원의 조건은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믿음과 행함’ 두 가지임이 분명합니다.

(8) 엡 5:5에서도 바울은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는”조건으로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행함’을 내세웁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내세우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입니다. 여기에서도 ‘믿음’이란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 서신의 수신자가 5절에 첫머리에 나오는 ‘너희’라는 사실에서, 그들이 에베소교회 교인이므로 하나님을 믿는‘믿음’을 가진 사람들임을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전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구원의 조건은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믿음과 행함’ 두 가지임이 분명합니다.

 

루터의 말을 예수님 말씀보다 더 사랑하고 우위에 둔다면 이는 주님께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마 10:37).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님의 분명한 말씀을 무시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루터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루터의 제자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9) 약 2:14에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므로”(17절), 행함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야고보의 결론입니다. 이 말 때문에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서신’이라고 평가절하했습니다. 야고보서는 성경이 아니던가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가르침만 따르겠다고 고백하고 주장한 루터가, 왜 성경인 야고보서의 가르침은 따르지 않고 거부한 것인가요? 루터에게 일관성이 결여된 것 아닌가요? 성경 가운데서 자기의 “오직 믿음으로만”의 신학에 맞으면 따르고, 맞지 않으면 따르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요? 야고보에게 있어서도 ‘오직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 즉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이란 사실이 분명합니다.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이라는 성구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많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음’(sola fide)이 아니라, ‘행함 있는 믿음’(fide cum opera)입니다. ‘오직 믿음’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이란 말에 일레르기적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출국하려고 할 때 갖춰야 할 조건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권이고 다른 하나는 비행기표입니다. 이 둘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갈 수 없습니다. 이 경우에 여권과 비행기표는 해외 출국을 위한 필수조건들입니다. 믿음과 행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닙니다. 믿음과 행함이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것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말씀하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위와 같이 설명을 드리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라고 믿어온 사람들 가운데서 약 97-98%의 사람들은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약 2-3%의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성경적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서문강 목사님,
위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이 구원의 조건’임을 9가지 성구를 들어 분명히 설명드렸습니다. 이 말씀들은 저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요 성경의 말씀입니다. 저는 단지 성경말씀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을 뿐입니다. 이 설명을 들으시고 ‘믿음과 행함이 구원의 조건’임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오직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루터의 구원론을 견지하시겠습니까? 서 목사님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둘째, 이신칭의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드리겠습니다.
저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에 대하여 부인한 일이 없습니다. 자세하지는 않지만 들소리신문에도 나와 있고, 보내드린 자료집 21-23에서 롬 3:26-28; 4:1-25; 갈 2:16 등을 들어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이신칭의를 받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어떠한 인간의 행함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헬라어원전에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고 되어 있지, ‘오직 믿음으로’(롬 1:17) 라고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은 루터가 말한 것이고, 독일의 루터 성경과 우리말 성경에만 있을 뿐 다른 나라 성경에는 없는 말입니다. 저는 의롭다함을 받는 칭의에는 이신칭의만 있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행칭의(以行稱義)도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구원을 위하여 이신칭의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행칭의도 필요함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음을 자료집 p.23-35에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여기서는 이행칭의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직 믿음’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이란 말에 일레르기적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출국하려고 할 때 여권과 비행기표는 해외 출국을 위한
필수조건들입니다. 믿음과 행함도 마찬가지입니다.

 

 

 

(1) 야고보는 2:24에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고 두 종류의 의(義) 즉 이신칭의와 이행칭의에 대하여 분명히 말합니다. 야고보는 2:21에서 이행칭의의 예로서“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야고보가 24절에서 “믿음으로만(faith alone)은 아니니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야고보 당시에 교회 안에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이신칭의만을 말하고,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행칭의에 대해서는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기 위하여 야고보는 여기에서 이신칭의뿐만 아니라 이행칭의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신칭의만을 주장하고 이행칭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경고를 받아들여 이신칭의뿐만 아니라 이행칭의가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2) 모세는 신 6:25에서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명령 즉 율법들을 지켜 ‘행하면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행칭의의 말씀입니다.

