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 4색-부활 속의 나, 내 속의 부활이 있어 고난 속에서도 견딘다

   
 

 ● 첫번째 사람.... 40년간 신·구약 성경그림 완성한 서봉남 화백

“아내 몫까지 부활체로서 힘 있게 살아낼 것”

"24년 간의 투병생활 끝에 떠난 아내, 그 몫까지 부활체로서의 삶 살 것”

24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아내가 지난 1월 2일 소천했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맞는 부활의 날, 서봉남 화백(72, 연동교회 은퇴안수집사)에게는 더욱 특별하다.

“40년 가까이 성경 66권을 그리면서 네 식구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때그때 만나를 내려주신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시간이었어요. 고난은 성도의 삶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서 화백은 33세 때 ‘네 달란트가 무엇이냐?’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안정적이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기독 미술인’의 길을 걸어왔다.

굵은 선과 투박한 질감으로 그림에 동양적인 정서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내는 향토작가, 동심작가로 국내외로 잘 알려진 서봉남 화백, 하지만 그의 중심 작업은 줄곧 성경을 그리는 것이었다. 40년 가까이 성경 66권의 내용을 76점의 그림에 담았고, 그동안 집 두 채가 없어졌다. 행여나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작품을 팔까봐 작업을 완성하기까지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아내는 위장병이 발병한 이후 유방암, 뇌출혈로 인한 반신불수, 만성신부전증으로 24년간 혈액투석을 받아야 했다. 합병증으로 귀도 먼 채 고통의 삶을 살았다. 그래도 서 화백은 가난도, 아내의 병도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이라고 믿고 있었다.

“자연계도 겨울이 있어야 싹이 나듯 사람에게도 고난이 옆에 있어야 해요. 배부르고 편안했다면 성경그림을 완성하지 못했을 겁니다. 두 자녀가 고등학교까지 모두 마치고 나니 아내가 병을 얻었어요. 하나님은 그렇게 나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시더군요.”

매일 그림을 붙들 수밖에 없었다. 성경에 몰두하고 그것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순간은 그에겐 간절한 기도의 시간이었다. 서 화백은 “이스라엘의 40년 고난이 있었기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며 자신이 지나온 고난의 시간은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겪어야 했다고, 그런 의미에서 고난과 부활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늘 함께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고난은 저만치 미뤄두고 부활찬양만 드높이는 것은 온전한 고난도, 온전한 부활도 아니라고 했다.

서 화백의 성경 그림은 한국보다 해외에서 먼저 알아봤다. 영국 스코틀랜드 빈 교회에 그의 이름을 딴 ‘봉남성화미술관’이 들어섰고, 중국에도 내년에 설립될 예정이다.

서 화백은 “이제는 40년 고난의 기간을 지나 부활의 꽃을 피워주시는 것 같다”면서 “그림이 세계 공통 언어인 만큼 성경 그림을 통해 복음이 이 땅에 편만하게 전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성경 그림 그리다 어느덧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 서 화백은 부활의 삶을 힘 있게 살아낼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지만 신앙 안에서 함께 행복을 나누었다”면서 아내의 몫까지 “부활체로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로 제3의 인생을 살 것”이라고 말했다.
  

 ● 두번째 사람.... 하나님에 대한 무지 깨닫고 강대상 떠난 김대은 선교사 

   
 

“죽어서 가는 천국?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만나다”

“하루하루가 하나님 나라 위한 삶과 죽음의 연속이고, 나를 쳐서 복종시켜
 얻는 부활은 역설적 행복”

“아빠! 바다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닷가에서 작은 두 손 안에 한 움큼 바닷물을 떠올리고는 그것을 바다라며 좋아하는 아들의 모습, 김대은 선교사(43)는 ‘나의 부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주문에 전도사 시절, 큰아들이 4살 때의 사건을 떠올렸다.

“바다와 같이 넓고 광활한 하나님의 존재인데 두 손에 떠올린 만큼만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가르쳐왔던 것을 깨달은 후로 더 이상 강대상에 설 수 없겠더라고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히 알기 전까지는요.”

목회자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성공적인 목회를 꿈꿨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 강대상은 그의 인생에 유일한 목표였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아들의 “아빠! 바다다!” 하는 외침에 모든 것이 깨졌다. 김 선교사는 그때가 그의 목회와 신앙, 인생 모두가 거듭난 순간이었다고 했다. 하나님을 내 안에 온전히 담을 수도 없으면서 마치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양, 나의 작은 이해와 지식으로 성도들을 가르치려 들었구나 하는 깨달음에 깊은 고뇌 끝에 그는 강대상을 떠났다.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께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응답은 “입으로 하는 설교자가 아니라 삶으로 하는 설교자가 되라”였고, 그 후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이야기’ 일명 세.아.이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성경을 읽는 관점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설교거리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면 깨달음 이후 “성경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맞춰 읽어 내려갔다.

“성경을 다시 읽으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성경 66권을 다 뒤져봐도 성경은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에 대해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임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죽음 이후에 이르는 천국과 지옥, 그렇게 배웠고 가르쳤는데 성경은 다르게 말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죽은 다음에 갈 천국을 위해 무엇을 쌓고 빌고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천국이 임한 것을 믿고 매일매일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 그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 부활을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신 목적을 찾고 그것을 이뤄가는 것, 세.아.이를 통해 벌이는 희망대출, 친환경 나눔 발전소, 착한 병원 프로젝트, 세상을 위한 가게 등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시켜가는 일환이라고 김 선교사는 소개했다.

