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제단(贖罪祭壇), 누군가에 의해서 또 나 자신을 통해서 발생한 이 세상의 고난과 두려움들이 어느덧 감당할 길 없는 한계 앞에 서게 되었다.

인류사의 속죄제단은 일찍이 골고다 예수로 이루어졌으나 그것을 인류는 일과성 제단으로 처리(이해, 믿음)함으로 인류는 다시 한 번 메시아의 제단을 부르게 되었다.

그 제단은 여기, 오늘의 현재 안에서 인류의 절박한 구원의 요청 앞에 다시 세워야 한다. 그 을씨년스러운 제단, 무죄한 예수가 발가벗은 모습으로 치욕을 당하며 죽어갔던 십자가!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 고난의 분량이 남아 있으시군요. 주여. 내가 회피하여 돌아선 그 아픔의 분량, 그리고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면서 쏟아내야 했던 주여, 그 피로도 모자란 것인지라 주는 이제 주의 고난에 동참해야 할 나와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시는가요.’

그렇다. 그 고난의 남은 분량,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외면한 속죄제단의 참 모습을 다시 복원한다는 소명으로 먼저 깨달은 자들은 속죄제단 앞으로 모여들어야 한다.

우선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자. 모두들 불신의 안경을 끼고 있다. 지난 주말의 난폭한 민노총 주도의 노동자 대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도 그들의 분노에 얼마간 동의한 듯한 심중을 읽을 때 우리는 더 큰 불상사를 마음속에 그려볼 수 있다. 북한의 비인간적인 권력을 잘못된 것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종북파로 치부된다 하여도 겁낼 것 없다는 우리들의 형제자매들의 일부러 비틀어지고 싶은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런가, 그것 뿐인가? 대통령의 마음(정책)이 미래 한국에 있음에 대해서 잘 알면서도 그들은 과거, 곧 박정희의 딸로만 묶어두려는 세력들 앞에서 자칫 국체가 흔들리는 결과를 낳게 될까 봐서 두렵다.

속죄의 제단이 필요하다. 청나라 끌려갔다가 되돌아온 환향녀들의 앞날을 위해 홍제동 어느 곳에 못을 파서 그 곳에 가서 목욕한 여인들의 정조만큼은 ‘순결’로 판정했던 조선조의 위로 차원의 목욕탕이 아니라 진실로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또 용서 받을 수 있는, 민족의 한을 한으로 끝내지 않고 창조 에너지로 상승시켜볼 그런 제단이 시급하게 되었다.

어디 국내뿐인가, 국제환경도 절박하다. IS(이슬람국가)가 폭도화 되어 세계를 불 지르기 시작한 그 원인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피는 피로, 복수는 복수로 대응하는 방법은 율법이요, 현대 이성이고, 휴머니즘이고, 한낱 값싼 종교들의 방법론이다.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휴머니즘, 이성주의, 종교주의까지 뛰어넘는 ‘무한 속죄’, ‘무조건 속죄’의 예수의 원리를 다시금 가다듬어야 한다.

유럽은 일단 냉정을 되찾아라! 흥분을 감추라. 폭력사태 이전의 계획대로 난민정책을 지속하라. 그들 속에 숨어서 들어오는 폭도들은 이미 폭도가 아니다. 그들은 색출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과 유럽의 원인적인 과오를 다시 계산하고 새로운 위기돌파의 비법을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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