(3) 예수님은 마 5:20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의(義)는 ‘믿음으로 얻는 의’가 아니라(5:17-48에서는 믿음이란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행함으로 얻는 의’(이행칭의)입니다. 예수님이 20절에서 말씀하시는 의는“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입니다. 이 의에 대하여 예수님은 21-48절에서 6가지 대립명제(antithesis)로 설명하시는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6가지 대립명제는 모두 사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행함’에 관한 것입니다. 21-48절에서 말씀하시는 ‘더 나은 의’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일인데 “나는 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계명들을 주시고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 14:15)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롬 8:3-4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육신은 약해서 율법을 지킬 수 없지만, 성령을 따라서 살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우리는 예수님이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4) 마 25:31-46의 최후심판비유에서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오른 편에 있는 양과 같은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37,46절). 여기에서 양과 같은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의 행함 때문입니다. 양과 같은 사람들이나 염소와 같은 사람들 모두 심판주를‘주여’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37절, 44절), 양자 모두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의 차이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양자의 차이는 믿음에 있지 않고 행함의 여부에 있습니다. 믿음이 있음과 동시에 행함이 있는 양과 같은 사람들은(35-36절) 행함으로 ‘의인’이 되었고, 염소와 같은 사람들은 믿음이 있지만 행함이 없기 때문에(42-43절)‘의인’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의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은 행함입니다. 양과 같은 사람들은 행함으로 의롭다함(이행칭의)을 받은 것입니다.

(5) 바울은 롬 8:4에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개정개역이“율법의 요구”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dikaiōma tou nomou입니다. dikaiōma는 롬 3:28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는 동사 dikaiousthai의 어근과 같은 어근인 dikaioō에서 나온 명사형입니다. dikaioō는“의롭게 하다”는 말인데, dikaiousthai는 dikaioō의 동사형이고, dikaiōma는 dikaioō의 명사형으로서‘의’(義), ‘의로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NIV는 dikaiōma tou nomou를 the righteous requirements of the law(율법의 정당한 요구)라고 번역했으나, KJV은 the righteousness of the law(율법의 의)라고 번역했다. KJV의 번역이 헬라어원문의 의미를 더 잘 반영한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KJV을 따라서 8:4를 번역하면“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이루어진다”(the righteousness of the law might be fulfilled in us)는 말은“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이행칭의)는 말입니다. 율법의 의는 율법을 지켜 행할 때 주어집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으면 율법을 지켜 의롭다함을 맏을 수 있음을 바울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절대적인) 의인은 세상에 없지만(전 7:20; 롬 3:10), 때로는 죄를 범하기도 하지만 회개하고 두루마기를 빨아(계 22:14) 의인으로 인정받은 ‘상대적 의인’들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은 노아(창 6:9), 아브라함(약 2:21), 욥(욥 1:1), 아벨(마 23:35), 롯(벧후 2:7), 요셉(마 1:19), 사가랴와 엘리사벳(눅 1:6), 아리마대 요셉(눅 23:50), 고넬료(행 10:22) 등이 의인들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이신칭의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행칭의도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마 5:20에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질문2: 어거스틴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조건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박사님이 인용하신 자기 진술에서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구원받은 이후’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표지와 열매로 그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답변: 어거스틴은 413년에 쓴 On Faith and Works(「믿음과 행함에 관하여」)에서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임을 아래와 같이 분명히 강조하였습니다.

제14장
“구원을 위해서는‘믿음으로만’(faith alone)으로 충분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행(good works)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확신(false assuarance)이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한 것은 선행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신칭의 이전에는 율법을 행하지 않아도 이신칭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율법을 행하는 것은 이신칭의 이후에 필요하다.”

“사랑 없는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 사랑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선한 삶을 사는 사람 외에는 영원한 구원은 주어지지 않는다.

“바울 서신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지만, ‘선행 없이 구원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제15장
주님은 마 25:41에서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고, 그들이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이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분리하신 것은, 그 누구도 “믿음으로만(faith alone), 죽은 믿음(dead faith) 즉 행함 없는 믿음이 영생을 얻는데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제23장
성 요한은 하나님을 믿기 원하면서 동시에 범죄하는 삶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쉬운 구원의 길도 약속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5:28-29에서 요한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이 “믿는 자”, “믿지 않는 자” 라고 말하지 않고, “선한 일을 행한 자”, “악한 일을 행한 자” 라고 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선한 일을 행하는 삶”(a good life)은 믿음에서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26장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고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삶을 살든지 상관없이 구원얻을 것”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사람들에게 주지 말라. 기독교인의 삶은 세례의 성스러운 특성(sacred character)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영생은 세례 안 받는 자에게도 허락되지 않거니와, 선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믿음으로만’(faith alone)으로 충분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행(good works)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잘못된 확신(false assuarance)’이라고 말합니다. 루터보다 1100여년 전에 어거스틴은 루터가 말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을 잘못된 구원론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위의 인용문들의 밑줄친 부분에서 어거스틴은 ‘조건’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지만, “행함(선행)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해서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조건’이란 무엇입니까? ‘조건’이란 “어느 일을 진행되게 하거나 성립되게 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기본요소”(국어국문학회 감수, 「새로나온 국어대사전」, 민중서관, 2000, p. 2230)를 말합니다. 믿음과 함께 행함은 구원을 얻기 위한 기본요소요 필수조건입니다. 행함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어거스틴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말이 행함이 구원이 조건이란 말 아닙니까?