김 선교사는 죽음이 없다면 부활 또한 없다면서 “하루하루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과 죽음의 연속이고, 나를 쳐서 복종시켜 얻는 부활은 역설적 행복”이라며 “그렇게 순간마다 부활을 살아내는 실천이 절박하게 필요한 시대”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연코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의 행진이라고 고백했다.
 

   
 

 ● 세번째 사람.... 교도소 선교 남편과 함께 하는 박종애 강도사
“부활의 소망 아니면 이겨낼 힘 없을 것”

“‘세속적 복’을 바라고 온 사람들에게 ‘진정한 예수님의 복’을 가르쳐 주어야 할 과제가 교회에 있다”

무속인의 외할머니에게서 태어난 박종애 강도사(조용진 목사 사모)는 신앙인이 되기 전, 어렸을 때부터 ‘왜 내 인생이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곧잘 던지곤 했다.

예수님과의 첫 번째 만남은 ‘부활신앙’에서 출발하는 것 아니냐는 박 강도사는 진짜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마음에서 고등학교 무렵 자기 발로 교회를 찾아갔다. 그런데 웬일일까? 어렸을 때부터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을까,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 느끼게 됐다.

그 이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 땅에서 이전처럼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앙이란 이 땅에서의 삶이 목적이 아님을 깨닫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실체가 확 들어왔다. 그 덕분에 곁길로 한 번도 가지 않고 온전히 신앙 안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음에 감사하다고 고백한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을 이겨낼 힘은 없었을 것입니다.”
박 강도사는 부활의 소망, 영생의 소망을 알게 된 이후 ‘그러면 그것을 모르는 저 수많은 사람은요?’하고 하나님께 물었고,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며 복음을 전하게 됐다.

좀 아쉬운 것은 ‘교회’가 실제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을 토대로 전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이 동반된다는 것을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으니 그런 성경적인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세속적 복’을 바라고 온 사람들에게 ‘진정한 예수님의 복’을 가르쳐 주어야 할 과제가 교회에 있음을 강조하는 박 강도사는 “이 땅에서 인내하며 잘 견디며, 절제하고 충성하며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을 가르쳐줘야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철야와 금식을 많이 하면 드리는 기도를 모두 들어주실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내 소원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아버지의 뜻대로 맡기며 주님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 되도록 하는 것이 기도임을 깨달았다.

그래도 이 땅에서 사는 것은 만만치 않다. 함께 하는 신자들 역시도 그런 ‘좁은 길’을 가라는 가르침을 따르지만 쉽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힘들죠”라고 위로하는 게 고작이다. “네, 힘듭니다”라고 대답하는 그들에게 “그래도 교회는, 신자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가르치는 게 교회입니다”라고 좋은 소리로 위로하지 못함을 양해해 달라고 말한다.

“진짜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 속에 가는 모습을 봅니다. 풍족하면 세상 것을 놓지 못하는 것도 많이 봅니다. 내일 죽더라도 미련없이 주님 품으로 갈 수 있는 부활의 신앙으로 우리 모두 승리하길 기도합니다.” 

   
 

● 네번째 사람....신앙의 고민과 갈등 속 ‘주님 바라기’ 김순남 장로(가명)


“저에게도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시겠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정말 믿고 싶은데 왜 믿어지지가 않나요”

“부활의 주님, 인격적인 주님의 실체를 만나기 위해 참으로 많이 애써보았지만 전 여전히 주님과 부딪히지 못하고 ‘주님 바라기’로만 사는 못난 신자입니다.”

김 장로는 모태신앙인으로 태어나 늘 교회에 몸담고 살고 있는 ‘착실한 신자’로 정평이 나있지만 그의 내면에는 이런 갈증이 있다고 토로한다. 그러니 더더욱 드러내놓고 얘기하기도 꺼려진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당연히 어린 마음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예수님이 좋아하시겠지라는 생각을 했고, 학생시절을 거쳐 청년시절에는 ‘과연 그러한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다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낳고 생계를 이어나가는 가장으로서 일하면서는 ‘예수 믿는다고 뭐, 특별한 것이 없네’라는 생각까지 찾아들곤 했다.

그러나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는 어느덧 주 예수님을 찾게 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너는 어느 실체에게 네 마음을 이토록 쏟아내고 있느냐’며 자문하기도 했다.

40대 후반, 하던 일이 막막해져서 도저히 어쩔 수 없을 때 기도원에 들어가 한 달 가량을 지내면서 기도와 말씀 속에 살려 몸부림치니 영이 맑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존재도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일이 잘 풀리고 평안할 때는 신앙의 끈을 느슨하게 하는 자신을 보면서, 교회 안에서 좀 더 열심히 해보려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도 열정을 쏟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몸이 서서히 아프다가 어쩔 수 없는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김 장로는 이제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찾는 수밖에 없게 됐다고 고백한다.

“의사도 도무지 왜 그렇게 몸이 아픈지 찾아내지 못한 상황이 몇 달 지속되니 정말 힘겹더라고요. 내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계신 것인지 처음에는 악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기운이 달려서 악을 쓰지도 못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의 말에서는 깊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밖에는 자신을 치료해 주실 분이 없다는 믿음이 묻어나왔다. 그는 자신이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을지, 그것을 자신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 얼굴을 보고, 정말 자기에게 왜 이렇게 많은 시련과 고통을 주셨는지, 자기가 원하는 꿈을 하나님도 좋아하셨을 것 같은데, 왜 이뤄주지 않으시는지 꼭 묻고 싶다고 항변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정말 믿고 싶은데 왜 그런지 무작정 믿어지지가 않아요. 하나님이 대면해주시지 않아 속상한 마음, 예수님이 저를 버려두시고 계신 것 같은 서운한 마음은 있지만 그래도 저는 그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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