질문3: 어거스틴과 루터가 칭의(稱義)에 대하여 앞에서 말한 것을 옹호하는 일치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답변: 어거스틴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했지, 루터처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선행(행함)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루터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질문2의 답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질문4: 성경 자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후’에 ‘율법의 행위’도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받을 만한 믿음(saving faith)의 표지와 열매로서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21과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이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위’를 말하지 않습니다.

답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미 질문1에 대한 답변에서 충분히 말씀드렸습니다. 서 목사님께서는“성경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saving faith)의 표지와 열매로서의‘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구원받을 만한 믿음(saving faith)의 표지와 열매로서의 ‘행위’가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서 목사님의 논리를 따르더라도 그런 ‘행위’가 없다면“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아니므로 구원이 없는 것 아닙니까? 서 목사님께서“구원받을 만한 믿음(saving faith)의 표지와 열매로서의 행위”를 말씀하셨는데, 그 표현 자체가 ‘행함이 구원의 조건’임을 말해주는 것 아닌가요? “마 7:21과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이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위’를 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질문1의 답변에서 충분히 말씀드렸기 때문에 다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질문5:‘행함’은 ‘칭의(justification)’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의 본분과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에 부합하기 위한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열매와 표지로서 강조되어야 합니다.

답변: 저는 성화라는 말보다는 행함이라는 말을 선호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화’는 구원의 조건으로 명확히 제시된 곳이 많지 않은 반면에, ‘행함’은 구원의 조건으로 분명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함은 이신칭의 때는 필요하지 않지만(롬 3:28) 이행칭의 때는 필요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도 질문1의 답변에서 충분히 답변하였으므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질문6: 예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 천국백성이 된 자들의 지상행로에 관해서 증거한 산상설교에서 ‘착한 행실’을 강조하십니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 경우에도 ‘행함’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부가적 조건으로 강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자녀다운 거룩한 성품, 곧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서의 변화인 ‘성화’의 열매로서의 ‘행위’입니다(엡 4:11~13). 그 행위도 우리 자신에게 돌려지는 공덕(功德)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화의 진전과 열매’가 있어도 우리의 공력으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돌려져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믿음으로만’으로 충분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잘못된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루터보다 1100여년 전에 어거스틴은 루터가 말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을 잘못된 구원론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답변: 산상설교를 마감하는 자리에서 7:21-27에서 예수님께서 “행함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은 그 앞에서 말씀하신 모든 행함에 관한 말씀들(5:3-7:20)을 다 포함해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행위도 우리 자신에게 돌려지는 공덕(功德)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열매’”라는 서 목사님의 말씀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말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구원받고 사도로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100%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 100%를 받아서, 자기도 마음, 목숨, 힘. 마음을 다 해서,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가진 것 100%를 다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음을 고백합니다(눅 10:25-28). 그러나 바울의 이 고백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여기서 끝났다고 하면, 바울은 자기 공로를 자랑하는 교만에 빠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가진 것 100%를 다 바쳐서 일했으나, 그 모든 공로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다 바칩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남는 것은 0%가 됩니다. 참으로 멋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100% 받아서, 그 받은 것 100%를 다 바쳐서 행하고, 그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다 돌려드리고 자기는 0%로 남는 것,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눅 17:10) 하고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절대로 구원의 공로를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었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당신은 굳은(능력이 많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 25:24-25) 하는 마음으로 아무 일도 안했습니다. 결국 그는 주인으로부터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고 저주받지 않았습니까? 한국에 이런 기독교인이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과 같은 한국교회의 위기가 왔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종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다음에 마음과 목숨과 힘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든 공로를 하나님게 다 돌려드리고요!

질문7-1: 교회사의 대표적인 비복음적이고 이단적인 두 대표적인 극단(極端)이 있습니다. 첫째로, 구원의 조건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의 충분성과 완전성을 부인하게 하고 다른 것을 첨가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극단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할례’를 첨가하여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그것은 ‘다른 복음’임을 천명하여 그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저주를 받을 것임을 강력하게 경고하였습니다(갈 1:6~10).

답변: 저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의 충분성과 완전성을 부인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이신칭의 받은 다음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바울과 야고보가 말한 이행칭의가 필요함을 말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바울과 야고보가, 그리고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큰 스승이신 어거스틴이, “행함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위해서는 이신칭의만 받으면 되고, 다른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잘못된 것 아닙니까? 제가 구원을 위해 믿음과 함께 행함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성경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동안 말씀해오는 구원의 진리인 “행함 있는 믿음”을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성경에 있는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루터가 성경의 진리인 행함을 구원의 조건에서 제거한 것이 잘못한 것 아닙니까?(계 22:19) 제가 믿음과 함께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고, 이신칭의 받은 다음에 이행칭의를 받아야 구원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바울이 말한 계명들을 지키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저는 성경에 없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질문1에서 충분히 답변드렸습니다.

질문7-2: 둘째로, ‘그리스도의 은혜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구실로 은혜를 자기 정욕의 도구로 사용하여 믿는 자의 ‘선행’은 불필요한 것 같이 가르치는 극단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사에 나타난 ‘도덕폐기론(무율법주의, Antinomianism)’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들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5:17). 그 속에 영생을 가지고 있으며(요일 5:12,13), 보혜사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벧후 1:3~4).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걸려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빙자하여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요 자기 행실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 대속의 은혜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유 1:4). 그런 의미에서 복음 사역자가 ‘믿는 사람들의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의 열매와 표지로서 강조해야 합니다. 그 강조가 없는 가르침은 균형을 잃은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행함’의 열매가 모자란 것이 복음을 주밀하고 섬세하게 가르치는 일을 등진 결과라고 저는 믿습니다.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청교도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선한 행실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답변: 옳은 말씀입니다. 서 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그 길이 바로 ‘오진 믿음으로만’(sola fide)이 아니고, ‘행함 있는 믿음’(fide cum opera)으로 구원 얻는 길입니다. 지난 500년 동안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면서, 행함을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만’의 구원론은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 구원론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오늘의 동서양의 교회의 피폐한 모습이 잘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행함 없는 오직 믿음만이 의롭게 하고, 자유하게 하고, 구원한다”(“A Treatise on Christian Liberty”, Works of Martin Luther with Introduction and Notes, Philadelphia Edition, Vol.2, Muilenberg Press, 1943, p. 317)는 말은 행함을 강조하는 다른 말들을 약화시키고 사실상 무효화시켜왔습니다. “칭의와 구원에 행함이 필요 없다”고 말한 다음에, 행함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그자체로 모순 아닌가요? 그래도 계속해서 ‘오직 믿음으로만’의 구원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해서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청교도처럼‘선한 행실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목사님께서,‘도덕폐기론(무율법주의, Antinomianism)’을 이단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을 지키는 행함이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구원론을 거부하십니끼? 오히려 서 목사님의 입장에서는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의 성경적인 구원론을 지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들이 지켜야 할 율법은 구약에 있는 율법 전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은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율법과 계명들, 그리고 바울을 비롯한 신약성경 저자들이 우리들에게 지키라고 권하는 말씀들만 지키면 됩니다.
질문8: 우리의 절대적인 표준은 성경이며,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해석의 기준은 교회사를 통하여 옳다 평가된 정당한 개혁주의적인 교리의 체계라고 본인은 믿습니다. 박사님도 같은 의식을 공유하고 계심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답변: “우리의 절대적인 표준은 성경이며,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라는 서 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위에서 제가 말씀드린 내용들 전체가 성경을 근거로 한 진술들입니다.

개혁주의적인 교리의 체계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개혁주의적인 해석이 모두 다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라는 구원론이다. 이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서 수정되어야 한다. 루터나 칼빈은 어거스틴을 존경하고 의존했는데, 어거스틴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라는 구원론을 신랄히 비판하고, “행함 있는 믿음으로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을 위에서 충분히 설명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의 책을 구하셔서 직접 읽어보시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에서 부족하지만 저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답변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서 목사님께서 저의 의도를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질문 주셔서 미진한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 주심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토론의 장을 마련해 주신 들소리신문사에도 감사드립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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